임정로드 4000km - 대한민국 100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투어가이드
김종훈 외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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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독립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인 2019년은 뜻 깊은 해다. 많은 관련 책이 나왔고 기념식도 성대하게 거행될 것으로 보인다. '임정로드 4000km'도 관련 책들 가운데 하나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항저우, 창사, 광저우, 류저우, 충칭 등지를 떠돌았다. 그 길이 4000km라는 사실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임정로드 4000km'는 세세한 여행 안내가 돋보이는 책이다.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김구 선생의 효창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부분을 0부로 정했고 마지막 10부를 번외편 일본과 대만 우리가 잘 몰랐던 영웅들의 마지막 걸음으로 정했다.

 

도입부라 할 0부에서 만나게 되는 사연은 이승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다. 그는 김구 선생 묘소인 효창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앞에 거대한 효창운동장을 조성했다. 임정로드 4000km의 시작점은 예전에는 김신부로(金神父路)로 불렸던 서금2(瑞金二路)이다.

 

"임정로드 4000km팀이 카메라와 삼각대, 지도 한 장을 들고 첫 걸음을 뗀 곳이다."(유래가 정확하지 않은 서금이로는 서금 1로와 함께 하는 이웃 길인 2로이고 김신부로의 김신부는 김대건 신부를 말하는 것으로 김신부로는 속칭이다. 서금을 중국어로는 루이진이라 한다.)

 

예관(?觀) 신규식 선생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리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이란 호를 가졌던 선생은 중국 혁명 지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상하이 지역에 독립운동 기반을 닦은 분으로 예관은 을사늑약에 분노해 음독 자살 시도 끝에 살아남았지만 오른쪽 시신경을 잃어 흘겨본다는 의미로 지은 호이다.

 

저자들은 걷고 또 걸어야 길이 생긴다는 말을 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의미다.(110 페이지)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듯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이자 정신이다. 더구나 올해는 임정수립 100주년의 해이니 더욱 각별하다. 임시정부가 처했던 여건은 여관(중국 용어로는 '여사: 旅社'.)을 거처로 삼기도 했을 만큼 열악했다.

 

파수꾼을 자처한 세 인물 김철, 송병조, 차리석의 이름도 기억해야 하리라. 특히 평안도 출신으로 신학문을 접한 뒤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가 되어 후학을 양성한 데 이어 비밀결사인 신민회 요원으로 활약했던 차리석 선생은 임시정부의 내일은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저자들은 우리가 치욕스런 역사까지 기억하고 보존하는 중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172 페이지)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위안부 관련 진열관 하나 없이 소녀상 하나 세우는데도 일본의 눈치를 살폈다.(176, 177 페이지)

 

저자들은 정부가 지켜주지 않자 학생들이 나서서 할머니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을 가장 안타깝고 아쉬웠던 지점이라 덧붙였다. 금릉대학(현 난징대학)은 여운형, 김약수, 조동호, 김마리아 등이 수학한 곳이고 약산 김원봉 장군이 의열단을 만들기 전 공부한 곳이다.(약산 김원봉 장군은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컸던 유일한 인물이다.)

 

약산(若山)은 고모부이자 스승인 황상규의 주선으로 짓게 된 호다. 황상규는 김원봉과 김두전과 이명건을 의형제가 되게 했고 각각의 호도 지어주었다. 김원봉은 약산,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다. 산과 같다, 물과 같다, 별과 같다는 뜻이다.

 

정정화 선생이 장강일기(長江日記)’에 썼듯 김원봉은 해방 후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모욕을 당하고 결국 자발적으로 북으로 건너갔다. 약산의 금릉대학 동문 중 한 분이 몽양 여운형이다. 좌우합작을 위해 헌신했던 몽양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을 당했는데 이는 약산으로 하여금 북으로 가게 한 위협이 되었다.

 

의열단을 창설한 약산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었다. "애국지사에게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이란 말로 운을 뗀 저자들은 임정 멤버들이 정정화 여사의 사진을 보고 보인 첫 반응이 모두 똑같았다는 말을 전한다. 엄청 미인이라는 말이었다.

 

정정화 선생은 열살에 구한말 고위 관료인 동농 김가진 선생의 아들인 김의한과 결혼을 했다. 9년 뒤 시아버지와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격 망명하자 선생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홀로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장강일기에 의하면 드디어 선생이 시아버지와 상봉하자 시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시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여길 왔느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게야?"라고 말했고 정정화 선생은 저라도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 허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고 시아버지는 "그래 잘 왔다, 고생했다, 참 잘 왔다, 용기 있다."고 답했다.

 

정정화 선생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 독립 자금을 모으는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탐사팀은 심한 고생을 했다. 예정보다 일찍 떠나는 기차도 한 몫을 했다. 저자들은 이제 건국절 논란은 그만 하자고 말한다. 임시정부는 1921년에 외교권을 행사했다.

 

저자들이 말했듯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1948815일을 건국절로 못박는 세력들의 잘못을 알리고 임시정부 탄생일인 1919411일을 대한민국의 시작일로 알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들은 그런 점이 임정 프로젝트의 이유이자 목적이라 말한다.

 

9부는 해방의 감동을 느끼다란 부제가 붙은 충칭이다.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는 피난의 연속이었다. 상하이에서 12, 충칭에서만 4번 청사를 옮겼다.

 

김구 선생의 강력한 의지로 탄생한 광복군은 1942년 조선의용대와 합쳐진 후에야 대한민국의 정식 군대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김구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며 조선의용대 총대장인 김원봉 장군을 광복군 부사령 및 1지대 지대장으로 선임했다. 군의 좌우 합작 뿐 아니라 임시정부 의정원에도 좌익진영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1945815,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수년 동안 준비해온 국내 진입은 중단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3개월이나 해방 조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그 사이 미소는 한반도에 38선을 그었다. 한 달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마지막 부()에서 윤봉길과 윤동주, 송몽규의 묘한 인연을 보자.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용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시샤대학 영문과 재학중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송몽규는 만주 은진중학교를 거쳐 서울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후 1942년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윤동주 생가를 관리하며 명동촌 촌장을 지낸 송길연씨란 분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가 명동촌의 선바위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1907)된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이 세운 간도의 첫 근대식 학교였던 서전서숙은 후에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학교로 발전했다.

 

안중근 의사가 간도로 갔는데 이유 중 하나는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충북 진천 출신인 이상설은 25세때 과거에 급제한 뒤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내던지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선 데 이어 이듬해에는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으로 갔다.

 

저자들은 다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고 말한다. ‘임정로도 4000km’는 중요 부분을 간추려 설명하는 압축적 편성이 돋보인다. 대장정이라 말하고 싶다. 감사드린다.

    

 

 * 네이버 작가 소영처럼님이 제공한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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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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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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