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 <무예도보통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념
김준혁 지음 / 더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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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1027일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무예서라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壯勇營)'은 바로 그 '무예도보통지'의 유네스코 등재를 즈음해 나온 김준혁 교수의 책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선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제보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를 잇는 무예서이다. 정조가 이용후생의 실용지학을 추구하는 이덕무, 백동수 등의 인물들에게 지시해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것은 사도세자에 대한 또 다른 추숭작업이었다.

 

저자는 김체건, 김광택, 임수웅, 백동수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무예의 계보는 장용영을 만들어가는 오랜 준비이고 인연이라 말한다.(28 페이지) 임수웅은 사도세자의 호위무사, 백동수는 정조의 호위무사였다. 무예도보통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사도세자이다.

 

15세에 처음 대리청정을 한 사도세자는 영조와 관계가 어긋남에 따라 무예서 편찬에 힘을 쏟았다. 영조를 이어 즉위한 정조가 펼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현양(顯揚) 사업은 자신이 효의 군주임을 보여주는 일이었고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자 왕권 강화의 수단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조선 후기 기본 군사체제를 안정화시킬 중요한 행위인 동시에 신진무반층을 양성하려는 포석이었다는 점이다. 사도세자는 북벌을 천명했던 효종을 늘 닮고자 했고 정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닮고자 했다.

 

정조는 무기 제작 의도를 가졌던 사도세자를 계승해 1795년 윤 2월의 화성행차에서 매화포(埋火砲) 실험을 했고, 군복을 입고 다녔던 효종처럼 군복을 입고 다닌 사도세자를 계승하기 위해 군복을 입고 행차를 했다.

 

장용영 외영을 화성에 신설하고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1795년 윤 2월 화성행차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정조는 환궁 길에 병자호란의 치욕이 서린 남한산성을 방문, 승군들의 훈련을 관람하고 지뢰의 일종인 매화포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286 페이지)

 

정조는 효종이 후원에서 북벌을 위해 말타기 연습을 한 것을 좇아 본인도 청양문 앞에서 말을 타고 다녔다고 강조했다.(220 페이지) 정조는 평양 일대의 서북 지역의 무사들을 활용하려고 한 사도세자의 의도를 따라 서북 지역 무사들을 장용영에 소속시켜 활용하려 했다.(202 페이지)

 

의미 있는 점은 정조가 능허관만고(凌虛官萬稿)’를 편집해 사도세자가 영조와 정성왕후의 만수무강을 송축하며 쓴 '연상사(延祥辭)''장락사(長樂辭)'를 수록한 것은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를 모해할 뜻이 없었음을 밝힌 것이라는 글(90 페이지)이다.

 

정조가 영조대에 만들어진 무예신보가 사도세자의 주관으로 편찬된 것임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능허관은 사도세자의 호이다. 하늘을 높이 날다, 허공을 가르다, 승천하다, 비상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이 호는 사도세자의 무인적 기질을 잘 드러내준다.) 즉위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정조는 기존의 군왕들에 비해 더욱더 군제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142 페이지)

 

정조에게 필요한 것은 군권 장악이었고 불필요한 군영(軍營)의 통폐합이었다. 정조는 결코 나약한 버릇에 매달려 400년 동안 전해오는 임금의 권한이 자신 때문에 허물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153 페이지)

 

정조가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설치하자 반대가 심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하는 부대라는 것을 안 세력들로부터 견제를 받은 것이다. 군대 육성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여 제도를 개혁하는 힘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정치사가 서인(훗날 노론)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그들이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184 페이지)

 

정조는 성호 이익의 친위군병론을 적극 받아들여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창설했다.(186 페이지) 정조는 즉위 직후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노론의 사병과도 같은 오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을 혁파하고 조선 초기 병농일치를 위주로 하는 오위체제로 군제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저자는 장용영 창설 목적을 셋으로 설명한다. 1. 친위군 강화, 2. 군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안정, 3.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등이다. 정조가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은 봉림대군(후에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갔을 때 자신을 호위하여 함께 다녀온 8장사를 별군직으로 임명하여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199 페이지)

 

정조가 장용영 깃발에 대한 정식을 세운 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듯 장차 화성 축성을 통해 새로운 국가건설을 하겠다는 개혁 의지와 조선의 군제가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주적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정조는 북벌론의 연장선상에서 오위(五衛)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북벌론과 북학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214 페이지)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굳이 수원부로 옮긴 것은 그곳이 단지 명당이어서만은 아니다.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 터는 선조와 효종의 능침으로 정해졌던 곳이다.(221 페이지) 정조는 대부분 당색이 노론 벽파가 아닌 시파 내지 남인, 당색 없는 인물들을 장용대장으로 기용했다.

 

장용영은 기존의 군영과 다른 직제로 편성, 운영되었다. 정조는 국가 개혁에서 핵심을 국방개혁으로 꼽았다.(258 페이지)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을 특별 대우하는 한편 그들의 오만한 폐단을 막고자 하였다.(266 페이지)

 

장용영이 오군영과 모든 면에서 위상이 다르다고 생각한 정조는 그에 맞게 대우가 달라야 한다고 인식했다.(275 페이지) 정조는 특별 하사금을 주는 등 장용영의 가난한 장교나 군병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276 페이지)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쓰면서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강하게 시킬 것을 지시했다.(281 페이지) 즐풍목우는 바람으로 머리를 감고 빗물로 목욕하라는 의미이다. 장용영 기병들의 진법 훈련 수준은 조선 최고의 수준이었다.

 

정조가 선대 국왕 묘소 참배 후 돌아오는 중 실시한 군사훈련은 대체로 즉흥적이었다. 의도를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289, 290 페이지) 정조에게 수원은 군사정책 개혁 및 민생안정 개혁의 산실이었다. 그래서 수원에 장용영 외영을 만든 것이다.

 

수원을 핵심 거점으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상 요지였다는 점, 교통상 요지로 타 지역에 비해 상업이 발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 등이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면서 화성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했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로 일개 고을이 국왕의 친위도시로 거듭나는 일이기도 했다.(299 페이지)

 

장용영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정조 호위였다.(325 페이지) 정조는 화성 축조 재원을 마련할 때에도 금위영과 어영청의 번상군을 10년에 한해 매번마다 각 1초씩 감축하는 대신 포()를 부과하여 이를 화성 축조 비용으로 충당케 했다.(333 페이지)

 

정조는 이전에 한 번도 실시한 적 없는 야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장용영외영의 군사들과 백성들의 합동훈련을 통해 화성을 실질적으로 방어하게 한 것으로 장기적으로는 정조의 화성 거주를 위한 훈련의 의미를 갖는다.(347 페이지)

 

저자는 고위 신하들과 무인들에 비해 3배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 역사상 최고의 신궁(神弓)인 무인 군주 정조의 군복을 입은 늠름한 모습이 조선을 지킬 믿음직한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라 말한다.(349 페이지) 저자는 백성 없는 군대는 의미가 없고 군대 없는 백성은 위태롭다고 말한다.(352 페이지)

 

장용영 군사훈련의 특징은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는 장용영이 조선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353 페이지) 저자는 정조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본인 재위시에는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왕주도의 것이었다는 점이라 말한다.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이후로 60년간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는 틀린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라 말하며 정조 탓에 세도정치가 있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저자에 의하면 정조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통해 개혁 시스템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안타깝게 정조는 이 천명(闡明) 이후 유명을 달리했다.

 

정조는 군신공치를 실천하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왕권을 강화해 의도대로 국정을 운영했다. 군주는 자신만이 아닌 백성들을 위해 때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상대를 다독거리기도 하고 정국을 통합하기 위해 신하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다.(355 페이지) 이것이 바로 군주의 역할이다.

 

그래서 정조는 당파로 갈라져 싸우지 않고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정조 타계 이후 반개혁 세력에 의해 정조의 개혁 프로그램은 지워졌다.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장용영이 혁파된 것이 그 한 예이고 가장 아픈 현실이다. 이것으로 정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충분히 제거될 것이라 생각한다. 많이 배우고 느꼈다. 저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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