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직설 - 세상과 맞서는 당당한 청춘의 힘
김창호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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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사회에 접어들면서 특히 젊은이들은 삶의 방향을 잡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안으로 철학공부를 권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깁창호교수님이 엮은 <철학직설>입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은 스펙쌓기에 열중하고, 그 과정에서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힐링 프로그램이 유행을 타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답은 철학에 있다는 것인데, 돌이켜 보면 저도 이 나이가 되도록 철학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의 기초교육이 뭔가 잘 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편저자는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권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철학은 물음에서 시작합니다. 이제 기존의 모든 인식과 체제에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물음이 없는 곳에 생각은 없습니다.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고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 나아가 ‘사회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가. 그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심지어는 ‘인간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처럼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앞가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철학직설>에는 모두 다섯 가지의 화두를 정하고 각각 네 꼭지의 글을 담았습니다. 그 다섯 가지의 화두는 ‘진리와 상식’, ‘역사와 진실’, ‘개인과 사회’, ‘시민과 국가’, 그리고 ‘경제와 사회’입니다. 모두 열여덟분의 필진이 스무 꼭지의 글을 쓰셨는데, 사전에 형식을 협의하셨던가 봅니다. 글머리에서 고사를 인용하거나,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을 패러디하여 읽는이가 주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문성원교수님께서 쓰신 ‘진리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글에서 감시자가 없어도 죄수들 스스로가 감시할 수 있는 감옥, 즉 파놉티콘을 1791년 처음 설계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과 1975년 저서 <감시와 처벌>을 통하여 파놉티콘의 감시체계원리를 사회 전반으로 확대 해석하여 주목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의 가상의 대화로 이야기를 열고 있는 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을 찾았을 때 최소한의 인원으로 옥사를 감시할 수 있도록 방사형으로 복도를 설계한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던 생각이 났습니다.

 

이 글의 필자는 한 사회의 권력의 형태로 종교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는데, 당시 진리는 신의 말씀이었고, 신앙은 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이를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표현했고 이 말은 믿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알 듯 말 듯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종교의 권위를 지탱하는 결정적 요소라는 것인데, 그 믿음이 만들어진 과정은 <신의 뇌; http://blog.joins.com/yang412/13285467>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진화론과 우주의 생성에 관한 이론 등을 통하여 종교계에서 주장하는 창조론과 대립하고 있는 과학계 사이의 갈등을 정리하는 글이 이어지고 있어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생각을 정리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인용해보면, “종교와 과학이 다루고 있는 실재의 본성은 서로 다를 뿐이며, 서로 환원될 수 없고 두 실재 모두 동시에 진실이다. 그것은 종교언어와 과학 언어의 특수성에 기인한다.(64쪽)”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 그 둘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는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해야 할 당위 앞에 서 있다고 할 것이다.(67쪽)”라고 결론을 맺고 있는데, 종교계와 과학계 어느 한편의 시각을 고집한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절묘한 중재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어정쩡하게 봉합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밖에도 역사의 주체는 엘리트일까 민중일까 하는 의문이라던가, 공동체주의가 유효할 것인가 하는 의문,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민족주의가 옳은 것인가, 성장과 분배의 문제, 신자유주의가 옳은 길인가 하는 문제 등등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들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오늘날 한국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모습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현상을 직시하고 나아갈 바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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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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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헌님이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공부법; http://blog.joins.com/yang412/13062938>에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들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고 역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서 현실사회의 개연성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소설의 경우는 별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읽는 편입니다만,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읽는다면 책을 고르는 재미에 더하여 책을 읽으면서도 집중하는 관점이 생겨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온통 회색빛 하나로만 되어 있는 세상에서도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어도 무언가 다른 점이 있고, 희망이 있어서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머리말에서 강신주박사는 감정이 없다면 삶의 희열도, 삶의 추억도, 그리고 삶의 설렘도 없을 것이고,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우리는 수많은 색깔로 덧칠해진 추억을 꺼내 들며 행복한 미소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소설을 재료로 삼아서 인간의 감정에 대하여 공부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감정은 비루함, 자긍심, 경탄, 등 모두 48가지입니다. 저자는 48가지의 감정을 무슨 근거로 뽑았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만, 매장 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주제에 맞는 글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긍심(aca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40쪽)”라는 글귀에서 자긍심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추출해냈고, 그 자긍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http://blog.joins.com/yang412/12822675>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랑을 시험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읽어냈습니다만, 저자는 ‘자긍심’을 읽어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토커의 편지, 그러니까 장마르크의 편지는 샹탈로 하여금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매력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스포트라이트가 샹탈에게 엄청난 자기만족, 혹은 자긍심이라는 감정을 부여한 것이다.(40쪽)” 책을 읽는 사람마다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48개의 주제에 대하여 각각의 주제에 맞게 해석되는 48개의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주제를 설명하고, 주제에 관한 스피노자의 설명을 <에티카>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에티카>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대표적 저작으로 신, 정신과 정서, 인간과 자유 등의 주제를 통해 현대 철학의 쟁점인 존재론과 인식론, 윤리학의 핵심 문제를 다뤄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에티카> 제3부의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에서 골라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어서 주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림이 나오고, 주제를 짧게 요악하는 글을 붙이고 있습니다. ‘자긍심’에는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42쪽)” 그 다음에는 작가소개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참 절묘하게도 작가 소개와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는 주제를 잘 축약하여 한쪽을 넘기지 않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끄는 점입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통하여 우리는 모두 48권의 책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작품들은 바로 이 책을 기획한 편집자가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고 합니다. 저는 주제에 맞게 새로 그린 그림일까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그림 역시 그녀가 골랐다고 하는데, 그림에 대한 설명까지도 덧붙였더라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8가지나 되는 소설 가운데 제가 읽은 것은 불과 6가지 밖에 되지 않고 영화화된 것 까지 해도 8가지 밖에 되지 않아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만, 강신주박사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작품해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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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뇌 - 신은 뇌의 창조물. 뇌과학이 밝혀내는‘믿는 뇌’의 메커니즘
라이오넬 타이거 & 마이클 맥과이어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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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영역에 관한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일은 일단 부담스러워하는 편입니다. 이유는 종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적 논리를 섣불리 논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수과학과는 거리가 있는 의학을 전공하고 있고, 의학의 한계를 느낄 때는 종교에 기대야 하나 싶을 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신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의 뇌>는 ‘신은 뇌의 창조물. 뇌과학이 밝혀내는 ’믿는 뇌‘의 메커니즘’이라는 부제에 끌려 읽기로 하였습니다.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생물 종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신을 믿고, 신을 모시는 의례를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구에 생물이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많은 책들을 읽어왔기 때문에 신이 세상을 만들고 만물을 창조했다는 천지창조나 지적설계론에 공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김상우님은 ‘신은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내놓고 있습니다. ‘존재의 이유’라는 옛날 노래도 있습니다만, 누구나 존재하게 된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종교에서는 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학을 전공한 라이오넬 타이거교수와 정신의학 및 생물행태학을 전공한 마이클 맥과이어교수는 ‘신은 뇌의 산물’이라는 전제를 내리고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모든 종교는 사로 다르지만 두 가지 운명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는 인간 뇌의 산물이며 둘째, 그렇게 만들어진 종교가 다시 뇌기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지상의 모든 종교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22쪽)” 앞서 말씀드린대로 신의 존재는 의문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인데, “(종교가 흔히 제시하는) 낙원에 대한 믿음은 경험과 인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순수한 믿음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권위다.(41쪽)”라는 것이 저자들이 종교와 신에 대한 설명의 요지입니다.

 

암각화나 신에 대한 감사 및 경외를 드러낸 많은 돌조각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인류 사이에 종교가 등장한 것은 7만년 정도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두개골은 16만년 전의 것이므로, 기록이 남기 전에 종교가 등장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첫째, 지난 14만년에서 7만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진화론적 사건과 환경이 결합해 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둘째, 이 기간 동안 침팬지가 인간보다 덜 진화하고 변화했다면,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를 뺀 나머지에서 이 둘이 공유한 비계의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잇다는 것이다.(147쪽)”

 

인간과 침팬지는 다양한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종교와 관련된 것으로는 위계구조의 유사성을 꼽습니다. 그 가운데는 중요한 점은 믿음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종교가 인간에 주는 가장 큰 힘은 삶의 스트레스를 달래주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답을 준다는 점일 것입니다. “종교적 경험과 행동은 많은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리고 신도와 종교 당국 간의 우호적 분위기는 뇌를 편안하게 해준다.(197쪽)”고 설명하는 저자들은 이런 현상을 최근에 개발된 뇌기능검사장비들을 통하여 확인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통한 교류, 의식 그리고 믿음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 세 가지 요소는 신앙인들의 스트레스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에는 감정, 행동을 통제하는 전두엽과 사고, 연상, 인식기능을 하는 하두정엽이 활성화되는데, 기도는 신을 만나는 행위이기 이전에 자신의 뇌와 마음을 달래고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저자들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다음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종교적 주장의 핵심에 있는 신비로운 힘과 경험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를 제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적 주장이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았다.(292쪽)” 종교가 주장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통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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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일곱 등불 마로니에북스 시각문화 총서 2
존 러스킨 지음, 현미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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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우리나라 국보 1호 남대문이 시커먼 연기를 토하면서 무너져 내린 것도 충격이었지만, 최근 복원이 끝난 뒤에도 목재의 건조과정이나 단청작업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새로운 충격을 던지고 있습니다. 남대문의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복원된 남대문을 국보 1호로 남겨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의 유현준교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건축은 도자기나 그림과는 다르다. 건축은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료가 교체되고 복원되고 사용되면서 보존되는 것이 옳다. 남대문은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만든 생각을 기념하기 위해서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라고 설명하여 복원된 남대문이 국보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매일경제신문 2013년 11월 21일자 기사, “[I ♥ 건축] 남대문과 루브르”)

 

이희봉교수님의 <한국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 http://blog.joins.com/yang412/3210699>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고건축물에 담긴 의미를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하는 법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희봉교수님의 설명을 읽어 가면 죽서루가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건축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남대문 역시 당대의 자연경관에 잘 어울리고, 풍수적 의미를 담아 세워졌을 것인데, 이번에 복원된 남대문이 그런 배경을 잘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존 러스킨의 <건축의 일곱 등불>을 발견했는지는 잊었습니다만, 러스킨이 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일곱 가지 법칙 가운데 ‘기억’을 꼽았다는 것이 특이하다는 생각에서 읽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예술의 시초에 해당하는 그 법칙들은 진정 온갖 종류의 오류를 피하게 해줄 뿐 아니라 어떤 목표를 좇건 성공의 원천이 되어줄 것이기에, 이를 건축의 등불이라 칭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 불빛의 진정한 본성과 고귀함을 확인하고자 그 빛을 왜곡하고 제압하는 수도 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일일이 따져보지 않은 일을 나태함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15~16쪽)”고 하였습니다. 각주에 따르면 ‘등불’이라는 단어는 잠언 6장 23절 “그 법은 빛이다.”와 시편 119장 105절 “그 말씀은 내 발밑을 밝히는 등불이다.”라는 구절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 2. 8. ~ 1900. 1. 20.)은 영국의 사상가로서, 젊은 시절에는 주로 예술분야의 비평에 집중하다가 1860년경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한 글을 써내 사회사상가로 명망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옮긴 현미정님은 “건축의 미학적 개념과 사례를 말하고 있지만 그의 도덕관, 종교관, 경제관을 바탕으로 종합적 사고로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건축 자체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을 유도한다(299쪽)”고 평하고 있습니다. <건축의 일곱 등불>은 러스킨이 약관 30살에 저술한 책으로 1849년 초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이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7쪽)” 일종의 재개발사업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을 무너뜨린 자리에 의미 없는 건축물을 세우는 현실에 분통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번역자는 “건축가들조차도 건축을 ‘디자인’만으로 이해하거나 단순한 생계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고, 건설이라는 경제 행위는 기업이윤의 증대 또는 부동산의 소유나 투자로 이해될 뿐이며, 정치공동체를 꾸려나가야 할 정치인들에겐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300쪽)”라고 하고 이런 현상은 이미 러스킨의 시대에 시작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예술로서의 건축의 의미를 중요시하던 러스킨으로서는 참을 수 없었기에, 집필하고 있던 <근대 화가론>을 중단하고 6개월 만에 이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영혼과 신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기술과 상상의 요소를 결합하는 것은 건축에 있어 본질적인 것(14쪽)”이라는 생각을 가진 러스킨다운 일이고,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러스킨은 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일곱 가지 법칙으로 희생, 진실, 힘, 아름다움, 생명, 기억, 그리고 복종을 꼽았습니다. 1장 ‘희생의 등불’의 1절에서 건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건축은 인간이 세운 구조체를 배열하고 장식하는 예술로서, 사용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21쪽)” 러스킨이 희생을 첫 번째 덕목으로 꼽은 것은 참된 건축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것, 추모하는 것, 시민적인 것, 군사적인 것 그리고 가정적인 것의 다섯 가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특히, 희생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건축에 들어가는 재화나 노동의 양보다는 건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성심을 다하는 희생이 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각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등불에서는 오늘날 날림공사라고 부르는 건축적 사기를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으로 부족한 것은 용인될 것이며 철저한 합목적성은 존경을 받을 것이나, 조악한 속임수는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을 것(51쪽)”이라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은 진정한 건축의 색은 자연석의 색이며 다양한 자연의 색으로 얻지 못할 조화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은 건축의 가치는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질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인간의 힘을 각인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연물의 이미지를 품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힘과 아름다움이 제대로 표현되어야 좋은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을 나타내는 요소로는 단순한 최종 윤곽선으로 표현되는 웅장한 크기나 꼭대기로 향하는 돌출 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요소로는 위로 올라가면서 생기는 다양한 비례, 수평분할의 대칭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생명이라는 요소의 의미를 다음 구절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어떤 대상이 죽은 사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잊고 있지 않음에도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고 즐거움을 상승시키는 경우가 많다. 아니, 오히려 상상력 자체의 지나친 생명력으로 열광한다. 구름에 표정을 주고, 파도에 행복을, 바위에 목소리를 집어넣을 때다.(198쪽)”

 

역시 제가 짐작했던 대로 이 책의 결론부분에 해당되는 ‘기억’이라는 주제에서 강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자는 쥐라산맥에 있는 샹파뇰르 마을 근처 앵강을 둘러싸고 퍼져 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해가 질 무렵을 자신의 삶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적었습니다. 이처럼 건축은 기억의 요체이자 수호자로 진지하게 생각되어야 할 것이므로 ‘오늘날의 건축이 역사가 되도록 하는 것’과 ‘지나간 시대의 건축을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서 보존하는 것’이라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전통건축을 귀중한 유산으로 보존하려는 의무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건축의 일곱 등불>을 읽으면서 가장 큰 울림을 느꼈던 부분입니다. 조금 길다 싶습니다만, “실제로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그 증인이 인간을 마주할 때,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사물과 조용히 대비를 이룰 때 영광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며 왕조의 탄생과 쇠퇴가 반복되고 지구의 표면과 해안의 경계가 바뀔지라도, 거기에 있는 돌은 그 고된 시간 동안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며 잊힌 시대와 다가올 시대를 서로 연결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래서 이미 그 민족 정체성의 절반을 구현하는 힘의 크기 안에 그 영광이 있다.(240~241쪽)” 건축물이 유구한 세월의 흔적으로 마모되기도 하고, 낙엽이나 심지어는 이끼가 덮여 자연과 동화되어가는 모습에서 존재의 의미가 빛을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의 법칙이야말로 건축의 법칙 가운데 으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때 우리는 역사적 건축물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런 건축물이 있다는 사실 조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억해주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건축의 보존이라는 문제와 기억이라는 문제가 상충하는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앞서 남대문 복원에 대한 유현준교수님의 생각을 소개해드렸습니다만, 러스킨은 건축의 복원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있어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내가 앞 장에서 생명의 전부라고 주장했던 그것, 오직 장인의 손과 눈으로만 주어지는 그 정신을 결코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 다른 시간대는 다른 정신을 만들고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건물이다.(249쪽)” 그리고 보면 근세 이후 소실되었다가 복원한 건축이라는 이유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한 문화재가 수두룩한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복원된 남대문이 국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무너뜨린 서울성곽을 복원한다고 합니다. 무너뜨린 성곽에서 나온 돌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새로 깍은 돌로 쌓아올릴 수밖에 없을 터인데, 새로 쌓은 성곽에서는 옛날에 일어났던 일들이 전혀 연상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성곽의 모습에서 사라진 성곽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1538290). 필립 오귀스트왕이 파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세웠던 성벽 역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거나 무너져 내리고 말았는데 그 흔적은 소방서의 벽에, 지하 주차장에, 빌딩의 벽으로, 혹은 정원의 구석에도 남아있다고합니다. 프랑스사람들은 남아있는 성벽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물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로랑 도이치 지음, 파리 역사 기행, 126~139쪽; http://blog.joins.com/yang412/13189707) 프랑스 파리의 성벽과 우리의 서울 성곽을 비교해 보았을 때 어떤 입장이 옳은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법칙인 ‘복종’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러스킨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예술 영역에서 허용한 개인적 감정이 방종의 만연으로 귀결되었던 바가 건축에서 재현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건축이 인간에게 중요한 보편적인 모든 것들에 동의하고 인간과 관계 맺기를 주장한다면, 건축은 스스로 그 법칙에 당당히 복종하여 건축이 인간의 사회적 행복과 권리를 좌우하는 정치, 종교, 사회의 규범과 유사하다는 것을 제시했어야 했다.(258쪽)”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러스킨의 관심사는 관념적인 철학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경제도, 아름다움에 취한 예술도 아니었고, 오로지 우리 모두가 고귀한 인간성을 갖는 것이었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선한 정신 외에는 그 무엇도 개인의 탐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기 위해 절대선인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 그럼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출판사의 리뷰에서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러스킨은 “올바른 건축을 하기 위한 정신(등불)을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희생, 진실, 힘, 아름다움, 생명, 기억, 복종’이라는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방해하는 사치스러운 건축이나 무계획적인 개발, 정직과 양심을 저버린 날림 작업들, 토지나 건물이 개인의 사유물로만 바라보는 경향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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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라디오 -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철학 에세이
오가와 히토시 지음, 이용택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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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즈음은 심야에 TV앞을 지키고 앉아있습니다만, 그 옛날에는 라디오 심야방송에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다들 선호하는 프로그램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성우 김세원님이 진행한 <밤의 플랫폼> 애청자였습니다. 라디오를 켜놓고 무슨 공부가 되느냐고 부모님께서 야단을 치셔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소곤소곤 들려주는 이야기가 배경에 깔려줘야 공부가 잘 된다고 우기곤 했습니다. 심야시간에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낮에 겪은 일 때문에 생각할게 많은 밤에는 누군의 조언이 목마를 수도 있을 것이구요.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철학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심야 라디오>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밤 11시 15분에 시작해서 이튿날 0시 30분에 끝나는 프로그램입니다. 책을 쓴 오가와 히토시씨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교토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이토추상사에 입사하였지만 사법시험에 붙어 나고야시청에서 근무하면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양정치철학을 전공하였고, 시민을 위한 철학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동안 자신이 취한 행동과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철학은 그 답을 일깨워줍니다.(5쪽)”라고 머리말에서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제대로 살려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에서는 밤에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떠올려봄직한 여러 가지 고민들을 다룹니다.”라고 적은 것처럼, 기쁨, 분노, 불안, 포기, 질투, 동정, 경멸, 사랑, 자기계발, 수명, 등등 모두 40개의 화두를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설명이라고 하니 어려울 것이란 선입견이 들 것 같습니다만, ‘경멸’을 설명하면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얼마 전 TV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서도 본 기억이 있는 사고실험입니다. 즉 시합을 해서 이긴 사람이 주인이 되고 진 사람은 노예가 되는 게임입니다.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영예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 주인이 되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종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노예가 될 것인데, 종국에는 주인은 노예의 노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노예는 자신의 노동력으로 자립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노예에게 더 큰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몰입하여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고, 저자의 설명대로가 아니라 다른 해석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을 하나 해도 창의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아렌트는 육체노동을 레이버(labor), 정신노동을 워크(work)라고 하였습니다. 정치활동도 액션(action)이라고 해서 일의 범주 중 하나로 들었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요.(117쪽)”라고 한 한나 아렌트의 생각을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저자는 육체노동은 신체를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에 열등한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괴롭고, 정신노동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서 적극적으로 하는 것인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창의성의 크기에서 차이가 있다는 저자의 설명이 일견해서는 적절한 듯하지만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혹시 아렌트나 저자나 레이버(labor)에 분만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고려했다면 ‘강제’나 ‘괴롭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싶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임신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것이므로 강제하거나 그 행위가 괴롭다고만 해석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의 무(無)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본의 전통 정원을 인용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144쪽). 일본식 정원은 자연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꾸며 인공미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데, 그런 일본식 전통 정원에서 무(無)를 떠올릴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나 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이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말하는 특정한 신이 아니라 정신이나 자연, 우주 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서 무신론자라고 탄압을 받았다는 주장(164쪽)에 대하여도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범신론자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공연한 딴죽걸기가 되어 버린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만, 전체의 틀에서 보면 심야의 음악방송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그날의 삶에서 느낀 답답한 점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느낌이 오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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