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3
B. 파스칼 지음, 이환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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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읽었는데 독후감쓰기가 늦어졌습니다.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기로 한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확인해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 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 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213)” 인간을 왜 갈대에 비유했는지는 분명치가 않아 보입니다.


<팡세>의 구성은 몽테뉴의 <수상록>과 닮았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몽테뉴는 아예 작정을 하고 <수상록>의 집필에 들어갔다면, 파스칼의 <팡세>는 미리 기획을 하고 글을 써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그때그때 기억나는 사건과 연관된 단상들을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 삼아 써놓은 글들을 그의 사후에 유족들이 엮어서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실 파스칼(1623~1662)은 몽테뉴(1533~1592)보다 거의 한 세기 뒤의 인물입니다. 몽테뉴는 종교개혁의 이후 신교와 구교 사이에 끔찍한 내전이 벌이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신을 앞세운 인간들의 광기를 지켜보면서 몽테뉴는 삶에 회의가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을 주장한 인본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파스칼은 신앙에서 길을 찾은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파스칼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았을 터이나 <팡세>를 보면 몽테뉴에 대한 묘한 반감을 담은 대목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몽테뉴의 생각은 잘못이다. 그는 습관을 따르는 것은 단지 그것이 습관이기 때문이지 합리적이거나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민중은 정당하다고 믿는 단 하나의 이유로 습관을 따른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것이 습관이라 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이성과 정의에만 복종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습관은 이런 것들 없이는 폭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정의의 지배도 쾌락의 지배 못지않게 폭군적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원리들이다.(106)”


글을 쓰고 있어서인지 새겨둘만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한 작품을 만들 때 최후로 깨닫는 것은 무엇을 제일 먼저 써야 할지를 아는 일이다.(17)” 건강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 이런 대목도 챙겨보았습니다. “우리는 오류의 또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닌 병이다. 병은 우리의 판단과 감각을 해친다. 중한 병이 현저하게 손상시킨다면 가벼운 병도 그 정도만큼 작용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61)”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사람은 건강할 때, 만약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할까 하고 기이하게 여긴다. 그러나 병에 걸리면 기꺼이 약을 먹는다. 고통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그때 사람은 건강이 주었던 오락이나 산책의 욕망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된다. 이것들은 병이 요구하는 것과 양립할 없는 것들이다. 자연은 현상태에 적합한 정열과 욕망을 준다.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세 주는 두려움뿐이다. 이 두려움은 지금의 우리 상태에, 우리가 있지 않은 상태의 욕망들을 덧붙이기 때문이다.(88)”


마지막으로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모른다. 그래서 건강할 때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 임박했을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병이 다가오고 농창이 생기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89)”


파스칼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탓에 종교적인 신념이 어찌 보면 편견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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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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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은 최근에 미국의 출판사와 판권계약이 이루어져 영어로 출간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읽게 된 소설입니다.


다양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더운 겨울이 오거나, 폭우 폭설이 반복되거나 가뭄이 오래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상이변은 문명이 발전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물질이 원인이 되거나 인구의 폭발적 성장으로 인하여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지구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이겠지요.


<지구 끝의 온실>은 인간이 개발한 더스트 (아마도 나노입자가 자가 증식하면서 동식물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자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투쟁이 전개됩니다. 막다른 상황에 몰린 인간들의 비열한 본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인간들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지구 끝의 온실>은 두 개의 시점에서 각각 시작한 이야기가 결국은 연결되면서 파멸 위기에 몰린 지구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프롤로그는 2060년 무렵으로 더스트의 증가세가 완만해진 시점으로 더스트에 저항하는 유전자변이가 생긴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가 변종 사냥꾼들을 피해 안식처로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이어지는 장면은 2129년으로 한국의 해월이라는 도시에 등장한 모스바나라는 잡초가 급속하게 확산하는 상황을 맞은 더스트생태연구센터의 연구원 아영이 모스바나의 실체를 파악해가는 과정에서 에티포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면서 나오미와의 만남을 통하여 모스바나라는 잡초가 말레이시아의 프림 빌리지에서 합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프림 빌리지는 신비로운 숲으로 더스트에 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평화롭던 이곳을 탐내는 인간들이 쳐들어오자 이들을 이끄는 지수는 숲에 있는 더스트 온실에서 연구에 매달리는 레이철이 합성하여 완성한 더스트에 저항성을 가진 식물을 합성해 각지로 떠나가게 됩니다. 레이첼이 합성한 모스바타는 결국 더스트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후기처럼 쓰여 집니다.


레이첼은 완전한 기계장치로 된 사람으로 유기체 성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지구의 멸망을 방지할 수 있는 모스바타를 합성하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위기에 빠진 프림 빌리지에서 연구를 이끌고 있는 기계인간임에도 멸망의 위기에 몰린 인간을 비롯하여 식물과 동물들까지도 살랴내게 됩니다.


레이철과 지수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설정을 다소 무리해보입니다만, 중요한 반전이 되기 때문에 각각의 인물들의 정보를 잘 모아두어야 하겠습니다. 더스트의 공격에 대항하거나 더스트를 회피하는 등의 소극적 대응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식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드러나는 대목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아영이 어렸을 적에 마을에 살던 이희수 할머니가 정원에 대하여 이름하는 대목입니다. “가만히 들어다보면 재밌지/ 정적이면서 아주 역동적이야. 나는 이 정원에서 손을 안대는 데도, 자신들만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훗날 프림 빌리즈는 멸망한 세계에서 남은 유일한 도피처였습니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는 위중한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하는 결정이 결국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프림 빌리즈를 재건하기로 약속하게 됩니다. 프림 빌리지는 똑 닮을 수는 없겠지만, 모스바타는 프림 빌리지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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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엄마 오늘의 젊은 작가 25
강진아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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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친구로부터 받은 강진아 작가의 소설 <오늘의 엄마>를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인연에 따라가는 듯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다보니 가족들을 비롯하여 주변에 있는 분들의 생각에도 관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엄마>는 상실의 고통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눈 내린 위에 서리 내린다고, 힘든 일은 왜 쌍으로 붙어다니는 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엄마>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자매를 키워낸 엄마가 살만하니 폐암이 들어선 것입니다. 대학교수인 언니 정미와 프리랜서 삽화가인 동생 정아가 함께 어머니를 간병을 맡게 됩니다.


특히 동생 정아는 3년 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애인과 사별하고 여전히 상실의 시간 속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죽음이 예고된 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남아있는 사람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입니다. 특히 사고와 급성 중증질환으로 갑자기 사별하게 되는 경우에는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고, 때로는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반면에 암 질환처럼 일정 확진을 받고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고, 남아있을 사람들 역시 이별의 고통을 삭이는 여유가 있습니다. 종양내과를 담당하셨던 교수님은 암으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말기의 암 환자의 간병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1차 의료기관에서 암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일단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누리망에서 의료와 관련된 정보를 많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가를 판단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없는 경우에는 그저 막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돈은 숨기고 병은 소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결핵이나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 환자를 마뜩치 않게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혹자는 자신의 병을 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상병을 주변에서 어떻게 볼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감추는 경향이 있지만 결국은 투병 중임을 알리는 것이 다양한 관점에서 좋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치료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투병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작고 큰 사회에 여전히 속해있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실 환자의 병명을 가족이 먼저 알게 되는 경우, 환자에게 어떻게 알리는가도 큰 문제입니다. 저도 그런 역할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만, 환자가 병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게 치료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성격인 경우에는 있는 그대로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쉽게 좌절하고 투병에 힘을 내기 어려운 성격인 경우에는 병명을 감추고 치료 방향에 대하여는 우회적으로 설명을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앓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삶을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간병이 길어지면서 각자 맡은 일의 과중을 따지게 되는 것이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만, 두 자매가 어머니의 간병을 나누어 맡는 것도 좋아보였습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우리네 옛말도 있습니다만, 서로 분담하여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나가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두 자매의 간절함이 통했던지 여명이 3~4개월 남았을 것이라는 어머니는 1년을 넘게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어머니와의 긴 이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입원이 길어지면서 환자에게 생기는 변화를 실감나게 적었습니다. “어설픈 치장이 끝나면 엄마는 다시 잔다.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병원의 음기 때문인지 엄마는 부쩍 잠이 늘었다.(63)” “없던 병이 생겨서 환자가 된 게 아니다.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만지고 옮기는 것에, 다시 말해 종양 자체로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링거 줄을 정리한다고 간호사가 앞섶을 펼쳐 젖이 다 드러나려고 하는데도 당황하지 않는다. 놀란 건 정아뿐이다. 다급하게 흘러내린 환자복을 끌어 올리며 보니 엄마의 눈은 긴장감이 없이 풀려 있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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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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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작품으로는 처음 읽는 책입니다. 1993년에 발표되었지만 2023년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노벨상 효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작가는 이 책이 나오기 20년 전부터 파리에서 40떨어진 신도시 세르지퐁투아즈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노태우 대통령 시절, 분당, 일산, 평촌, 산본 등지에 신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건설현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작가는 신도시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작 몇 년 만에 무()에서 솟아났고, 그 어떤 기억도 갖고 있지 않고, 거대한 영토 여기저기에 건축물들이 흩어져 있으며, 경계선이 불명확한 장소로 들어간 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7)” 그런데 그곳에서는 다양한 장소에서 살다 들어온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좋아졌다고 했습니다.


사는 곳에서 그리고 파리로 가는 길에 이용하는 수도권 고속 전철에서 만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보지 못할 장면, ,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몸짓, 벽에 그리자마자 곧 지워질 그라피티 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마음속에 어떤 감정, 동요 혹은 반발을 촉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985년부터 1999년까지 보고 들은 것을 일기의 형식으로 남겼고, <바깥 일기><밖의 삶>으로 묶어냈다고 합니다.


<바깥 일기>를 읽다보면 작가는 보고 들은 것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적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황에 대한 작가 나름의 판단이나 생각을 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기라고 하면 흔히 자신과 관련된 일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마련입니다만, 아니 에르노의 <바깥 일기(Journal du dehors)>는 독특한 형식의 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작가 자신이 밋밋한 글쓰기(écriture plate)라고 명명한 건조한 글쓰기가 에르노의 문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글쓰기는 저학력의 부모에게 소식을 전할 때 사용했던 문체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으려 노력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문체가 건조한 편이라서 이 대목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작가와의 만남에서 김용택 시인은 제가 쓴 간단한 글을 읽고서 지나치게 건조한 느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건강이나 여행에 관한 정보를 요약하는 글을 많이 쓰다 보니 그런 경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옮긴이는 에르노의 문장에서는 정련된 느낌을 넘어서 거의 금욕적인 느낌이 난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덜어내는 작업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즉 적확한 수식어를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수집한 정보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깎고 또 깎아내는 수정작업을 통해 정련된 글을 완성해냈다는 것입니다. “차를 몰고 생드니 근처를 지나감. 초고층 건물 프레엘. 그 건물에 사람이 사는지, 아니면 사무실만 있는지 알 수 없음. 멀리서, 그 건물은 텅 비고, 시커멓고, 해로워 보인다.(49)” 등의 대목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저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글쓰는 작업이 끝나면 <바깥 일기>의 작가처럼 저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구체화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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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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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어려운 책들을 주로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눈물들> 역시 그런 책읽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파스칼 키냐르는 <세상의 모든 아침>으로 처음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을 추구하는 자세가 어때야 하는 지를 배운 책읽기였는데, 독후감을 다시 읽어보니 그 안에서도 눈물들이 비올라 디 감바의 연주곡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은 제가 쥐고 있는 눈물이라는 화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눈물을 새롭게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옮긴이의 말은 프랑스어 탄생의 현장 스케치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8세기말에서 9세기 초에 있었던 이이야기를 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프랑크 왕국의 카롤로스 왕조의 2대 왕이자 서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카롤루스 대제를 전후한 시기입니다. 이야기들은 정사라기보다는 야담집에 담길 그런 이야기입니다. 야담이라고 보는 이유는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나라하게 혹은 은근한 비유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 책에 언급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앎이 많지 않아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어의 탄생과 관련하여 8422월 퐁트누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와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2세가 맺은 스트라스부르 서약은 초기 프랑스어(로만어)와 고고지독일어로 각각 작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문서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부분은 이렇습니다. “바로 842214일 금요일, 추위 속에서 그들의 입술 위로 기이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이 안개를 프랑스어라고 부른다. 니타르는 최초로 프랑스어를 문자로 기록한다.(140)”


옮긴이 역시 이 책의 제목이 <눈물들>인 까닭이 궁금하다고 적었습니다만, 알자스에 살던 무녀 사르가 했다는 눈 안쪽에 있는 미세한 분홍빛 살점-고대로부터 어머니들의 살점이라고 알려진-에 관한 나름의 해석을 소개했습니다만, 결국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1462행에 나오는 만물의 눈물(Lacrimae rerum)’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년기의 눈물로 충분하다. / Lacrimae rerum(만물의 눈물). / 하늘에서 떨어지는 원자들은 만물의 눈물들이다라는 시귀를 인용하면서 베르길리우스는 지상에 존재하는 비길 데 없는 형상들과 풍경들은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을 건드리는 한, 결국 고통의 눈물이 되고야 만다라고 썼다(213)”라고 정리합니다.


본문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근본적 차이를 생각해볼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자의 삶에서 더 끔찍한 것은 남자는 우리를 욕망하는데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우린 누구나 한 남자에게 송두리째 자신을 바치는데, 남자는 여자를 꿰뚫자마자 이내 여자의 품에 있던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말아요. 그리고 모르는 것을 배우겠다고 천지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다니잖아요.(30)”


글쓰기에 대한 대목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Vae qui scribunt, scribentes enim sceribunt nequm! (글을 쓰는 자들은 불행할지니, 글을 씀으로써 쓰면 안 될 것을 쓰기 때문이로다!)”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글쓰기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을 땅으로, 돌로, 납으로, 동물 가죽으로, 지면(紙面)로 내리는 것이며, 불행을 기록하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책에 글을 쓰는 사람은 책 그 자체다. 그런 식으로 시대와 세계에 따라 낯선 의미가 도출된다라는 아인하르트가 아직 프랑크족의 왕이던 샤를마뉴에게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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