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배성민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면서 읽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http://blog.joins.com/yang412/13784266>로 슬라보예 지젝을 처음 만났습니다. 열다섯명의 철학자들이 영화 <매트릭스>를 각자의 시각에서 시도한 철학적 분석이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지젝의 관점을 따로 메모해두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남아있어 이 책을 읽게 된 듯합니다. 결론은 역시 쉽지 않은 책읽기였다는 생각입니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은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 그다운 독특한 시각을 담았습니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테러리스트가 풍자 주간신문인 샤를리 에브도 사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모두 열두 명이 숨졌습니다.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꾸준하게 게재해온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가 테러로 이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젝은 “우리는 더 사고해야 한다. (…) 이 사건을 감싸는 큰 흐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14-16쪽)”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멀리는 프랑스대혁명, 스탈린, 나치에서 현대 프랑스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부르카 착용의 금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들을 인용하여 주제를 설명합니다. 다양한 인용으로 주제가 산만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젝은 제1장 ‘이슬람교도 생활방식이다’에서 서구가 추구하는 자유주의와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분석합니다. “가장 나은 인간은 신념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가장 나쁜 인간은 열정이 넘친다.(17쪽)”라는 예이츠의 말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의 성격을 이해하기에 안성맞춤한 비유라고 합니다. “빈혈에 걸린 사람처럼 창백한 자유주의자와 열정이 충만한 근본주의자의 대립을 탁월하게 기술”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예이츠의 진단이 부족한 점은 테러리스트의 열정은 오히려 어설픈 근본주의자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근본주의의 우월함보다는 열등감에서 나온 충동적인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티베트 불교도와 미국의 아미시 공동체처럼 진정한 근본주의자들은 불신자가 사는 방식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이 자신을 할퀴건 꼬집건 일체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타인을 괴롭히는 짓도 반응이 재미있기 때문에 정도가 점점 심해지게 됩니다. 두어번 집적거렸는데도 반응이 없으면 시들해지기 마련입니다.


제2장 ‘이슬람교의 기록보관소에는 무엇이 있을까?’에서는 앞장에서 다룬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궁지의 원인이 되는 이슬람교의 역사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슬람교가 갈래를 쳐 나온 유대교의 뿌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경전과 유대교의 경전을 통하여 이슬람의 교리를 분석하려 들기에 ‘기록보관소’라는 비유를 한 것입니다.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들과 이슬람의 아랍인들의 가계는 모두 아브라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랍인들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권유에 따라 이집트 노예 하갈 사이에서 얻은 이스마엘의 자손이며, 유대인들은 뒤에 사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이삭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을 둘러싼 두 여자의 갈등과 하나님이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내놓은 가부장적인 기독교 방식의 해석에서는 이 사건을 대칭적 구도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에게도 무함마드를 보내 ‘사랑’의 진정한 뜻을 알렸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종교는 시냇물과 바닷물처럼 결코 합쳐질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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