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에도 슬로시티가 있다. 슬로시티 청산도가 있는 완도에 살다 보니 장흥에 가서도 슬로시티에 관심이 갔다. 완도는 슬로시티에 관심도 많고 관광 유치를 위해 적극적인데 반해 장흥은 동네 사람들도 슬로시티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관광안내소에서조차 거기 가봐야 별로 볼 것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장흥군 유치면 전체가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는데 읍내에서 찾아가는 안내판 하나 없었다. 그래서 슬로시티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면 파괴될까 봐 사람들이 덜 찾도록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로는 슬로시티를 홍보할 예산이 없어서라고 했다. 지방 자치 단체마다 관광 때문에 혈안이 되어 있고 알려졌다 하면 파괴되니 어찌 보면 덜 알려지는 게 슬로시티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탈리아 치타슬로에서 정한 슬로시티 상징 마크다. 슬로시티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맥도날드가 들어오는 걸 막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빨리 변하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천천히 세상을 둘러보고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현재 다섯 군데가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 장흥군 유치면, 담양군 창평면, 하동군 악양면.


길에서 만난 할머니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유치면 신덕리. 현재 한옥 마을을 조성하고 있었다. 저 한옥 마을이 완성되는 내년쯤에는 사람들로 부쩍거릴지도 모르겠다.


길이 이어진 곳으로 가면 유기농 농사를 체험해 볼 수 있는 마을이 있는데 우리가 갔던 날은 통제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면 천 년이 넘은 보림사라는 절과 계곡이 있다고 했지만 배고프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가지 못했다.


슬로시티를 알리는 마을 안내판.  

신덕리에서 나와 간 곳은 유치면 반월 마을이다. 마을 안내 지도에 장수풍뎅이 마을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는 아들이 가고 싶다고 졸라서 차를 돌렸는데 마침 장수풍뎅이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친정 동네 같은 완전 시골 마을이다.


읍내를 벗어나니 식당을 찾을 수가 없어서 3시가 넘을 때까지 점심을 못 먹은 우리 딸 배 고프다며 내내 징징거리더니 대나무 물총을 보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마침 이곳에서는 동네 할머니들이 먹거리를 만들어 팔고 계셨다. 감사한 마음에 얼른 백반 4인분이랑 부침개를 주문.   


배도 고프긴 했지만 시원한 대나무 발이 깔린 정자에서 부침개를 먹으니 신선이 안 부러웠다. 


곧이어 나온 완전 시골 백반. 반찬 하나 안 남기고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심지어는 빨간 고추까지...  우리가 너무 맛있게 먹었나...  할머니 한 분이 밥이 부족한 것 같다며 한 공기 더 갖다 주시기도. 역시 좋은 시골 인심.


장수풍뎅이 체험 행사라고 해서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함평 나비 축제 할 때 다녀온 곤충관을 생각하면 정말 소박한 전시였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뜻을 모아 이런 행사를 하면서 마을을 알리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한마디로 돈 많이 들여서 전국적으로 요란 떠는 행사보다 작은 것이 더 아름다웠다는 얘기. 표고버섯 농사를 짓고 나오는 참나무를 이용해서 키운 장수풍뎅이를 전시도 하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전원일기의 일용이처럼 편안한 마을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있는 우리 아들. 그 큰 애벌레도 유충도 징그럽다 안 하고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음, 역시 우리집 곤충 박사답다. 이 분은 우리에게 마을 이야기를 정말 열심히 해주셨다. 이런 분들이 있는 농촌 마을은 그래도 희망이 넘쳐날 것 같다.


표고버섯을 키우고 있는  모습.


대나무로 만들어놓은 그네. 네 식구가 번갈아가며 타보았는데 제법 그네 타는 맛이 났다. 유치면 반월마을은 아들 덕분에 들렀지만 정말 즐겁게 놀다 왔다. 유명한 곳 근처에 있어서 사람들이 발길이 비껴가는 곳, 그런 곳에도 한 번쯤은 들러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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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락 2011-10-0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슬로시티장흥을 소개하여 주셔서 사진을 매우 잘찍으시네요
장흥슬로시티 한승락
 

방학이라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도 많고 수목원이다 자원봉사다 돌아다니다 보니 집중이 안 되어 방학하자마자 다녀온 장흥 이야기를 이제야 하고 있다. 장흥은 완도에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동네로 강진 옆에 길게 붙어 있다.  

장흥은 완도에서 가까운 데도 못 가봤고, 아무래도 올해 안에 완도를 떠날 것 같아 미루던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다녀왔다. 남편은 작년 언제부터 정남진 토요시장 이야기를 하면서 장흥 대한 기억을 심어주려 했지만 내게 장흥은 이청준과 한승원 같은 문학인들을 키운 동네였다. 

게으른 우리 가족이 남편이 쉬는 날 9시 무렵에 집을 나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들러보고 싶은 곳이 많았기 때문에 부산을 떨어서 일찍 나섰다. 정동진은 서울에서 똑바르게 선을 그었을 때 가장 동쪽에 있는 동네다. 그렇다면 정남진은 서울에서 똑바로 선을 그었을 때 가장 남쪽 동네라는 얘기겠지.  

장흥 정남진 토요시장은 한우 때문에 유명해졌다. 토요일에 찾아가면 그 지역에서 키운 한우를 싸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직접 골라 산 한우 고기를 주변 식당에 들고 가면 밑반찬 서비스해주는 값만 내면 고기를 먹고 올 수 있어서 식당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듯했다.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달려갔더니 완도에서 토요시장까지 가는 데 한 시간 20분이 걸렸다. 탐진강(강진의 옛 이름은 탐진이다) 옆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더니 아이들이 바로 강으로 달려갔다. 며칠째 내린 비로 강물이 물어나 있어서 돌다리를 건너는 게 좀 위험해 보였는데 겁이 많은 딸은 아빠 손을 잡고도 무서워 덜덜덜~



하지만 우리 아들은 언제나  혼자서 쌩쌩 달려 다닌다. 무서움보다 아슬아슬한 데서 더 스릴을 느끼는 모양이다. 나중엔 물속에 들어가서 첨벙첨벙 노는 바람에 바지가 반은 젖어버렸다.


시장 입구에 떡 버티고 있는 관광안내소다. 궁금해서 안에 들어가 보았다.   

 관광안내소의 역할보다는 특산물을 판매하는 일로 바빠 보였다. 표고버섯, 약초, 도자기, 호두, 산나물 등 장흥의 특산물을 골고루 갖춰놓고 있어서 빈 손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관광안내소 앞에는 이런 돔 모양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시골 장에서 노래 자랑이나 공연이 빠지면 심심하니까. 


할머니 장꾼들이 모여 앉아 점심을 드시는 모습.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니 장흥 토요 시장은 외지에서 들어오는 전문 장돌뱅이들이 없었다. 직접 키운 가지나 마늘, 깻잎, 고구마순 등의 채소를 파는 순박한 동네 할머니 장꾼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번데기가 반갑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시장에서 이런 걸 만나면 왠지 즐겁다.  


짚신을 팔고 계신 할아버지. 우리가 가서 들여다봐도 사던지 말던지 관심도 없다. 아무래도 졸고 계신 듯. 

 짚신 할아버지 뒤쪽에 있는 가게에서는 또 다른 할아버지 가 짚으로 멍석 같은 걸 만들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니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우리 할아버지도 항상 짚으로 저런 걸 만들곤 하셨는데...

짚신가게 옆에 있는 황토 염색 가게. 


시장 끄트머리다. 완도 오일장이랑 비교하면 정말 소박한 규모의 장이다. 바다가 가까운데도 해산물이 별로 없는 게 특이했다.   


시장의 뒷골목으로 가니 장흥으로 시집온 다문화 가족 처자들이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각 나라의 전통 복장을 한 처자들과 낯선 음식 이름 때문에 꼭 외국에 여행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행사를 통해 다문화 가족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참 좋아 보였다.


먹는 걸 그냥 지나칠 우리 아이들이 아니지... 몽골만두다. 한 접시 먹어본 우리 아이들 맛있다며 한 접시 추가요~   가격은 한 접시에 무조건 2천원.


일본의 문어빵.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기다리다 지쳤다.  

 이름은 잊어버린 태국 과자.   




시장을 떠나기 전에 집에 가서 구어 먹자며 정육점에 들러 등심 1킬로를 샀다. 한우가 질 좋은 삼겹살 한 근 값 정도니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시장 골목에 저런 정육점이 수십 군데다.


토요 시장 맞은편에 있는 생태 공원. 그냥 지나치려다가 장승이랑 솟대가 눈에 들어와서 차를 세웠다. 장승을 하나씩 차지하라고 했더니 남편은 돈지킴이를,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표정을 찾아서...


가지각색의 솟대가 이렇게 많이 세워져 있는 것도 처음 보아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나중에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되면 마당가에 한두 개 세워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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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 2009-08-1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남진 물축제에 언니가 한번 다녀가라는데도 못 가고 말았네요.
덕분에 장흥 저도 구경 잘했어요.
생태공원에는 담에 가면 꼭 들러봐야겠어요.

소나무집 2009-08-20 23:42   좋아요 0 | URL
저희는 물축제 하기 전에 다녀왔어요.
아이들이 논 탐진강에서 물축제를 한다고 그래요.
다음에 기회 되면 꼭 가보세요. 싼값에 한우고기도 먹을 수 있고...

한승락 2011-10-02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구경하고 갑니다.
 

지금 김남주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남편이 해남에 김남주 시인 생가가 있다며 가 보자고 했을 때 머릿속에서 김남주? 이름 끝에 물음표가 따라붙으며 그가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해남 출신 시인이라고 했을 때도 고정희가 먼저 떠올랐는데 남편은 김남주를 먼저 떠올렸다.  

남편이 <조국은 하나다>라는 시를 쓴 시인이라고 했을 때에야 아~ 했다. 조국은 하나다/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라고 시작되는 아주 긴 시. 그 이야기를 듣고 책장을 들여다보니 남편의 사인이 있는 김남주의 <나의 칼 나의 피>라는 시집이 누렇게 변한 채 꽂혀 있었다. 남편은 학교 다닐 때 나름 운동(?)깨나 하면서 어머니 속을 뒤집어놓았으니 이런 시집도 끼고 다니며 애송을 한 모양이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마을에 있는 두 시인의 생가 중 난 고정희 시인의 생가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고정희 생가는 나중으로 미루게 되었다. 사실 이곳은 녹우당 다녀오던 날 저녁 무렵에 잠깐 들렀는데 이제야...  

김남주 시인의 생가는 원래 양철 지붕으로 된 허름한 집이었는데 얼마 전 해남군에서 복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복원이 아니라 번듯하게 새로 지은 것처럼 보였다.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 운동을 하고 오랫동안 옥살이를 했던 시인의 집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전 집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건 복원된 문학인들의 생가에 가면 늘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생가를 들어서면서 왼쪽으로는 작은 기념 공원을 꾸며놓았다. 앞에 보이는 건 뭘까? 조그마한 게 꼭 화장실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김남주 시인이 옥살이를 했던 독방을 재현해놓은 곳이다. 누구라도 빗장을 열고 들어가 감옥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들어가 보았는데 한 사람이 들어가면 머리는 천장에 닿아 허리를 구부려야 하고 팔도 벌릴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한 평도 안 될 듯한 아주 작은 공간에서 김남주 시인은 유우곽에 못으로 시를 썼다고 한다.


김남주 시인의 모습. 시골 출신답지 않게 아주 샤프하게 생기셨다.

유신 시대 감옥에 투옥되었던 정치범 중 가장 늦게까지 감옥에 남아 있었던 시인은 감옥에서 나와 결혼도 하고 해남으로 내려와 농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좀 살만 해지니까 병에 걸려 돌아가셨고...




그의 대표작인 <조국은 하나다>를 붉게 녹슨 철판에 새겨놓았다. 시인의 생각대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텐데 어째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 세상 떠난 시인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초가집.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벽에 김남주 시인을 기억할 만한 기념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다.


동지였다가 아내가 된 박광숙 씨와 결혼하는 모습. 


옥중에서 엽서에 쓴 편지.  





생가 마당에 서면 보이는 풍경이다. 집 앞에 있는 호박밭에는 저녁 비를 맞은 호박꽃이 시인의 생가 쪽으로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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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국은 하나다 - 김남주
    from 소나무집에서 2009-08-14 23:07 
    조국은 하나다  -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권력의 눈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나는 이제 쓰리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르막길 위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꿈꾸는섬 2009-08-15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겐 김남주평전이 있어요.^^
해남에 김남주 생가와 고정희 생가가 있군요. 모두 가보고 싶어요. 다음에 고정희 생가에도 다녀오시면 글 남겨 주세요.^^ 바로 달려올게요.^^

소나무집 2009-08-15 09:50   좋아요 0 | URL
김남주를 기억하는 분이 계셔서 정말 반가워요.
해남은 문인들이 참 많아요.
황지우 시인도 해남 출신이랍니다.
아마 윤선도를 비롯해 예전부터 물이 다른 듯...

날아오르라 2009-08-16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그것이 알고 싶다-윤동주-님 편을 보면서 김남주 시인도 생각이 났었는데, 이렇게 상면하게 되네요. 학교 다닐 때 해남으로 MT을 갔던 적이 있었죠..
다시 한번 집에 있는 시집을 열게 되네요. 감사해요~

소나무집 2009-08-17 07:10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저도 고마워요.
 

토요일 친정에 가려던 계획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좀 심통이 나 있는데 남편이 나가자고 했다. 마침 오전 내내 세차게 내리던 비도 잠깐 멈춘 상태라서 얼른 따라나섰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이다. 녹우당은 원래 윤씨 종가의 사랑채 이름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지금은 윤씨 종가 전체를 부르는 명칭이 되어버렸다. 

해남 윤씨가 500년 이상 부를 유지하고 명문가가 될 수 있었던 시초는 윤선도의 고조할아버지 어초은 윤효정이 갑부집 딸을 아내로 만난 덕이었다. 원래 삼산면은 해남 정씨 소유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재산을 큰아들에게 상속하는 집안도 있고 아들딸 구분 없이 나누어주는 집안도 있었는데 해남 정씨 집안은 시집간 딸에게 삼산면의 땅을 아낌없이 상속해준 것이다.  

하지만 해남 윤씨는 대대로 장자 상속을 해서 재산을 늘렸고, 부가 해남 정씨에서 해남 윤씨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하니 해남 정씨의 후손들은 좀 억울할 것 같다. 보잘것없던 해남 윤씨 집안은 이 재력을 바탕으로 대단한 인물들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니 우리가 잘 아는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가 바로 그들이다. 윤선도는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대를 잇기 위해 여덟 살 때 큰집으로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주차장에 내리니 아이들이 뒤쪽에 있는 연못으로 달려갔다. 늘씬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 안에는 연꽃이 소담스러운 흰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이곳은 집터를 잡은 윤씨 집안이 화기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조성한 연못이라고 한다. 연꽃 덕분에 동네 이름도 연동이 되었다.

멀리 덕음산 아래 녹우당이 보인다. 풍수지리는 잘 모르나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물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보인다. 슬슬 올라가는데 멈추었던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오른쪽에 보이는 유물전시관으로 달려갔다.


전시관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풍경이다. 층층이 쌓여 있는 책들이 해남 윤씨를 명문가로 이끈 비결이 아닌가 싶다.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바로 공재 윤두서다. 옆 동네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용이 학문을 일구는 데도 이 외가의 장서들이 밑바탕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윤선도와 윤두서를 비롯 윤씨 집안의 진품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보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한 그림들은 모두 복제품이었다. 현재 주자창 바로 위에 제법 큰 규모의 새로운 유물 전시관을 짓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진품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녹우당 앞에 서 있는 500년 된 은행나무.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간 일을 기념해서 어초은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녹우당 뒤편에 붙어 있는 안채는 사생활을 위해 공개하지 않는 듯했다. 

녹우당은 효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다. 당시 수원에 있던 집을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에 해체해서 배로 실어온 후 원래 사랑채를 없애고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녹우당은 집이 앞으로 기우는 바람에 5년 전에 완전히 해체해서 지반을 튼튼히 한 후 새로 지었다는데 해체해서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한옥 기술이 대단하다 싶다.  


녹우당 현판이다. 집 뒤의 대나무숲에 바람이 스치면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려서 녹우(綠雨)라는 이름을 지었다 하니 윤선도의 문학성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현판 글씨는 공재 윤두서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이복 형이었던 이서가 썼다고 한다. 옥동 이서는 원교 이광사가 완성한 동국진체의 원조로 불리는 사람이다.


녹우당으로 들어서서 기웃대는데 방안에서 어르신 한 분이 나오셨다. 30대 초반부터 종가를 지키는 윤선도의 14대 종손 윤형식 할아버지다. 마루에 걸터앉아 녹우당에 얽힌 이야기, 윤씨 종가를 지키며 살아온 이야기, 후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행운을 누렸다.   

윤선도의 후손들은 벼슬에 연연하지 말라는 고산의 유언에 따라 정치보다는 문학과 예술에 두각을 내타낸 분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도 대법원장을 지낸 윤관을 비롯해 정계보다는 법조계에 인물이 많은데 조상의 말을 듣지 않은 그의 부친은 자유당 시절 정치를 하느라 재산을 많이 축냈다고.   


며느리가 마흔이 되어 얻은 손자가 이제 다섯살이어서 절손의 위기를 면했다는 이야기까지 자랑이 끝없이 이어지는 걸 보니 영락없는 보통 할아버지였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손녀딸이 그린 할아버지의 초상화와 초등학교 2학년 때 낸 시집을 보여주며 자랑하셨다.


이중으로 된 지붕 구조가 특이해서 할아버지께 여쭤보았더니 차양 역할을 하기 위한 구조라고 한다. 차양 지붕을 세우기 위한 기둥 때문에 정원 감상을 하는 데도 방해가 되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후손들이 20대에 걸쳐 살면서 내내 중건하고 보수한 때문인지 500년 된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덧대어진 양철 차양이나 한옥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가로등 같은 것도 자꾸만 눈에 거슬렸고...

고산 사당. 대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개망초를 비롯한 풀이 우거져 있었다. 수백 명의 하인과 소작인을 거느리고 살던 500년의 영화가 모두 덧없어 보인다.

사당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어초은의 묘소가 나온다. 주변이 온통 적송으로 둘러싸여 있어 기품은 있어 보였지만 갑부 집안의 묘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 올라가는 길. 이 비자나무숲은 윤씨 집안의 부를 일군 윤효정이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말을 남기자 후손들이 열심히 나무를 심어 보호한 덕에 이렇게 무성한 숲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비자나무숲에 들어서면서 다시 비가 조금씩 내렸는데 이곳에도 초록색 비(綠雨)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비자나무숲에서 내려와 추원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채 담 안에 윤선도가 <오우가>에서 칭송한 다섯의 벗 중 대나무숲이 보인다.


추원당은 1935년에 지은 건물로 후손들이 문중 회의를 하면서 숙식을 하던 곳이란다. 꽉 닫혀 있는 방문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열릴까 궁금해진다. 삐져서 누워 있는 딸내미. 비자나무숲에 올라가기 싫다고 하는 걸 억지로 데려간 결과다.


다시 녹우당으로 내려가는 길. 카메라를 남편이 들고 다닌 덕분에 내가 계속 사진에 찍혔다. 우리 모자가 등지고 있는 쪽에는 현재 살고 계신 할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녹차밭이 있었는데 정원도 숲도 너무 우거져 있어서 좀 답답해 보였다. 가을에 다시 찾아가 반쯤 비워놓은 여백의 녹우당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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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07-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의 할머니가 해남 윤씨로 20세기초에 신교육도 받은 여성이었다는데, 바람기많은 한량 부자인 할아버지가 '해남 윤씨'라는 타이틀을 원해서 시집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첩을 여럿 둔데다가, 본인 소생의 아들은 하나만 남기고 다 일찍 죽어서 맘고생하셨을텐데도 꼿꼿한 여장부였다고 들었는데, 해남 윤씨의 자부심이란 대단했던 거 같습니다.

소나무집 2009-08-27 11:37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이젠 유학까지 다녀온 장손을 해남으로 내려오게 해서 종손집을 지키게 할 예정이라고 하셨어요.

나그네 2012-12-3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녹우당은 해남윤씨종가가 아니라 해남윤씨어초은파 종가입니다.
해남윤씨 8계파중 막내계파 종손이 사는 집을 해남윤씨종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위글을 수정해주기 바랍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 해설가 모임에서 신안군 증도에 다녀왔다. 증도는 예부터 물이 귀해서 시루섬(물이 시루 구멍처럼 다 빠져 나가서)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정해진 날에만 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얼마나 물이 귀한 동네인지 알 만하다. 또 증도 주변 해역에서 엄청난 송원대 해저 유물이 발견되면서 보물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인구가 222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인데 청산도처럼 슬로시티로 지정되었기에 답사 코스에 넣었다. 우리나라의 슬로시티는 4군데로 완도군의 청산도, 신안군의 증도, 담양군의 창평, 장흥군의 유치면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인구가 5만을 넘지 않아야 되고,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 마트, 대량 운송 수단이 없으면서 세계의 보편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돌면서 비교해볼 예정이다.

증도는 재래식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과 자전거를 이용한 친환경 교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증도에 간다고 했을 때 나를 선뜻 나서게 만든 건 바로 염전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도읍 지신개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수다를 떨다 보니 15분만에 증도에 닿았다. 배 안에서 바라본 증도는 내가 완도에서 바라보던 바다 풍경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섬을 가운데 두고 많은 섬들이 죽~ 병풍을 두룬 듯했다. 그래서 완도에서 탁 트인 바다에 익숙해진 눈엔 어딘지 답답한 느낌까지 들었다.


배 안에 있는 대형 버스는 우리 일행이 타고 간 것이다. 여행하면서 저런 관광 버스를 처음 타본지라 멀미도 하고 무척 힘이 들었다. 가을겆이만 끝나면 저런 버스를 타고 수시로 단체 관광을 다니는 친정 부모님 생각이 났다. 젊은 나도 힘든데 노인들이 얼마나 힘드실까 싶었다.


증도 전체 모습이다. 우전해수욕장, 짱뚱어 다리, 철학의 숲 등 명소가 많았지만 나에겐 염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증도의 첫인상은 과도한 친절이었다. 우리가 간다는 연락을 받은 증도 면장님께서 마중을 나오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하시던지 정말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서글서글 편안한 말씀으로 증도를 잊을 수 없는 섬으로 만들어준 분도 바로 그 면장님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염전인 태평염전의 모습이다. 이 염전은 1953년 갯벌에 둑을 쌓아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그곳 직원의 말에 따르면 여의도 면적의 두 배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는 판단하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태평염전에서는 햇볕이 좋은 5월부터 9월까지만 소금 작업을 한다. 지금도 할 수는 있지만 질 좋은 소금을 위해 여름에만 작업을 한다고 했다. 동서 양쪽 염전을 사이에 두고 늘어서 있는 60여 개의 소금창고가 참 인상적이었다. 여름에 찾아가면 직접 염전에서 소금 걷는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고 한다. 날이 흐려서 사진 상태가 별로다.


소금밭 사이 사이에 있는 수차. 


비가 올 때 소금물을 저장하는 함수 창고다. 비가 오면 소금의 농도가 약해져서 질이 안 좋아지기 때문에 순식간에 저 창고 아래로 물을 내려 보낸다고 한다.


가족도 데려갈 수 있다는 말에 두 아이도 함께 갔다. 소금밭에서 체험을 할 수도 있다는 내 꼬임에 따라왔던 두 아이는 소금밭이 꼭 논 같다며 별로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소금창고 안에서 사진을 찍으면 복 받는다는 말에 모두 돌아가며 이렇게 사진 한 장씩 찍었다.  


태평염전에서 천일염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2007년에 만든 소금박물관이다. 증도를 가는 분들에게 꼭 들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로 알차게 꾸며놓았다. 외딴 섬 증도에서 만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소금의 역사, 문화 등 소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얻어갈 수 있다.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코끼리. 코끼리도 소금이 있는 곳을 따라 이동한다고 한다.


박물관 입구에 소금을 쌓아놓아 직접 만져보면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박물관 내부도 깔끔하고 직원들이 설명도 잘해주었다.


우리가 먹는 소금에는 천일염과 정제염이 있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햇빛과 바람을 이용해서 농축해낸 것이고, 정제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염화나트륨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천일염에는 미네랄 등 많은 성분이 들어 있어 우리 몸을 이롭게 하지만 정제염, 일명 꽃소금은 짠맛을 내는 나트륨밖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 주부들이 소금을 살 때는 천일염인지 정제염인지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다. 고혈압의 원인이 되는 짠맛의 범인도 정제염이라고 하니까.


류시화 님의 <소금>이라는 시다. (사진을 클릭하면 글씨가 크게 보인다.)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소금을 담아놓은 작은 항아리들이 참 예쁘다. 이걸 보는 순간 지금도 장독대 항아리 중 하나에 간수를 뺀 소금을 보관하는 친정집이 떠올랐다.


세계의 유명한 소금. 예쁜 병에 담아놓으니 소금이 아니라 보석 가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적인 면에서는 우리나라 천일염을 따라올 수 없는데 프랑스의 어떤 소금은 1킬로그램에 8만원이나 한단다. 마케팅의 효과지 싶다. 태평염전에서 간수를 안 뺀 소금은 20킬로에 만오천원이고, 간수를 뺀 소금은 10킬로에 만오천원이라는데.

1년 이상 묵혀서 간수를 빼야 불순물이 빠지고 쓴맛도 나지 않는 좋은 소금이 된다고 한다. 우리 친정에서는 소금에서 뺀 간수도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두부를 응고시킬 때 쓴다. 요즘은 중국산 소금이 많기 때문에 김치를 담갔는데 맛이 이상하면 소금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함께 갔던 나의 제자 연서와 우리 아이들이 태평염전 사무실이 있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염전을 내려다 보았다. 염전에 가는 것보다 학교에 안 가는 걸 더 좋아했던 우리 아이들이다.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이렇게 놀아도 되는가 모르겠다. 

염전에 다녀온 아들이 체험 학습 보고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란에 쓴 말이 걸작이다. "소금이 짜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대체, 그 전엔 소금 맛이 어땠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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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해 가족여행으로 보물섬 다녀오다
    from 엄마는 독서중 2009-01-06 16:47 
    아이들이 크면 가족여행도 힘들다. 머리 컸다고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안 먹히니 가족사진 찍기도 힘들고. 그래도 올해는 가족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겼으니 운수대통 할 조짐이 보인다. 퇴직하고 사진에 취미 붙인 큰시숙님 덕분에 가끔 집안 행사가 있을 때 가족여행의 호사를 누린다. 새해 첫날 신안 해저유물을 건져올린 증도, 일명 보물섬에 콘도 예약했으니 선착장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숙박과 먹을거리 책임져주는 1박 2일을 누리
  2. 저 떴어요 - 네이버의 힘을 느끼다
    from 소나무집에서 2009-01-10 12:34 
    혹시 알라딘이  망하는(이런 일이 발생하면 난 책 살 데가 없어용!) 날이 올지도 몰라 네이버에 블러그를 만들어놓고 중요 페이퍼만 올려놓곤 했어요.   그런데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은 방문자수가 어제 오후 천 명대가 넘어가 있는 거 있죠. 이게 뭔 일이냐 싶어 확인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쪽지가 와 있더라구요.  안녕하세요, 이야기맨입니다. 네이버 오픈캐스트 ''생활의 발견(
 
 
순오기 2009-01-06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보물섬에 요걸 첨가하면 최고의 여행지가 되겠군요.^^
먼댓글로 연결합니다~~~~

소나무집 2009-01-06 17:1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여행지랑 겹치는 곳이 많아 다 빼고 염전 이야기만 했어요.

BRINY 2009-01-0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이 가신 섬과 같은 섬이었군요. 인구는 적어도 면적은 넓은 섬인가봐요. 저렇게 끝없이 펼쳐진 염전이라니, 20년전에는 경기도나 충청도쪽 서해안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소나무집 2009-01-07 23:11   좋아요 0 | URL
글쎄 넓기는 엄청 넓더라구요.
겨울이라 소금 구경을 못해서 좀 아쉬웠어요.
친정이 있는 태안 근처에도 염전이 많이 있어요.

무스탕 2009-01-0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아무 생각 없이 꽃소금을 사다 먹었는데 이제 소금 살때 잘 살펴봐야 겠네요.
작년여름에 땅끝마을 다녀올때 염전을 봤어요. 소금 두 푸대 사다가 하나는 시댁에 하나는 친정집에 떨궜지요. 이건 현지에서 샀으니 100% 국산이니까 이걸로 김장하자! 하고요 ^^


소나무집 2009-01-07 23:09   좋아요 0 | URL
천일염이라도 1년 이상 묵혀서 간수를 빼야 좋은 소금이래요.
님, 해남에서 산 소금 간수 뺀 건지 확인해 보세요.
가격이 아주 쌌다 싶으면 생산한 지 얼마 안 된 햇소금일 거예요.

꿈꾸는섬 2009-01-07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안군 증도...소금 박물관 이런 곳도 있군요. 순오기님 보물섬과 함께 보니 좋으네요.

소나무집 2009-01-08 10:05   좋아요 0 | URL
여름에 아이들하고 함께 가보면 좋을 것 같아요. 염전에서 소금 걷는 체험도 하구요.

프레이야 2009-01-0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이 짜다는 사실을 알았다. ㅎㅎ
아이들 이 말이 진실인 것 같아요. 그전엔 짜다는 생각으로 짜다고 느꼈던 건지도
모르죠.^^ 좋은 페이퍼네요.

소나무집 2009-01-09 15:09   좋아요 0 | URL
헉~ 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지만
이렇게 솔직한 아들이 사랑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