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와 백도 빛깔있는책들 - 한국의 자연 256
김준옥 지음, 황의동 사진 / 대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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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거문도에 다녀왔다. 왜 찾아가고 싶은 곳은 다 먼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늘 출발하기 전에 걸리는 시간을 재어보고 한숨부터 내쉰다. 거문도 여행도 시작은 그랬다. 이젠 차 안에서 시간 보내는 법을 터득할 만도 한데 아이들은 '언제 도착하냐'는 물음을 수도 없이 내뱉었다. 

좀 쌀쌀하긴 했지만 고흥 나로도항까지 배가 와 주었고 거문도는 우리 가족을 들여놓아 주었다. 날씨가 안 좋은 날은 배가 안 뜨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 드디어 거문도 도착. 항구에서 제일 먼저 우리 가족을 맞아준 건 배에서 나는 기름 냄새였다. 좁은 항구에 서 있는 수백 척의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름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 책은 거문도에 다녀와서 읽게 되었다. 미리 읽고 여행을 갔더라면 훨씬 더 애정을 갖고 거문도를 둘러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서 다시 떠올린 거문도는 정말 아름다웠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백도에 못 가본 것이 아쉽기만 했다. 남편은 백도까지 돌아보자고 했지만 그러다 육지로 나오는 배를 못 탈까 봐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거문도(巨文島)는 귤은 선생과 김양록이라는 두 학자가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거문도의 아름다움을 시로 쓴 귤은 선생의 사당이 있다. 거문도는 영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대륙 진출을 위해 탐을 냈을 정도로 좋은 자리에 있다. 조선 말 그들이 남긴 흔적이 섬 곳곳에 있다. 거문도를 2년 동안이나 무단 점령한 거문도 사건의 흔적으로 영국군 묘지와 해저 케이블 설치 기념비까지 있어 찾는 이의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거문도의 명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다. 이 책은 새 등대가 세워지기 전에 쓰여진 책이라서 옛날 등대만 나와 있다. 듬직한 큰 등대 건너편 절벽가에 아찔하게 서 있던 작고 귀여운 등대가 생각난다. 이 등대는 동양 최대의 프리즘 렌즈가 달렸고, 제작도 프랑스에서 했다고 한다. 처음 이 등대가 생기게 된 이유가 일본 배에게 길안내를 하기 위해서였다니 또 씁쓸하다. 

풍경으로는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역사적인 상처가 많은 거문도의 이야기가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책을 읽다 보니 다시 거문도에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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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ony 2008-01-1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수에서 출발하는 뱃시간을 알아 본 적은 있지만 출발할 그 날은 멀기만 합니다 ㅠ.ㅜ

소나무집 2008-01-1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멀어요. 우리도 계획 세웠으면 못 갔을 거예요.
전날 갑작스레 말이 나와서 무작정 떠났답니다.
 
대한민국 식객요리 가을진미 편
허영만과 식객요리팀 지음 / 라이프김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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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식객> 만화 팬이다. 내가 직접 만화를 본 적은 없지만 늘 남편의 입을 통해 듣는 <식객>은 요리의 천국 같았다. 그래서 식객 요리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주문을 했다. 늘 요리에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이 기회에 요리 솜씨 좀 늘려볼까 싶은 마음까지 있었으니 욕심이 과하긴 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너무나 실망스런 요리책이었다. 주방에 두고 늘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일단은 재료부터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연어나 전복, 송이, 박, 허파, 우설, 꿩 같은 것들은 먹고 싶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화에서야 죽을 고생을 하며 재료를 구하러 돌아다니는 묘미가 있지만 오늘 당장 식탁에 올릴 수가 없으니 한 번 읽어보고는 책꽂이나 지키게 해야 할 듯해서 억울하다.

또 편집은 어찌나 평범한지, 그래서 출판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책 한 번 만들면 마케팅 확실하게 해서 제대로 팔아먹는 김영사다. 김영사가 책을 왜 이렇게밖에 못 만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로 편집이 허술하다. 내가 결혼할 때 사온 요리책 편집보다도 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요리책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잘 만드는지 확인도 안 해 봤나? 서점에서 직접 책을 보았다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것 같다.

결혼 십 년이 넘은 내게는 별로인 요리책이었지만 처음 요리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재료편에서는 생생한 사진과 더불어 각 재료에 대한 설명이 4쪽씩에 걸쳐 실려 있어 공부도 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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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ony 2008-01-0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 라도 말할 것 까지도 없이 매일매일 상차림이 제게는 극복하기 힘든 난제인데 요리책을 봐도 소용이 없고...^^;;

소나무집 2008-01-09 10:13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은 알약 하나로 식사를 대신하고 싶답니다.
주부 경력 10년차지만 요리 솜씨는 별로 늘지를 않아요.
그러다 늘 먹는 것만 해먹게 되네요.

kyungmi 2008-03-2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식객 만회 왕팬입니다. 저희 아이도 ^^
요리는 할 수록 느는 것 같아요.
저흰 큰 집이라 이런 저런 대소사마다 요리책에서 찾아낸 특별 요리를 하나씩 해보는 데, 다들 칭찬해 줄때마다 자신감이 팍팍 쌓여서 자꾸 다른 요리에 도전해 보게 되더라구요.
요리책 사모으는 것도 꽤 재미나요.
 
<가난한 밥상> 서평단 알림
가난한 밥상 - 배부른 영양실조에 걸린 현대인을 위한 음식 이야기
이원종 지음 / 시공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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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아들고는 제일 먼저 한 소리는 "요리책이네!"였다. 마침 저녁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책을 뒤적이던 나는 즉석에서 고구마조림과 검은콩조림을 해보았다. 저자가 아침, 점심, 저녁 밥상으로 준비한 요리 레시피의 대부분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어서 누구나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다. 그리고 각 재료의 효능이나 유래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우리 집 밥상은 늘 가난하다. 일부러 그런 식단을 짜는 것은 아닌데 내가 육류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늘 푸른 초원이다. 고기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선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워야 한다. 육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먹지만 아직은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다. 그래서 음식 솜씨도 없고 다양한 메뉴를 준비하지 못하는 주부로서는 고맙기 그지없다.

사실 우리 아이는 아토피를 앓았다. 그래서 엄마도 아이도 고생을 참 많이 했지만 그 덕에 얻게 된 고마운 일도 있다. 항상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한 덕에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게 된 일이다. 아토피의 가장 무서운 적은 음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집 밥상은 늘 야채에 생선이 차지하곤 했다. 간식도 감자나 고구마 같은 자연 식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노력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토피가 거의 완치된 상태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그 흔한 햄버거나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를 먹어 본 적이 없다. 학교 들어가간 후 친구 생일 파티에 가서 그런 음식을 처음 먹어보고 신기해했을 정도이다. 물론 지금은 가끔 먹기도 하지만 유아 시절을 촌스럽게 보낸 탓인지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종류의 음식을 탐하지는 않는다. 열 살 딸아이가 생일에 먹고 싶은 음식으로 아구찜을 꼽았을 정도로 정크푸드하고는 거리가 멀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 몸에 좋은 걸로 잘 골라 먹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야만 잘 먹고도 영양 실조에 걸리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학 조미료나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은 자연 식품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식품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유기농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저자는 텃밭이나 베란다에서 야채를 키워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보통 정성으로 될 일이 아니다. 나도 상추나 고추 같은 걸 여러 번 키워보았지만 키우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 일 년 내내 먹을 야채를 직접 키워서 먹으라는 저자의 부추김은 어째 지나친 욕심 같다. 저자가 권하는 대로 살 수는 없지만 내 가족에 맞는 방법을 찾으면 최대한 몸에 좋은 식품을 먹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집의 경우는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생협을 이용한다. 

조선 시대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인데 비해 영조가 83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쌀밥 대신 잡곡밥을 먹고, 왕의 다섯 끼 식사를 세 끼로 줄이고, 반찬의 가짓수를 확 줄인 데 있다고 한다. 47세 왕의 식사가 아닌 83세 왕의 식사를 준비하듯 주방 가까운 곳에 두고 요리할 때마다 뒤적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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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7-12-0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도서는 먼댓글로 연결하라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치유 2007-12-04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몰라서 그냥 하던 대로 맘대로 올리곤 했더랍니다..

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가난한 밥상이 삶을 건강하게 한다는걸 명심하며..푸른 초원인 우리집 밥상도 진수성찬으로 여기라고 강조한 내말에 큭큭 거리던 아이들 모습이 떠오르네요.가끔 티비보며 느끼는 점은 야채를 내가 꼭 키워서 식탁에 올리고 싶어진답니다..

소나무집 2007-12-07 12:23   좋아요 0 | URL
먼댓글 쓰기 이제야 성공했어요.
서평단 모집 페이퍼에서 주소 복사해다 내 리뷰 아래에 붙이는 거네요.
책을 사서 읽으면 실망할 수도 있어요.
예전에 읽었던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하고 거의 비슷해요.
너무 기본적인 이야기 반복이 많아요.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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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공주 동화를 읽은 기억 때문에 책제목이 낯익어 선뜻 손이 갔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재미있지도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도 않았다. 재미만 기대하고 읽기엔 주제가 너무 무거워서. 특히나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서천 세계를 드나들 때마다 나는 책장을 되짚어가며 다시 읽곤 했다. 이 대목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새겨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바리데기라는 작은 그릇에 너무 큰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화 속의 바리데기는 서천 세계에 가서 생명수를 구해 아버지의 생명을 구했지만 이 소설 속의 바리가 구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목숨이 아니라 전쟁, 이념, 빈곤, 다양한 민족의 문제까지 겹쳐 북한 소녀 바리가 보듬기엔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중국으로 런던으로 종횡무진 바리를 이끌고 다니면서 다양한 삶과 마주하게 한 작가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거기서 마주하는 이민자들의 삶도 분명 현실일 텐데 내겐 왜 그리 낯설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내가 알던 런던에 그들의 삶이 없었던 것은 너무 밝은 곳만 보며 살아온 탓이리라.

늘 큰 고통 없이 내 삶이 이어짐에 감사할 줄만 알았지 세상을 좀더 넓게 바라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정신이 확 들었다. 뉴스를 보면서 접하는 북한의 현실은 초등학교 시절처럼 지금도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솔직히 북한은 나의 관심 속에 놓여 있지 못했다. 아프리카 혹은 남미의 어느 나라 대하듯 지나쳤다.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거나 금강산 관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만 '나도 한 번 가 볼까?' 하는 관심이 살짝 갔을 뿐이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소설을 읽는 내내 바리에게 미안했다.

바리가 나와 같은 민족의 딸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서글프게 만든다.북한이 아닌 남한에 태어났더라면 인생이 그렇게까지 험난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은 없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로 알려진 십여 년 전 북한은 정말 어려웠던 모양이다.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힘든 시기였다는 것을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알았다. 작가가 북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까닭이 나처럼 무심한 사람들을 일깨울 목적이었음을 알 것 같다. 

가슴이 아프다. 열두 살에 가족들과 헤어져 중국으로 영국으로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는 바리의 젊은 날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소설을 읽는 동안 바리가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길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녀를 향한 희망의 손길이 보이지 않았다. 내내 바리가 희망을 찾아 드나드는 서천 세계마저 손을 내밀듯 말 듯했을 뿐이다.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같이 울어줄 남편 알리가 바리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바리가 새롭게 만난 이웃에게 배반을 당하고 어린 딸을 잃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할 그 미래가 모든 사람들이 찾아 헤매고 있는 생명수는 아닐지. 나는 나, 너는 너가 아닌 우리라는 넓은 개념으로 세상을 보듬고 함께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옛날 이야기 속의 바리가 되살아나 우리 곁으로 온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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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11-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어요 정말 엄청 난 상황들이 전개되더군요

소나무집 2007-11-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파키스탄에 난리가 났는데 바리 남편 알리가 파키스탄 이민자라서 애정이 가네요.

kyungmi 2008-03-2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리데기 읽고 한 인간이 어쩜 이렇게 파란만장하게 살 수 있나.. 싶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안정되게 살고 있는 현실에 감사하게 됩니다.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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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소설이 아니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소설을 읽고 나면 '소설이니까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지'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 하지만 <친절한 복희씨>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은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바로 나와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이다.    

벌써 작가의 나이가 77세라고 한다. 나보다 두 배 가까운 세월을 사셨다. 사는 데 진력이 나고 지루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 쓴 작품들이라는 작가의 말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작가들이라면 으레 치열하게 새로운 글감을 탐하며 진지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웃을 일이 없어서 스스로를 웃기려고 쓴 작품들이라는 말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유명 작가로 바쁘게 살아온 이가 일상이 지루하고 사는 데 진력이 났다고, 그래서 자신을 웃기고 싶었다고 옆집 여자에게 투덜대듯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삼십이나 사십 나이에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다.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이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유명 작가로 바쁘게 살았지만 나이 앞에선 위선도 이중성도 다 필요 없음을 작품들을 통해, 그리고 작가의 말을 통해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박완서가 좋다.  

이 책에는 모두 9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움을 위하여>는 파출부로 데리고 있던 사촌 여동생이 재혼해서 먼 섬으로 떠난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이상 파출부로 부려먹을 수 없는 상전의 심보였음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 투덜거림 속에 그리움과 축복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어 웃음을 머금게 한다. <거저나 마찬가지>는 소위 운동권 학생으로 위장 취업까지 했던 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공장에서 만났던 후배를 '거저나 마찬가지'라는 말로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이야기다. 노동자들을 위한다고 설치던 이들의 삶이 얼마나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공하지 못해서 아직도 아내 덕에 먹고 사는 운동권 출신 친구가 있는 내게 아주 특별하게 읽혔던 작품이다.    

<그 남자네집>은 주인공이 젊은 날을 보낸 동네로 이사 간 후배네 집을 찾아가면서 자기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게 했던 옛 남자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젊었을 때 넘치는 젊음을 낭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내겐 너무 주변을 의식하며 조신하게 사는 건 젊음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후남아, 밥 먹어라>에 등장하는 후남이(남자 동생을 바라는 이름 속에 그녀가 받았을 설움이 느껴진다.)는 늘 가족의 무관심 속에 살다가 우연히 재미 교포에게 시집을 가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그녀가 다시 돌아와 편안함을 느끼는 건 어린 시절에 맡았던 흙냄새와 밥 냄새다. 주인공들의 과거에 대한 집착과 후회에 나도 공감하는 걸 보면 슬슬 나이를 먹어 가는 것 같다. 

 <마흔아홉 살>은 사람들의 이중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노인네들 목욕시키는 봉사 활동을 완벽하게 해내지만 시아버지 속옷을 학대함으로써 시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해소하는 이중성을 지닌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를 통해 밖으로 보여지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은근히 경고한다. <촛불 밝힌 식탁>은 며느리 입장과 시어머니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시어머니가 불빛을 보고 찾아올까 봐 촛불을 밝히고 저녁을 즐기는 아들네 모습에 너무 했다 싶으면서도, 며느리 입장이 되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 들었으니 나도 좋은 며느리는 아닌가 보다.   

<대범한 밥상>은 아무런 풍파도 없이 살아온 삶이 오히려 허전해서 뼈가 시린 여자가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 그녀가 삶을 정리하는 방법이 아주 특이하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딸과 사위를 잃고 바깥사돈과 함께 살다 혼자 된 친구를 찾아가 실컷 조롱하려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얼마나 가볍고 욕심 많은지를 깨닫게 된다는 야기기다. 표제작인 <친절한 복희씨>. 젊은 날 일을 도와주던 주인집 남자에게 이끌려 얼떨결에 결혼한 복희씨가 늘그막에 병든 남편을 바라보며 고소해한다.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산책이나 다니는 주제에 약국에서 비아그라를 사 오라고 호통 치는 늙은 남편의 모습이 복희씨만큼이나 징그럽게 느껴졌다. <친절한 복희씨>라는 제목에는 늙어갈수록 친절하기를 바라는 남편의 마음과 반대로 친절해지고 싶지 않은 아내의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전원 생활을 꿈꾸며 이사 간 시골에서 사람들한테 갖은 모욕을 당하던 여자가 서울 나들이를 한다. 택시 기사의 "사모님, 어쩐지 멋쟁이다 싶었는데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오셨나 봐요."라는 말에 그동안의 설움을 다 털어내고 행복해지는 <그래도 해피엔드>의 여인은 바로 우리 여자들의 삶이기도 하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묵묵히 살아 내 삶이 억울해도, (그게 비록 속 보이는 말일지라도) 부추겨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눈물나고 힘들었던 과거까지 싹 잊게 된다는 것을 슬그머니 알려주는 것 같다.  

<촛불 밝힌 식탁> 한 작품만 빼고는 모두 여자가 화자다. 이 작품마저도 화자가 쫓아가는 것은 아내의 일상이니 모두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중년 이후를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다양한 여자들의 수다를 읽다 보면 나도 슬그머니 그 옆에 끼어들고 싶어진다. 그리고 나의 중년과 노년도 그녀들의 삶처럼 그리움과 행복을 가득 품은 수다꺼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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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26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이 책 호평이 많네요.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팍팍!! 들어요. ^^

소나무집 2007-10-30 10:45   좋아요 0 | URL
마음속에 품어두고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어떤 땐 찔리기도 하고 어떤 땐 속이 시원해지기도 해요.

전호인 2007-10-26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한 글을 썼다는 말에 갑자기 끌립니다.
^*~

소나무집 2007-10-30 10:47   좋아요 0 | URL
짧게 쓴 작가의 말이 정말 솔직했어요. 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내려다 보는 이의 여유 같은 게 느껴지네요.

하늘바람 2007-10-2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

소나무집 2007-10-30 10:47   좋아요 0 | URL
인생이란 이런 거지 싶네요.

씩씩하니 2007-10-2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님이 먼저 읽으셨네..오늘 읽을 책 찾아 살짝 헤매다가,,
요걸 사야지..하구 보니..님이..먼저..ㅋㅋㅋ 땡쓰투

소나무집 2007-10-30 10:49   좋아요 0 | URL
전 이 책을 읽다가 여러 번 큰 소리를 내가며 웃었지요. 사람들의 이중적인 마음이 똑같구나 싶었어요. 님도 그러실 거예요.

비로그인 2007-10-2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님의 책은 일단 나왔다 하면 주문부터 하고 보는데, 조용히 땡스투 하고 주문하러 갑니다.

소나무집 2007-10-30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사실은 저도 내용 안 따지고 사서 보는 작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