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에게

우리 딸에게 아빠는 늘 편안한 친구처럼 다가가고 싶지만 요즘 들어 부쩍 짜증만 늘고, 집에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처럼 비쳐지는 것만 같다.

선우는 어떻게 생각하니?

아빠가 2년 넘게 주말에만 서울과 집을 오가며 지내는 모습이 아빠한테도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너에게도 좋은 아빠 노릇을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야.

그리고, 아빠가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게 있단다.  

그건 바로 '수학에 대한 공포심'을 너한테 남겨준 사람이 바로 이 못난 아빠라는 사실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진학하던 순간까지도 아빠는 늘 너에게 수학을 지도하고 가르친다면서 소리 지르고, 화만 내고 있었구나. 그래서 너의 수학에 대한 호기심과 자존심을 결정적으로 꺾어놓았다는 생각 때문에 아빠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정.말. 미.안.하.다.

아빠는 우리 선우가 몸이 부쩍 자라고, 정신도 많이 성장하면서 중학교 생활을 나름대로 잘 헤쳐나가는 모습에 늘 마음 뿌듯하다.

그러면서도 너를 힘들게 만드는 그 망할놈의 수학이란 괴물만 생각하면, 아니 수학을 괴물로 만든 원인이 아빠에게 있다는 생각만 하면!

아빠는 도대체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뿐이란다.

한때는 우리 선우가 수학하는 재미와 즐거움에 싱글싱글거리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 들어 점점 수학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생각에 그 지랄같은 수학 공포만 더 키워가고 있는 것 같아 너무 걱정스럽다.

아빠의 바람은 한 가지란다. 우리 선우가 기자로서의 꿈을 잃지 않고 (혹은 다른 꿈을 꾸며 자라나도 괜찮다.) 학교 생활 잘 하고, 친구들과 좋든 싫든 갖가지 추억도 만들면서 네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길 기원하고 또 바라는 바이다.(모든 인생이 다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겠지. 또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불행하다고 늘 불행한 것도 아니거든.)

게다가 건강하게 튼튼하게 씩씩하게 잘 자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지금 네 입장에선 조금만 부족하거나 어려운 점이 있어도 세상이 다 불만족스럽고, 마구 욕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일어날 수 있을거야.

아빠도 너처럼 중, 고등학교 시절엔 그랬으니까.

할머니께 막 소리쳐서 할머니를 슬프게 만든 적도 있고, 그게 또 속상해서 아빠 혼자 속으로 후회하면서 울기도 하고 그랬단다.

물론 학교 수업을 몰래 빼먹고 시험공부도 하지 않아서 점수를 엉망으로 받곤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다.

어른이 된 후에 선우와 같은 학생 시절을 되돌아보니 참, 별것도 아닌 것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내 온 정신을 다 쏟아붓고는 절망하고, 왜 그렇게도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나 싶지만... 어느 노랫말처럼 그땐 그랬지. 어쩔 수 없다.

아마 아빠가 다시 학창시절로 선우와 같이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도 똑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구나. (하긴 네 입장에서 보면 '아빠가 요즘 지우랑 노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똑같아요'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린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 시절도 이겨내고, 대학생이 되어서 세상과 싸워도 보고, 사회 생활에서 굴욕과 절망감도 견뎌내면서 온전히 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러니 선우야, 어렵겠지만 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딱지들일랑 한 번쯤 발로 툭 걷어차 버리고, 어쭈구리 하면서 비웃어보렴. 알고 보면 정말 별게 아닐 수 있거든.

쫄지마! 씨바, 그냥 막 욕하고 그 까이꺼 그냥 막 해보는 거야. 그럼 속이 후련해지지. 용기란 그런거야. 우리 선우, 힘내라! 화이팅!!


2011. 10. 18.

아빠가 울 딸 선우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을 담아 보낸다.


(젊은 세종대왕이 아버지 태종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냈지? 그래, 아버지 태종에겐 다른 대안이 없었거든, 그리고 세종이 태종보다 훨씬 오래 살 거잖아. 두려움이란 괴물딱지들도 그런 거야! 알고 보면 마방진에 갇힌 숫자들에 불과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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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11-10-2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다른 과목은 최상급인데 수학 성적은 점점 하락하는 딸을 보면서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서울에서 등기로.
편지를 읽고 있는데 눈물이 난다. 이 남자가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은 감이 와서...

엘리자베스 2011-10-21 10:35   좋아요 0 | URL
이미 좋은 아빠예요^^
이 편지가 선우한테 큰 힘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어요.

소나무집 2011-10-24 09:12   좋아요 0 | URL
애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전 늘 강요(?)하죠.
"애들아, 너희들은 얼마나 좋은 엄마 아빠랑 같이 사는지 알고 있지?"
그런데 별로 인정하는 눈치가 아니예요.^^

하늘바람 2011-10-2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멋진 아빠를 가진 선우는 아빠 나이가 되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그리움이 가득하고 그 힘을로 평생을 씩씩하게 살거 같아요

소나무집 2011-10-24 09:05   좋아요 0 | URL
평소엔 좋은데 수학 공부할 때만 되면 웬수가 되더라구요. 그래도 힘든 딸의 마음을 알아주니 다행이다 싶어요.^^

울보 2011-10-2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진 아빠시네요,,요즘 제마음이 딱 저마음인데 아빠마음,그런데 아직 어린딸이 이해하기에는 아직 버거운것 같아요, 선우는 정말 좋은 아빠를 두어서 행복하겠어요,,

소나무집 2011-10-24 09:07   좋아요 0 | URL
우린 공부 때문에 거의 닥달 같은 거 하지 않는 편인데 수학은 좀 고민이 돼요. 우리딸도 혼내는 게 싫기만 하지 아빠의 마음 다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순오기 2011-10-2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편지 읽으며 눈가에 물이 고여요.
이런 아빠를 둔 선우는 그까이거 수학 괴물쯤 물리칠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우리집에도 수학 괴물이 살아요~~~~ ㅋㅋ
지나고보면 별거 아니었는데 그땐 우리 모두 그랬지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도 역시 그럴 거라는 말에도 공감해요. 추천 꾸욱~~~~~

소나무집 2011-10-24 09:10   좋아요 0 | URL
기특하게 이렇게 편지 쓸 생각을 다 했나 모르겠어요.
딸내미 수학 공포는 다 자기 때문이라는 걸 발견하고 반성 많이 했나 보더라구요.
나는 그걸 진즉에 파악했는데 이제야 파악했어요.^^
민경이랑 선우 수학 괴물은 썩~ 물렀거라~~~

iCANdoit 2011-10-2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 좋은 아빠가 그냥 될 수는 없는 것 같아. 우리 아들, 딸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 될 거라고 믿어. 그건 그냥 믿어. ^^

소나무집 2011-10-25 15:32   좋아요 0 | URL
^^

무스탕 2011-10-2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아빠시고 멋진 엄마세요!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무얼 잘못하며 지내는지 알면서도 그걸 인정하고 표현하는 부모는많지 않거든요.
저희집부터도 그러하니 선우아빠님의 고백과 격려는 어떤면에서는 저의 부러움이기도 합니다^^

소나무집 2011-10-28 13:16   좋아요 0 | URL
칭찬하주시니 고마워요.
맞아요. 잘못하고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남편한테 칭찬 많이 해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