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빨강 창비청소년문학 27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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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내내 동시집을 여러 권 읽었다. 의무감으로 몇 권 읽다 보니 좀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충 보고는 얼른 책꽂이로 보내버렸다. 책을 덮고 돌아서면 시인의 이름도 시제목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책을 읽는 나에게 몸도 마음도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동시집은 슬슬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던 참인데...  

창비청소년 문학 시리즈로 나온 박성우 시인의 <난 빨강>이란 시집을 만났다. 서평을 쓰러 와서 별점 체크를 하다가 최고 5개밖에 줄 수가 없어서 안타까운 생각마저 들었다. 별 50개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시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는 중고딩 아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엄마 아빠도 선생님도 몰랐던 솔직한 중고딩들의 마음이...  

공부 때문에 힘들다고 투덜대다가도, 몸의 성장과 이성에 눈을 뜨고 호기심이 발동하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 속에서 덜 영근 연둣빛으로 물이 오르고, 발랑 까지고 싶은 빨강 빛깔로 성장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특히 솔직하게 드러내놓기 뭣했던 몽정 이야기라든가, 거시기에 난 털을 면도했는데 자꾸만 나는 털 때문에 고민하고, 자위를 하고 있는데 문 열고 들어온 아빠 때문에 민망했던 이야기 등등. 이 시집 덕분에 아이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게 뭔지도 알게 되었다는... ㅋㅋㅋ  

요즘 우리 아이들의 현실은 알람 시계가 울리면 일어나서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보충 수업 듣고 학원에 가서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고장난 기계처럼 깜박깜박 불이 꺼지는 공부 기계처럼 산다.(공부 기계) 공부 잘하는 누나가 밤늦게 먹고 싶다는 만두를 사러 나갔다가 문 연 만두집을 찾아 헤매느라 늦게 왔더니 엄마는 딴짓 하다 왔다고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뒤에서 5등인 난 말대꾸도 못한다.(심부름)  그래서 기말 고사 보러 간 날 고릴라가 교실을 뜯어먹고 염소가 시험지를 뜯어먹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실컷 놀다가 집으로 가는 꿈이나 꿀 뿐이다.(신나는 악몽)  

하지만 늘 아이들이 절망만 하며 사는 건 아니다. 사업하다 망한 아빠 때문에 경매로 넘어간 집에서 이삿짐을 싸며 눈을 붉히기도 하고(가벼운 이사),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엄마 아빠처럼 고생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짜증내는 못된 아들이라고 자책도 하고(못된 아들),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하려다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에 꾹 참기도 하고(학원), 컴퓨터 없인 못 살 것 같지만 엄마 아빠 없이는 정말 못 살겠다고 고백하기도 하고(컴퓨터를 조심해), 신나는 가출을 꿈꾸며 계획을 짜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중간고사에 매달리고(신나는 가출), 사춘기 동생도 챙겨주고 삐딱하게만 듣던 선생님 말씀도 제법 듣는(몽땅 컸어) 아이로 성장해가고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일기로 쓴 것만 같다. 시를 읽으며 난 통쾌하게 하하하 웃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져서 눈물을 훔쳐내기도 했다. 난 그런 시들을 읽으며 한 편 한 편에 댓글을 달았다. 모든 시의 화자인 아이들이 속을 터놓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대답을 안 해줄 수가 없었다.   

내가 단 댓글들 꼭 머리 빗을 때만 쳐다보는 엄마, 머리도 시간 정해놓고 엄마한테 보고하면서 빗어야겠구나(대체 왜 그러세요?), 똥처럼 너희들이 자라 우리를 나가면 세상을 더 깊고 푸르게 키울 거야.(거룩한 똥), 나도 이런 어미가 되고 싶은데 혹 닭보다 못한 어미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텐데 어른들은 왜 아이들 마음을 모르는 걸까?(사춘기인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보다 서울대 간 옆집 완상이 오빠가 더 미웠겠네(서울대), 아이들의 일상이 공부뿐이라는 게 참 슬프구나. 공부 때문에 모두 기계가 되어버리다니 이렇게 살지 않을 방법은 없는 거니?(공부 기계)...

시집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중고딩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며칠 동안 함께 캠프라도 다녀온 듯하다. 아, 소통이란 게 이런 거로구나 싶다. 공부에 지치고 엄마의 잔소리에 지친 중고딩 아이들의 책상 위에 놓아주고 싶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엄마나 선생님, 친구보다도 더 위로가 되고 속이 후련해지는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중고딩들이 공감 100%에 플러스 알파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엄마 아빠, 선생님이 함께 보고 아이들과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최고의 시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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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0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성우 시집이라면 저는 안 보고도 인정합니다.
이 책은 당장 장바구니로~~~

소나무집 2010-03-08 00:22   좋아요 0 | URL
아우, 중고딩 아이들에게 선물하면 정말로 공감할 만한 시집이에요.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으로 선물할 아이들 생각했다니까요.
선물하기 좋게 책을 좀 고급스럽게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어요.
지원 받아서 만든 책이라서 그런지 제작비 덜 들인 티가 너무 나는 게 흠이에요.

빨강이 2010-03-0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중고등학생들이 사본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저는 7000원에(요새 책값치고는 너무 좋잖아요!0 가볍게 만든 게 너무나 좋았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거지요. ㅎ

소나무집 2010-03-08 23:57   좋아요 0 | URL
저도 착한 책값 7000원이 넘 마음이 들어요.
그런데 선물할 생각을 하니 하드커버였으면 어땠을까 싶더라구요.^^

연두랑 빨강이랑 2010-03-0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직은 연두이지만 진한, 빨강을 향해.....
스트레스지수 확 날릴 만큼 재미있고 웃겼습니다.
그러면서도 두고 두고 힘들 때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꺼내어 볼 것만 같은...

소나무집 2010-03-09 00:0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스트레스 지수 확 날려주는 시집이죠?
저도 정말 웃기고 재미있고 찡했답니다.
중고생들에겐 정말 힘이 될 것 같고, 응원꾼이 될 것 같은...
혼자 있을 때도 여럿이 있을 때도 꺼내 보고 싶은 <난 빨강> 너무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