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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운하가 바라다보이는 암스테르담의 멋진 식당에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앉아 있어요. 음, 연인이거나 방금 전 첫눈에 반한 사람이거나. 아무튼 당신 앞의 그 사람으로부터 '나는 아직 당신의 아름다움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당신의 기분을 숨긴 채 도도한 척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커플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아닌 말기 암을 앓고 있는 한 소녀와 골육종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소년의 대화라면, 운하 위로 미끄러지듯 석양이 흐르고 있다면...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드라마나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적 스토리를 다룬, 말하자면 특별하지 않은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죽음을 앞둔 십대의 시각에서, 고통 속에서 남들보다 먼저 수동적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그들이 발견해야 하는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소설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노력'이라고 썼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소아암을 앓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죽음이나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세상과 결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런 무의미한 죽음을 맞는 꼴은 원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깨달았거나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는 삶의 비의를 그들을 통하여 내보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난 지상에서 잊히는 게 두려워. 하지만 내 말은, 우리 부모님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고, 영혼 간의 대화를 믿어. 망각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거야. 내가 목숨을 잃는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게 두려운 거지. 위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최소한 위대한 선을 위해서 죽어야 하지 않겠어? 난 내 삶도 죽음도 그렇게 의미있지 않을까 봐 두려워." (p.178)

 

소설에 등장하는 헤이즐은 열세 살에 4기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았고 암세포가 폐로 전이된 상태입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헤이즐이 걱정이 되었던 헤이즐의 엄마는 그녀에게 서포트 그룹 집회에 참석할 것을 권합니다. 그 모임은 암을 앓고 있는 십대들의 모임이었죠. 그곳에서 헤이즐은 맘에 드는 남자 아이를 만납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어거스터스 워터스. 그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고, 헥틱 글로우 밴드의 노래를 즐겨 듣는 열일곱 살의 소년으로서 여느 십대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요. 농구 선수였던 그는 골육종을 앓는 바람에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여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을 닮았다며 자신의 집에서 영화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헤이즐에게 비디오 게임을 소설화한 <새벽의 대가>를 빌려주고 자신도 헤이즐이 좋아하는 <장엄한 고뇌>를 빌려 읽게 됩니다.

 

"제 이름은 헤이즐이에요.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제 인생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저희의 사랑은 웅장한 러브 스토리였고 아마 그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한다면 여기가 온통 눈물바다가 될 거예요. 거스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죠. 전 저희들의 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짜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이건 저희와 함께 사라질 거고, 그래야 마땅하니까요. 전 그가 절 위해 추모사를 읽어 주길 바랐어요. 왜냐하면 달리 그래 주길 바라는 사람이 없으니까......" (p.272)

 

위에 인용한 문장은 헤이즐이 어거스터스의 장례식에서 읊었던 추모사입니다. 그들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은 아마도 은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쓴 <장엄한 고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미완성으로 끝난 <장엄한 고뇌>를 헤이즐이 특히 좋아했던 이유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헤이즐은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위해 거스(어거스터스의 애칭)는 작가가 살고 있는 암스테르담으로의 여행을 성사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피터 반 호텐은 술에 의지하여 사는 배뷸뚝이 아저씨에 불과했고, 그로부터 소설의 뒷이야기는 결코 들을 수 없었지요.

 

"물론 나도 피터 반 호텐이 제정신이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세상은 소원을 들어 주는 공장이 아니다. 중요한 건 문이 열렸다는 거고 내가『장엄한 고뇌 』 뒷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문지방을 넘어섰다는 거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p.193)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 사실 거스는 골육종이 재발한 상태였습니다. 같이 동행했던 헤이즐의 엄마와 집에 남아 있던 헤이즐의 아빠는 이미 거스의 부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을 헤이즐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스는 자신의 병을 숨긴 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헤이즐과의 특별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암환자들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도 그런 용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몇 년이나 바늘로 찔리고 칼로 찢기고 약물을 투여당하면서 어떻게든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그런 순간마다 나는 매우, 대단히 기쁘게 죽어 버리고 싶었다." (p.114)

 

소설의 결말은 누구나 에측할 수 있는 시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스는 죽고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헤이즐을 위해 거스는 자신이 상상한 글을 작가 피터 반 호텐에게 보냅니다. 헤이즐의 추도문으로 말이죠. 죽어가면서도 거스는 홀로 남겨지게 될 헤이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소 우울하고 칙칙할 듯한 소아암 환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제가 조금 특별하게 읽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 내내 십대들의 언어와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에서 풍기는 우울한 분위기를 걷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군데군데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긴 하지만 말입니다. 가령 헤이즐의 아빠가 헤이즐에게 들려 준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런 예이겠지요.

 

"대학 시절 수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단다. 작고 나이 든 여교수님이 가르치시는 굉장히 훌륭한 수학 수업이었지. 선생님께서는 푸리에 변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다가 말하던 중에 갑자기 멈추시고는 그러셨지. '가끔 우주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곤 하는 것 같아.' 그게 내가 믿는 거란다. 난 우주가 자신을 알아채 주길 바란다고 믿는다. 우주가 의식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 않고, 지성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준다고 생각한단다. 우주는 그 우아함을 사람들이 관찰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도대체 뭐라고 우주가, 최소한 내가 본 우주가 일시적인 거라고 말하겠니?" (p.236)

 

남들은 평생을 두고(대략 칠,팔십 년은 되겠지만) 천천히 배워가는 삶의 의미를 소아암 환자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압축해서 깨달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마음이겠지요. 어쩌면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어른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피터 반 호텐처럼 뭔가 상처를 줄 만한 존재를 찾아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비참한 생명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처럼 좀비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계속 걷기 위한 모든 일을 의무적으로 하는 어른들도 있다. 둘 중 어떤 미래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세상의 모든 순수하고 좋은 것들을 다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령 죽음이 앞을 가로막지 않는다 해도 어거스터스와 내가 나눈 것 같은 종류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p.289)

 

가을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군요. 괜스레 쓸쓸해집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삶마저 파괴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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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조금 늦었다.  사실은 어제까지 이 페이퍼를 작성해야 했는데.  무리한 일정도 아닌데 나는 늘 이렇게 마냥 손을 놓고 있다가 기한이 임박하거나 하루쯤 지났을 때 바쁜 척 서두르곤 한다.  석양이 유난히 예뻤던 오늘, 가을도 이제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14기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귀가를 서둘렀었다.  한 달에 두 권의 신간 에세이를 읽고 리뷰를 쓰는 일.  생각해보면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닌데 나는 늘 분주했고, 리뷰의 문장 하나하나를 고쳐 쓸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아쉽다.  어떤 일이든 지나고 나면 아쉬움만 손에 잡힌다.

 

- 14기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정유정 작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가의 진짜 모습은 소설에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가의 산문집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적절한 유머를 섞어가며 작가 자신의 민낯을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한 선에서 보여주었던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은 여행 에세이로는 드물게 감동과 웃음을 함께 주었던 기억에 남는 책이다.

 

 

 

 

 

 

 

 

- 14기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마지막까지 부실하다는 평을 들을 수는 없어 뭔가 멋진 말을 덧붙이고 싶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장미희처럼 '아름다운 밤이에요.'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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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별세 소식에 애도의 글을 쓴다는 건 좀 낯부끄러운 일이다.

나도 안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써야겠다 맘 먹은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거나 그의 콘서트에서 특별한 일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이른 나이에 맞는 갑작스러운 죽음은 누구에게나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한다. 뭐, 멋있게 보이고 싶다거나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짓은 아니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마시길.(오해는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내가 가수 신해철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가 모 방송국의 라디오 디제이를 맡았던 시기였다. 대중가요 가수라면 으레 '딴따라'로 비하되는 유교주의 잔재가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 남아 있던 시기에 그는 단연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실 그의 노래보다는 빼어난 언변에 먼저 매료되어 그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세련된 언어와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던 그의 말은 마치 말이 먼저이고 머릿속에서의 생각이 천천히 뒤따르는 것처럼 보일 만큼 달변이었다. 그의 거침없는 발언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고 호불호로 분명히 갈렸던 게 사실이지만, 나는 그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가 맘에 들었다.

 

사실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소신을 밝히지 못하거나 자신의 소신과 베치되는 말로 어물쩡 넘어가는 것보다는 돌을 맞더라도 할 말은 하는 게 더 멋있어 보인다.( 한 100배쯤) 그의 생전 노무현 대통령 추모 공연에서도 자신은 가해자라며 그 때문에 영전에 담배 한 대 바치지도 못했고 조문도 못 했으며, 할 줄 아는 게 노래밖에 없어서 노래라도 드리러 왔다고 했다. 여전히 '딴따라' 같은 연예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는 특별했고, '마왕'이나 '교주'로 불릴 만큼 당당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그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을 슬픔에 젖게 했다.(물론 그 와중에 악플을 다는,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일베스러운 짓거리를 하는 자들도 있다.)

 

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고, 앞으로 그의 말과 노래들은 한 줄의 점선을 긋듯 띄엄띄엄 이어지다가 언젠가 점과 점 사이의 간격이 무한히 길어질 때가 되면 처음부터 여백이었던 듯, 빈 허공이었던 듯 잊혀질 것입니다. 박제가 된 그의 말들이 유리창 밖에서 소리도 없이 흔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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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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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과 다듬고 매만져 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매끈해진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현실감있게 느껴지나요?  나는 어떤 작품을 읽든, 그것이 소설이든, 시이든, 수필이든 '현실감'이라는 단어를 늘 생각하곤 합니다.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종종 현실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그린 작품이 더 현실감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착각이죠.  실상 현실을 조금만 섞고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듬어진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썽둥이처럼 닮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부끄러운 현실, 더럽고 추잡한 인간 군상, 그날이 그날 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누군가의 작품 속에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까닭이지요.  어쩌면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욕구가 투영된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소설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는 이따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그닥 아름답지 못한 소설을 만나게 됩니다.  현실에서도 늘 보고 듣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조차 또 마주한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입니다.  지겨운 생각마저 들겠지요.  그런 게 내가 사는 현실이 아니다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약간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즐겨 찾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나 리 차일드, 때로는 빌 브라이슨의 작품이 그것입니다.  감 잡으셨겠지만 오쿠다 히데오나 빌 브라이슨은 자신의 작품 속에 위트와 유머를 적절히 사용하는 작가이고 리 차일드는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 박진감있고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로 유명한 작가죠.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일종의 기분전환용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이들 작가의 책에서 읽는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도 제공받기 때문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꿈의 도시>는 작가 본인의 성향과는 배치되는 그런 작품입니다.  위트와 유머를 걷어낸, 간결한 스토리에 문학적 수사를 배제한, 오직 작중 인물들을 통하여 현실의 민낯을 보여주고자 시도하는, 다소 엉뚱하고도 지루한, 그러면서도 60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만 읽을까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읽은 게 아까워서 그만둘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3개 읍이 합병한 인구 12만의 지방 신도시 ‘유메노’시 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통합시라는 게 여간 문제가 많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시라며 거창하게 출발했던 창원시도 얼마 전 회의석상에서 시장이 계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통합을 통하여 지역의 이익을 획득하려는 얄팍한 잇속을 버리고  통합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생활리듬을 유지하며 조용히 살았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메노'시는 시의 탄생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외부 인구의 유입과 상권의 변화, 그에 따른 범죄의 증가와 빈부 격차 등 긍정적 변화보다는 부정적 변화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나이, 직업, 주변 환경, 가치관 등이 전혀 다른 다섯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가 펼쳐집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시청 생활보호과에서 생활보조비 수급 대상자를 상대로 일하는 공무원 아이하라 도모노리는 아내의 외도로 이혼을 한 후 현청으로 옮겨갈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적당히 보내는 인물입니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어떻게든 유메노를 떠나고 싶은 여고 2학년생 구보 후미에는 어느 날 갑자기 게임에 빠진 은둔형 외톨이에게 납치됩니다.  폭주족 출신으로, 노인들만 사는 집을 골라 누전차단기를 교체해주고 엄청난 돈을 받아 사기를 치는 세일즈맨 가토 유야는 선배가 벌인 살인 사건에 본의 아니게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소매치기를 잡아내는 보안 요원이자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는 중년의 이혼녀 호리베 다에코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큰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유메노 시의원 야마모토 준이치는 그의 조력자로 친분이 있었던 야쿠자 조직에 의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전체적인 스토리는 무의미한 듯 보입니다.  소설의 끝부분에 발생하는 고통사고에 대부분의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조금 황당해 보이구요.  작가는 소설의 구성이나 문학적 완성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합니다.  작가는 오직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불균형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의 문제점은 물론, 가정 폭력, 은둔형 외톨이, 사이비 신흥 종교, 정치권의 세습, 사기 세일즈,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유부녀의 원조 교제 등 현대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후미에를 납치했던 노부히코는 학창시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여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게임 속의 가상현실을 사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당했던 폭력을 그의 부모에게 행사하면서 말입니다.  그가 한 말은 가슴이 아픕니다.

 

"학교라는 데는 공부 잘하는 놈 아니면 싸움 잘하는 깡패 같은 놈의 전용 놀이터야.  그 밖의 학생들에게는 교도소하고 전혀 다를 게 없어.  날마다 학교에 갇혀서 듣기도 싫은 수업을 듣는 게 무슨 얼어죽을 의무교육이야?  난 이 학교 진짜 죽도록 싫었어.  수학여행 때는 어땠는 줄 알아?  나를 깡패새끼들하고 한 팀에 몰아넣었지.  여행하는 사흘 내내 짐꾼 노릇만 했어.  애초에 수학여행 같은 거 가고 싶지도 않았어.  일주일 전부터 배탈이 났었다고.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느냔 말이야."    (p.590)

 

기분전환 삼아 자신있게 선택했던 책들도 간혹 원래의 목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책으로 귀결될 때가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의 책이라면 무조건 읽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라고 내가 굳게 믿었다가 낭패를 본 것처럼 말입니다.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죠.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한 낭패도 경험하면서 살게 마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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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대한민국은 이제 국가 존립의 근거마저 상실했구나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더군요. 속에서 열불이 날까봐 나는 일부러 한동안 뉴스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뉴스를 보니 지난 정권에서 자원외교와 4대강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천문학적인 혈세를 탕진하여 국고를 바닥내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부족한 국고를 메우기 위해 자동차세, 주민세 등 각종 세금을 인상하고, 그에 더하여 지하철 및 버스 요금 인상, 고속도로 통행료 인상, 상하수도 요금 인상 등 각종 공공요금을 인상하겠다고 하더군요.

 

세월호 사건과 판교 사고에서 보았듯 국민의 안전은 뒷전이고 오직 정권 재창출에만 혈안이 된 정부. 빚더미에 앉은 국민의 생활을 도외시한 세금 정책을 펴는 정부, 과연 이 나라가 국민을 위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요. 국가의 존립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생명도, 국민의 재산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국민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대북 전단 살포에도 국가는 수수방관입니다. 다만 대통령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전단 살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체면은 국민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것을 위해 정부의 권력기관이 다 동원된 셈입니다. 국민 전체를 감시하고 사찰하는 데 검찰과 경찰이 동원되는가 하면 이를 비난하는 국민들은 종북, 빨갱이로 매도합니다. 연산군의 폭정이 이보다 더했을까요.

 

당신의 인내력은 어디까지인가요? 나의 인내력은 또 어디까지 일까요? 국민 모두에게 일일이 묻고 싶은 요즘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인내력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요. 보도를 걷는 행인의 축 처진 어깨를 볼 때마다 괜스레 눈물이 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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