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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별이 내게 말했다
멜리사 달튼 브래드포드 지음, 김수민 옮김 / 레디셋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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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계 공통의 언어는 '슬픔'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슬픔에 빠진 한 사람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 또는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슬픔의 층위가 서로간의 친밀도에  따라, 그 시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슬픔은 누구에게나 쉽게 감지되고 얼굴과 몸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슬픔의 빛깔로 인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별개로 가슴과 가슴을 잇는 침묵의 언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대학 입학을 앞두었던 그해 여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미처 예감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손주들을 끔찍이 위하셨던 할머니. 어려웠던 살림살이와 시도 때도 없던 아버지의 술주정에 몸시 힘겨워 하셨던 할머니는 이따금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한동안 날품을 팔았고 돌아오실 때면 언제나 손주들 용돈을 챙겨 오시곤 했었다. 그랬던 할머니였기에 가족들이 감내해야 할 상실의 고통은 깊고도 질긴 것이었다. 그해 가을의 어느 날, 지인의 부탁으로 외국인 한 명과 만날 일이 있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과 함께 관공서에서 업무를 보는 일이었다. 일종의 통역일이었지만 관공서에 근무하는 직원과 외국인이 의도하는 바를 적당히 설명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서툰 영어 실력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만났던 외국인의 따뜻한 손길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깨가 축 가라앉은 채 간신히 일을 마쳤던 나를 그는 무작정 근처의 한 음식점으로 이끌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그는 몇 번인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심이 섰다는 듯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무었 때문에 그렇게 힘이 없느냐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적인 질문을 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었다. 나는 그의 얼굴 표정에서 처음 만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얼마 전에 할머니를 잃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모든 게 엉망이라는 것을 떠듬떠듬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감싸 쥐고는 자신도 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날 처음 만났던 생면부지의 한 외국인으로부터 나는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우리가 헤어지고 난 뒤에도 그는 내가 몹시 걱정이 되었던지 나의 집으로 전화를 했었고, 특별한 용건도 없으면서 그는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나와 몇 번이나 더 만났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서서히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대학생활에 온전히 적응하게 되었지만 그날의 일만큼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 날, 별이 내게 말했다>는 작가인 멜리사 달튼 브래드포드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아들을 잃고 극심한 슬픔에 빠져들었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관개수로에서 수영을 하다가 소용돌이에 휩쓸려 죽었을 때, 그것도 두 번이나 살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면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파커가 결국 코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댄은 분노와 괴로움으로 몸부림쳤다. 그런 다음 세상에서 분리되고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 이 말도 안 되는 삶과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특히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기 위해 씨름했다. 더 이상 뭐가 중요하겠어? 안전한 사람이 어디 있어? 누가 신경이나 쓰나?" (p.352)

 

나는 지난해 여름 나의 아버지와 작별했다. 평생을 술로 사셨던 분이다. 그러다 기력이 쇠하여졌을 때는 당신에게 남겨진 삶을 오롯이 병원에서만 허비했다. 15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었다. 그 지난했던 시간들이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은 당신의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삶을 위해서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찾아왔던 상실감과 무력감은 나을 수 없는 고질병처럼 내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슬픔의 짐승'을 만나게 되고, 이 짐승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일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 존재하는 짐승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타인의 슬픔의 짐승과 마주쳤을 때 어떤 사람들은 회색곰과 대면한 것처럼 반응한다. 비명을 지르며 부리나케 도망을 치는 사람들도 잇고, 처음에는 몸이 얼어붙었다가 까치발을 하고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뒷걸음질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비극적으로 짐승의 쇠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p.146)

 

언젠가 나조차도 삶과 작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떠나겠지만 나는 내가 겪었던 두 번의 경험(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하여 나는 가족과,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이별해야 하는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상실의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 고통의 나락에서 벗어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지, 또는 슬픔을 감추고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때일 수도 있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저 허둥대거나 피하기만 하는 건 아닌지, 그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느 날, 별이 내게 말했다>는 글을 쓰는 작가이자 시인이고, 학자이며, 네 아이의 엄마였던 저자가 네 명의 자식 중 큰아들을 잃었던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경험을 쓴 책이다. 우리는 저자의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슬픔은 우주 공통어인 동시에 침묵 속에서 이해되는 유일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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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감정은 표정이나 몸짓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것은 때로 이제 막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겨울의 어느 휴일 아침에 초록색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저 쪽 큰길가의 연탄 배달차에서부터 이쪽 언덕의 오막살이에 이르기까지 한 줄로 길게 늘어 선 채 연탄을 나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몸통을 돌려 다음 사람에게 연탄을 전달하는 사람들. 검댕을 묻힌 사람들의 얼굴에 하나둘 피어나는 웃음. 어쩌면 그들은 단순히 연탄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옆에 선 동료에게 행복해진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의 기분이나 느낌이 내게로 전해지는 것일 테지만 나는 솔직히 '전해진다'는 느낌보다는 '젖어든다'는 느낌일 때가 더 많다. 겉보기에 공감은 그렇게 한 장의 연탄처럼 배달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지에 물이 배듯 그렇게 젖어들기도 한다는 얘기다.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젖어듦'이란 재료에 따라 그 흡수하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데서 문득 들었던 생각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습자지처럼 얇고 부드러운 종이는 금세 젖어들지만 광고 전단지처럼 코팅이 된 종이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물 한방울 흡수하지 않는다.

 

우리네 마음의 질료도 세월에 따라 그렇게 변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한 겹 두 겹 코팅이 되어 타인의 마음을 흘려버리기만 할 뿐 빨아들이려는 생각은 점차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따금 '가짜 울음'을 우는 엄마를 보면서도 금세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기를 볼 때가 있다. 다들 저만했던 때가 있었을 텐데... 그때의 내 마음은 습자지와 같았을 것이다. 타인의 느낌이나 기분이 내 마음에 그대로 투영되지 않았을까. 습자지를 대고 글씨를 쓰듯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 내 기분이 이렇다' 설명에 설명을 거듭하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내 마음은 이미 몇 겹으로 코팅된 종이로 바뀐 까닭이다. 어찌하면 마음의 코팅을 벗겨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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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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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에 그닥 어렵지는 않지만 왜 하는지도 모르는 채 꾸역꾸역 하게 되는 일이 있다. 이를테면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만 해도 그렇다. 어떤 대가가 주어지는 일도 아니고, 가령 내가 쓴 어떤 글을 읽었던 누군가가 감동하여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얘기도 들려오지 않는데 나는 지치지도 않고 몇 년째 블로그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인내심이 특출한 사람이었던가?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그렇게 강한 인내심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딱히 기억할 만한 중요한 것을 기록하는 건 아니다. 읽었던 책의 좋았던 문장을 가려내어 언뜻 떠오른 내 생각과 함께 기록하는 게 고작이고, 이따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시답잖은 내 과거를 들춰내는 게 전부이다. 더러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얼마를 줄 터이니 서포터즈가 되어달라는 쪽지가 오기도 하지만 소심한 나는 '혹시 이러다 사기를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서 단 한 번도 가타부타 대응한 적이 없다.

 

소설가 한창훈의 산문집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다가 문득 궁금했었다. 나는 왜 쓰는지. 작가는 원고료 때문에 쓴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짧은 질문은 긴 대답을 요구한다'고도 했다. 또는 '왜 쓰는가'하는 질문은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이어서 대답하기 부끄럽고 쪽팔리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독자가 제목에서 기대하는 그런 게 아니다. 예컨대 작가의 창작론이나, 작가론 등 어떻게 쓰고 어떻게 생활하는지 시시콜콜 말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 한창훈이 걸어온 삶의 단면, 그가 태어난 거문도와 여수와 광주와 부산, 대전을 거치며 만났던 사람들, 소설가로 등단하여 교류했던 문인들, 그가 읽었거나 썼던 책에 대하여 작가는 진솔하게 쓰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왜 사는가?' 묻는 독자들에 대한 그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상금이 없었다면 신춘문예 응모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응모가 끝나면 후배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나는 계속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겨울철엔 일자리 구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택한 곳은 지방 신문사였다. 응모하고 나서 기다리고 있었고 머지않아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담담했다.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들, 짐작하지 못했던 것들이 돌발적으로 엄습해오는 미래만 무거웠다." (p.173)

 

책에 소개한 작가의 일과는 단순했다. '새벽 기상,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하기, 담배 피우면서 그냥 있기, 원고 쓰기, 낚거나 뜯어온 것으로 국 끓여 밥 먹기, 책 읽기, 산책이나 생계형 낚시하기,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 듣고 있기'(p.109) 소설가보다는 어부를 직업으로 선택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책에서 그가 밝힌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아시바를 매고 고기를 낚던 그의 손에서 짙푸른 감동을 길어올릴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에둘러 말하지 않아도 그가 쓴 소설은 그가 속했던 삶의 현장에 대한 정밀한 기사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과 외곽을 그리는 소설이 의미를 잃는 시대에 나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 변방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쓴 소설이 나오면 으레 고색스러운 방 하나에 한꺼번에 모아놓고 체크인 해버리는 게 요즘 풍토이다. 토속적이다, 질펀하다, 한마디 내뱉어주면 된다고 여긴다. 평론가들의 모국어 기피, 근친 혐오, 그 배경 속에서 쓰고 있다." (p.108)

 

책에서 작가는 유용주 시인, 고 이문구 선생, 송기원 시인, 고 박영근 시인, 이흔복 시인, 박남준 시인, 이정록 시인, 안현미 시인 등 작가와 교류가 있었던 문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들 중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에서 버들치 시인으로 소개되었던 박남준 시인과 안현미 시인에 대한 소개글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그의 넋두리와도 같은 이 책을 끝내 다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삶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한 사람이 결국 소설가로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작은 깨달음들, 그것을 나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일인 양 아팠다.

 

"상상보다 앞서 나간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없다면, 그런 모습이 없다면 자본의 확대재생산 속도를 늦춰줄, 도시와 비도시의 균형을 맞춰줄, 사람이란 그렇게 독하고 모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쓰기 시작했다. 섬의 딸들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넘겼는지, 어떤 형식으로 지리적 천형과 운명의 굴레를 이겨냈는지, 숨은 마음과 유쾌한 말을 적어나갔다. 죽음과 삶이 한 쾌에 엮여 있는 것. 울음과 웃음이 한 장소 같은 시간대에 뒤범벅되는 것. 자신이 떠나는 자리에 웃음소리 돋아났다면 그 인생도 괜찮은 인생 아니겠는가." (p.294)

 

비가 예보되어 있는 오늘,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고 한여름인 양 무덥다.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보며 불기운에 데인 양 아프지 않은 사람은 농부가 되지 못한다. 철썩이는 파도를 보며 망망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부가 되지 못한다. 결국 소설을 쓰는 작가는 세상의 모든 삶을 아파해야 한다. 소설가의 숙명은 아파하는 모든 인생에 경배하는 일이다. 어쩌면 직접 세상을 사는 본인보다 지켜보는 소설가가 더 아파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독자는 소설을 통해 한줌 위로를 받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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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06-11 12:52   좋아요 0 | URL
하릴없이 초록 그늘 아래에 서 있다 꼼쥐님의 글을 읽고,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유레카를 왜치며 성큼 성큼 계단으로 올라왔습니다. :)
왜 쓰는가?에서 출발한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
유대인들이 말하는 삶의 정수 - 일상을 특별한 날로 만들고, 평범한 것을 멋진 것으로 만드는것과 같이 생산적이고 밝은 하지만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 까지 복잡하게 생각하기전에,
˝인생은 아름다워서˝라고 간단히 말해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계단을 성큼 성큼 올라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상금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누군가 중독된 것처럼 매번 내 글을 확인하며 읽고 펑펑 울거나 배를 잡고 웃지 않아도,
그냥 예쁜 꽃을 보면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글을 쓰가고 사는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을 보고 ˝책 참 좋다˝를 조금 더 길게 쓰는 것처럼요.
그리고 어디에가면 더 예쁜 꽃이 있는지, 언제 예쁜 꽃이 피는지를 알아가는 것처럼, 지식과 지혜를 탐구하는 것 같습니다.
독자와 목적는 그 다음인 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꼼쥐 2015-06-12 13:04   좋아요 0 | URL
때로는 블로그에 부담감을 느낄 때도 더러 있어요. 그래서 블로그를 닫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럼에도 이렇게 유지하는 까닭이 뭔지 손에 딱 잡히지는 않아요. 말씀처럼 `예쁘다`는 말을 조금 더 길게 늘여 쓰면서 그 기분을 더 오래 느껴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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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도 네팔에서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만 이처럼 큰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나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예컨대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하는 구태의연한 장탄식이 아니라 인류가 오랜 시간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이나 믿음, 또는 진리가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한 지진에 의해 우리의 지지기반이 진동을 하는 것처럼 그로 인해 우리의 지적 기반도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밟고 지나다니는 길은 절대 꺼질 리가 없다는 믿음,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언제까지나 부서져내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내 곁을 지키는 가족은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믿음 등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믿음 체계가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 인류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우리네 삶도 획기적으로 바뀐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통틀어 인간의 생활은 그닥 변한 게 없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똑같을 뿐이지요. 지진이나 화산 등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자연재해를 한번씩 겪을 때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동안 진리인 양 믿어 왔던 모든 것들이 순간에도 기댈 수 없는 가변적인 것들일 뿐이고 세상의 모든 일들 또한 온통 우연의 결합체인 양 믿게 합니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그의 인터뷰 모음집 <글쓰기를 말하다>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견해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병에 걸리고, 죽고, 사랑합니다. 고통을 받고, 슬픔을 겪습니다. 화도 냅니다. 고대 로마든 오늘날의 미국이든 인간의 삶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되지요. 나는 통신기술이나 라디오, 휴대폰, 비행기, 지금의 컴퓨터 기술 등으로 인간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p.298)

 

폴 오스터의 인터뷰 모음집 <글쓰기를 말하다>는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독자라면 글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적어도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 강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의 인생관, 그의 철학, 글쓰기에 대한 그의 견해, 자신이 쓴 여러 작품과 관여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 등 작가는 인터뷰어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질문에 대해 인터뷰이의 입장에서 답변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작가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던 어린 시절, 작가로서 출발하기 위한 경제적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배를 탔던 시절, 번역일과 시인으로 살았던 위기의 순간 등 오스터가 25년 동안 여러 잡지와 한 인터뷰에는 그의 문학관과 창작 과정, 작업 방식 등 글쓰기에 관련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사도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그 인터뷰에서 당신은 글쓰기를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확실한 방법이며, 스스로를 일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p.224~p.225)

 

위에 인용한 인터뷰어의 질문만 보더라도 작가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작가로 유명한 폴 오스터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오렌지 주스 한 잔, 홍차 한 잔을 마시며 45분간 뉴욕타임스를 읽고는 집 인근 작업실로 가서 6시간 정도 글을 쓰고 특별한 가족 행사가 없는 한 일요일에도 글쓰기를 계속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쉼 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래서인지 작가는 누구에게도 글쓰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젊은이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신중하게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글쓰기에서 돌아오는 보상은 거의 없습니다.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어떻게 살아남을지 걱정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엄청난 고독의 경지를 사랑하는 취향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모든 작가들이 조금씩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처입은 영혼의 소유자, 글쓰기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거든요."    (p.399)

 

작가는 요즘에도 여전히 모눈종이 공책에 글을 쓰고, 더는 손 볼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고쳐 쓰고, 마지막에는 타자기로 원고를 정리한다고 합니다. 그는 "펜은 (컴퓨터 키보드보다) 훨씬 더 원시적인 도구"라면서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공책에 한 땀 한 땀 새겨 넣는 기분이 든다. 내게 글쓰기란 늘 그런 손맛을 느끼는 일이며 육체적인 경험"이라고 소개하면서 글쓰기를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가 우리를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작가가 된다는 것은 노력의 산물이 아닌 운명적인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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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06-09 14:02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정말 멋지게 소개해주셨네요 :)
반어법적 표현이 그의 창작 활동을 더욱 범접할 수 없는 활동으로 보이게하는 것 같습니다.

꼼쥐 2015-06-11 12:39   좋아요 1 | URL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에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이 책은 작가가 했던 많은 인터뷰 중에 중복되지 않도록 가려 뽑은 것을 책으로 엮었나 봅니다. 재미있었어요.
 
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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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말하다-읽다'의 삼부작으로 기획된 김영하 산문집 중 그 두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1995년 등단 후 작가가 가진 인터뷰나 대담에서 했던 방대한 발언들을 모으고 새롭게 편집해 산문집으로 낸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요즘 들어 인터뷰집을 많이 읽게 된다. 작가의 이전 작품인 '보다'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던 탓에 이 책을 그냥 건너뛰기는 어려웠다. 이 책에 대한 이웃 블로거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나는 어지간히 뜸을 들인 셈이다.

 

나의 독서 취향으로 판단할 때 나는 김영하의 팬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사람 괜찮은 걸.'생각하게 된 이유는 그의 생각이나 글이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적당히 건져 올린 허섭스레기들로 책의 지면을 성의없이 채우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때로는 그냥 적당히 넘어가도 될 일에 거품을 물고 달려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개성이라고 친다면 작가는 꽤나 매력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오프라인에서 친구로 지내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친구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애가 그냥 책을 읽게 내버려 두라, 인간에게는 어둠이 필요하다, 고 했다는 거예요. 동감이에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어둠이에요. 친구를 만나서 낄낄거리며 웃고 떠들면서 세월을 보내면 당시에는 그 어둠이 사라진 것 같지만 실은 그냥 빚으로 남는 거예요. 나중에 언젠가는 그 빚을 갚아야 해요."    (p.39~p.40)

 

시각이나 관점이 독특한 사람과 만나 일정 시간 대화를 하다 보면 뭔가 느껴지는 게 있다.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과는 다른, 몸 전체로 느껴지는 변화의 감지, 잘 느낄 수는 없다 할지라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때 이후로 나는 크게 변했구나 생각되어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김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내 생각과 다르지만 그래서 더 좋았던 듯하다.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는 뭐든지 같아지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김영하와 같은 사람도 어느 한군데 몸담고 진득하니 지냈으면 하등 다를 것 없는 사람이 되었겠지만 그는 나이가 웬만큼 든 지금도 남들과 다르다. 좀체로 같아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이다. 작가가 되길 천만다행이다. 만일 그가 어떤 조직에 속하여서도 지금처럼 꼿꼿하게 다른 모습으로 살았더라면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 십상이었으리라. 물론 본인은 그마저도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제가 겪은 가장 깊은 소통은 동료 작가와의 만남에서 경험한 적도 없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경험한 적도 없어요. 고요히 혼자 집에서 읽은 책의 내용과 거기 나오는 인물들, 그러니까 책 자체와 소통했던 순간이었어요. 영화는 두 시간이라 너무 짧아요. 뭘 깊이 소통했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가장 깊은 수준의 소통은 소설을 통해서 얻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즉 소설을 통해서 획득한 타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실제의 인간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p.172)

 

작가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문학이나 소설에 대한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작가만의 '책 고르는 기준'이나 '독서에 다시 흥미를 붙이는 간단한 방법' 등의 가벼운 이야기에서부터 자신의 소설 창작 과정, 글쓰기의 즐거움, 비관적 현실주의자로서의 자세 등 어쩌면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진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익히 알려진 TV, 신문, 잡지에서 했던 말도 수록됐지만 멀리 해외에서 했던 강연 내용들은 새롭다. 육체의 근육뿐만 아니라 감성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말도 재밌었다.

 

"백 명의 독자가 있다면 백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그 백 개의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읽은 책이 다르고, 설령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상이 다릅니다. 자기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에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p.181)

 

작가의 바람과는 반대로 이 세상은 홀로 설 수 없는 인간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스스로 서는 것조차 위태로운 반거들충이들의 집합소인 듯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까닭에 자신을 지탱해 줄 다른 동조자를 찾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비단 정치인뿐만이 아니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유행병처럼 네 편, 내 편으로 갈려 서로를 헐뜯고 비방한다.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인간, 누구의 도움이나 동조자의 조력 없이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점점 귀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김영하의 <말하다>를 읽는 모든 독자는 자신을 향해 스스로 묻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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