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눈으로 산책 - 고양이 스토커의 사뿐사뿐 도쿄 산책
아사오 하루밍 지음, 이수미 옮김 / 북노마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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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시 55분에 맞춰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깼다기보다 그때까지 푹 자지 못했다는 게 옳다. 내가 일어난 시각은 아마도 4시경이었을 게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빗소리와 높아진 습도 때문에 밤새 뒤척였었다. 잔뜩 흐린 하늘. 여느 날처럼 일찍 집을 나섰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접이 우산을 펼쳐 들고 아파트를 빠르게 벗어났다. 산을 오르는 초입에는 폐침목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다. 물기 머금은 계단을 오르자 층계참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게 새롭다. 빗길을 걷는 게 얼마만인지... 산의 능선에 이르렀을 즈음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뽀얗게 물보라가 일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 노래는 마치 칭얼대며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반경 2~3미터를 벗어나지 않은 채 주변을 겨우 맴돌다가 빗소리에 묻혀 이내 스러진다.

 

등산로 한켠에서 고양이를 만났다.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고양이였다. 하얀색에 엷은 갈색이 드문드문 섞인 고양이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는 털에 땟국물이 감돌긴 했으나 그나마 보송했는데 오늘은 털이 빗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꼴이 영락없는 새앙쥐다. 온통 비에 젖은 숲에서 제 한 몸을 누일 마른 곳을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어디로 달아난 것인지...

 

아사오 하루밍의 <고양이 눈으로 산책>을 읽었다. 아침에 만난 고양이를 떠올리면 가엾고 불쌍하다는 생각부터 들지만 아사오 하루밍이 생각하는 고양이는 더할 나위 없이 똑똑하고 사랑스럽다. 물론 작가가 말하는 '내 안의 고양이'는 실물이 아닌 작가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고양이이지만 말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혼자, 또는 지인들과 함께 했던 도쿄 산책을 고양이의 시선으로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작품 속에는 실제로 '내 안의 고양이'가 이따금 등장하여 작가의 행동을 일일이 간섭하고, 생각을 바로잡고, 고양이의 느낌을 전달함으로써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내 안의 고양이는 요즘 내 안에서 반만 있다. 매일 옷집 호랑고양이를 만나러 가느라 바쁘다. 옷집 현관 매트에 엎드려 졸고 있는 그 호랑이에게 매일같이 풍뎅이를 잡아 선물하는 모양이었다. 내 안의 고양이는 서로 코를 비비는 고양이식 인사를 하고 싶은데, 호랑이는 풍뎅이를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다. 그래도 내 안의 고양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풍뎅이를 잡아 톡 떨어뜨린다." (p.152)

 

사람의 시선으로 도시 산책에 나설라치면 크고 화려한 곳,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가급적이면 도로에 인접한 곳 위주로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사람이 긴요한 볼일이 없다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듯한,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길도 주저 없이 드나든다. 오히려 그런 곳이 고양이의 주 통로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고양이는 도시의 한 귀퉁이에 터를 잡고 산 지 단 며칠만 지나도 그곳 지리를 훤히 꿰뚫게 되지만 사람은 도시에 이사온 지 몇십 년이 지나도 뒷골목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서울 촌놈'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부러 나다니지 않으면 동국대학교에서 남산을 오르는 남산 산책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처 알지 못한다.

 

작가는 '내 안의 고양이'와 함께 도시의 고샅고샅을 누비고, 식사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도 만난다. 소소한 일상 속에 도시의 낯섦이 파고든 것인지,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소소한 일상을 맞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차를 타고 휭하니 갔을 때는 결코 보지 못했을 풍경들을 작가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감탄하며 기쁘게 기록하고 있다. 이따금 작가는 인간의 감성으로 진지하게 말하기도 한다.

 

"평소에 우리는 땅 위의 사물에만 관심을 두고 지면에 대해선 잊고 산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꿔 요시와라가 지니는 많은 요소 중 우선 '단'을 염두에 두고 마을을 바라보면 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할아버지가 구름 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을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들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 또한 땅 위에서 생활하는 일원으로서, 요시와라에 흥미를 가지는 마흔 넘은 여자로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그냥 생각나는 대로 살고 있다." (p.192)

 

이제 비는 완전히 멎었다.내가 만났던 숲속의 고양이는 배가 불룩한 게 새끼를 밴 듯했다. 사람을 경계하는 차가운 눈매와 공격에 대비하는 낮은 자세로 인해 나는 그 고양이에게 마음을 열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안하무인의 도시는 오직 사람들의 북적임과 떠들썩함으로 영역표시를 하고, 도시에 터를 잡고 살던 다른 동물들에게는 그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행세깨나 하는 양 사람들은 도시를 온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착각하게 되고, 도시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게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고양이의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면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경이로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선물처럼 한아름 쏟아질런지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면서도 우연히 만난 고양이의 거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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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앞둔 시점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이런 말을 들으면 가끔 온 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마치 내 몸의 어느 부분에 수채구멍처럼 에너지만 배출되는 특별한 통로가 있어서 듣기 싫은 말만 들으면 곧바로 그 통로가 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직자의 지나친 부도덕성(또는 탈법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는 엄격한 준법정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나만 그런가? 그럴지도...) 예컨대 공직자의 기강을 내세우면서 비서실이 작성한 문건을 두고 찌라시라고 한다거나,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은 눈감아주겠다는 식으로 함구한다거나, 국정원이나 군 기무사의 댓글 공작을 통한 선거 개입에도 도움 받은 게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사소한 잘못에는 가차없이 법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요즘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국정원 감청 의혹 사건만 해도 그렇다. 해킹 프로그램 구입을 대행했던 기업의 대표는 야당의 출국 금지 요구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업의 대표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출국했다. 뿐만 아니라 해킹 프로그램을 운용했던 국정원 간부는 컴퓨터 파일을 삭제한 채 자살했다. 웃기는 건 그가 마지막으로 탔던 마티즈 승용차의 진위여부였다. ccTV에 찍힌 번호판은 흰색으로 보이는데 왜 녹색 번호판을 달고 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한 네티즌의 문제 제기. 정부는 처음에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냥 믿으라고 햇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정부의 말대로 따라야 하는가?

 

정부의 탈법이나 불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사과의 말도, 그렇다고 책임자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국민들은 그저 정부를 믿으라는 강요,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이다. 이제는 국민들의 머릿속까지 통제하겠다는 것인지, 믿으라고 명령하면 믿어지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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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 960번의 이별, 마지막 순간을 통해 깨달은 오늘의 삶
김여환 지음, 박지운 그림 / 쌤앤파커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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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 찾아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호스피스 환자들은 오늘만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삶의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오늘을 오롯이 살아내려면 호스피스 환자처럼 억지로라도 한 번쯤은 미래의 죽음으로 찾아가서 '남겨진 시간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p.161)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를 쓴 김여환 님은 호스피스 병동을 지키는 의사이다. 8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900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임종 선언을 했다는 그녀의 경험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맞아야 할지, 생과 사를 가르는 영원한 이별과 그 상실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곰곰 생각하게 한다. 죽음이란 결국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는 마지막 고통이지만 애써 외면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에 우리는 하시라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몇 년 전 나는 독일의 유명 요리사 되르테 쉬퍼가 쓴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읽은 적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의 요리사였던 그는 자신의 책에 '죽을 준비가 된 것'과 진짜로 '죽을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종종 고통스러운 시간이 놓여 있다,고 썼다. 김여환 저자도 폐암 말기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호스피스 병원에 모시고 직접 임종 선언을 했던 가슴 아픈 경험을 이 책에 쓰고 있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긴 꿈에서 깨어나듯이 죽음이 순식간에 밀려올 것이다. 아! 이것이 운명이다! 싶으면 이미 늦는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벼락치기 공부가 통하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우리의 마지막이 빛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오늘 내가 바뀌어야 했다. 엄마가 살아갔던 삶의 끝자락을 통해서, 나의 눈부신 마지막도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p.178)

 

인간은 신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말이 있다. 어디 인간뿐이랴. 지구상에 신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생명체가 어디 하나라도 있을까마는 생명이 주어지는 그 순간만큼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뚱아리 하나만 달랑 갖고 이 세상에 오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복불복의 그 순간을 두고 신은 공평하다 말할 수 있는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무대의 막이 내려지듯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일찍이 하이네도 ‘죽음이야말로 유일한 평등’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 그 어떤 권력을 가진 자라 해도, 아무리 아름답거나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늙지 않고 죽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관해서는 대부분 두 눈을 가린 채로 살아간다.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도 죽음은 기어이 밀쳐낸다. 시간이 흘러 인생의 마지막 카드가 던져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두 눈을 가린 붕대를 벗겨내고 찬찬히 과거와 현재를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때는 이미 늦는다." (p.142)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의 삶은 오롯이 본인을 위한 삶이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줄 정도로 이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때는 다르다. 비록 그것은 삶의 연장선에 있기는 하지만 생명의 유한성을 강하게 인지하는 자의 이타적 발현 과정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환자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환자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배려의 과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어느 하나만 잘하는 게 아닌 둘다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한 달 뒤에나 있을 시험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어가며 하나하나 꼼꼼히 준비하지만, 당장 내일 있을지도 모를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는 남의 일처럼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높은 학벌, 좋은 직장,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인생…. 하지만 결국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가슴에 담고 가는 것은 자식이 좋은 대학을 나와 남부럽지 않게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는 단지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나의 아이들에게 나지막이 물어보고 싶다. '나를 엄마로 만나서 진정으로 행복했었니?'" (p.238~p.239)

 

다음달이면 나는 아버지를 가슴에 묻은 지 만으로 일주기를 맞게 된다. 지난 해 이맘때쯤 장례식장을 지키던 그 며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었는데 벽제로 향하던 그날 새벽길은 얼마나 투명하고 맑던지... 그 뜨거웠던 햇살 아래서 나는 당신에 대한 기억들을 무한의 시간 속에 올올이 풀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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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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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의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완화된 표현일 뿐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결단코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 싶다. 처음 만져보는 연장처럼 그의 글은 낯설고 서먹했고, 머릿속 좁은 공간에도 내가 아직 모르는 숨겨진 광장이 있었는지 이해의 영역 밖에서 부끄럼을 타며 한동안 부유했다. 짤막짤막한 글에 이해하고 자시고 할게 뭐 있느냐, 싶겠지만 글이라는 게 본디 남녀의 만남처럼 수줍고 어색한 일인지라 가까워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던가.

 

소설가 본연의 작품을 먼저 읽지 못하고 그가 쓴 산문집부터 읽는다는 게 조금 께름칙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부터 3년 반 동안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 〈손홍규의 로그인〉을 묶은 산문집이라는 이 책에는 당시에 썼던 180여 편의 글 중에서 138편만이 실렸다. 내가 책에서 만난 작가는 성격이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듯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으니 순전히 그의 글에서 받은 첫인상이지만 말이다.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느냐보다 스스로 다짐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어기면서 산다는 사실이 치욕스럽다. 그러나 아직도 지켜야 할 일들이 많다. 그대가 어떤 원칙을 품고 사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대에게만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타인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지키고 살아야 한다. 시련이 없을 때 우아해지기란 퍽 쉽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우아해지기란 쉽지 않다." (p.153)

 

"내 글이 못난 건 창작방법의 한계 때문이거나 부르주아가 아니어서거나 문학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못된 녀석이기 때문이다." (p.195)

 

작가의 글을 한마디로 평할 수는 없겠지만(물론 그래서도 안 될 터이고) 우선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흔히 쓰였으나 지금은 사라진 우리말을 그의 글에서 되살려 쓰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여축없다', '몰강스럽다', '각다분하다', '끄느름하다', '비루먹다', '메지구름' 등의 낱말들이 섬처녀처럼 수줍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에 붙여진 제목 중에는 역설적 표현이 많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드러운 직선', '아름다운 막말', '불온한 희망', 그리고 표제작인 '다정한 편견'도. 사회 현실에 대한 통찰의 글도 여럿 보인다. 물론 글이란 그 시대의 반영이긴 하지만 '순수'라는 글자를 달고 산 뒤편의 호젓한 곳으로 숨어드는 작가들이 차고 넘치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마조히스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곧잘, 우리를 짓밟고 무시하는 자를 통치자로 뽑지 않던가. 그로 인해 고통을 겪으면서도 되풀이하지 않던가.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비극적인 이유는, 이 시대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노동자와 그 식구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도 용산참사의 재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들은 끝내 이 세계가 디스토피아임을 증명할 것이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상상해도 그들은 디스토피아를 안겨줄 것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자들은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진부하게도. 끔찍하게도." (p.83)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에 속한 무리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글은 왜 언제나 정권에 저항하는 불손한 글로 읽히는 것일까, 생각하곤 한다. 불쌍한 자에 대한 연민, 돈 없고 빽 없는 자들의 연대는 왜 항상 그 순순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범죄의 온상으로만 몰고 가는 것일까. 작가가 쓴 매 꼭지마다 결론은 왜 항상 허공의 메아리처럼 속절없이 들리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살아도 살아도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발 한쪽을 과거에 걸친 채 살게 마련이다. 힘들었거나 철없었던 기억은 모두 잊고 과거가 갖는 순기능, 이를테면 순진했다거나 낭만적이었다거나 인정이 넘쳐났었던, 한마디로 그때로 돌아가고픈 어느 시점으로서의 기능만 펼쳐보곤 한다. 부모님의 눈에는 당신들의 결혼 사진에서 촌스러움보다는 그 시절의 젊은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엄혹한 현실에서 희망의 빛이라고는 한 줌 찾을 수 없을 때 과거의 기억은 더욱 선명한 법이다.

 

문학의 가치는 향유하는 독자들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지 문학을 창조하는 자들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작가의 글이 외면받는 이유는 문학을 향유하는 권리도 점차 기득권 세력에게 양도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소설이 태동하던 그 시기부터 마땅히 서민의 권리였던 그것이 그들의 손으로 점차 넘어가는 이유는 비록 그 누구의 강요나 억압이 개입된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살기 어렵다'로 요약되는 현실의 팍팍함이 서민들의 손에서 강탈하듯 빼앗아간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편견을 사랑한다. 아름답고 올바른 편견이 절실한 시절이다.” 외치는 작가의 진심이 문득 외롭다. 그와 어깨를 겯고 한나절 거닐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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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애연가에게 2015년은 어쩌면 최악의 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80%에 이르는 담배값 인상은 개개인에게 적잖은 부담이었을 테니까요. 사실을 말하자면 담배 가격의 인상은 아니었고 담배에 붙은 징벌세 성격의 세금이 올랐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제 소득은 전년도에 비해 그닥 오른 게 없었기에 저는 올해 초부터 담배를 끊었고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저와 함께 금연을 결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 삼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못 피웠던 걸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더 적극적으로 피워대는 모습을 보면 괜히 미안해집니다. 나만 혼자 빠져나간 듯해서 말이지요.

 

아무튼 담배값 인상은 우리 사회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온 게 사실입니다. 궐련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이 가격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전자 담배로 갈아탔는가 하면 지금껏 궐련 담배를 고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조금이라도 담배값을 아껴보려는 심산인지 필터에 불이 붙을 때까지 알뜰하게 피운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두어 모금 빨고 버리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길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현저히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세수 증대를 은근히 기대했던 정부는 요즘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을 걸로 압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을 테니까요.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된 사람들의 심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왕 버린 몸!'이라는 식의 자포자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네덜란드 속담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비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브라질의 해안도시 파라티에서는 매년 진흙축제(Bloco da Lama)가 열린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보령머드축제'처럼 말이지요. 젊은이들이 이 축제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 평소에 느낄 수 없는 해방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왕 버린 몸!' 신나게 놀아나 보자는 심리와 담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이끌려 한모금 빨아보고는 '이왕 버린 몸!' 하면서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겠지요. 요즘 들어 저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비싼 외제차를 잠시의 고민도 없이 덥썩 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저는 그들이 대단한 부자인 줄 알았죠. 그런데 속사정은 그렇지 않더군요. 한계에 도달한 가계 빚을 떠안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왕 버린 몸'의 자포자기 심리가 반영된 까닭이지요. 주말마다 외식이나 캠핑을 즐기면서 말입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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