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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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도둑눈이 조금 내렸다. 기척도 없이. 그렇게 내린 눈은 어느 중년 가장의 머리칼처럼 멀리 보이는 뒷산 풍경을 희끗희끗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어느 중년 가장의 한숨처럼.


요즘 서점가에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인기가 드높다. 도대체 왜?라고 묻는다면 나로서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왜 지금 시점에?라고 질문을 바꾸어 묻는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쇼팽이나 쇼스타코비치라면 모르겠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일정 부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라니. 여러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나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몇 번 만나 이름만 겨우 아는 지인이 한민족이 원래 이렇게 철학적인 민족이었어?라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해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평일의 늦은 밤에. 앞뒤 맥락도 없이.


"세상에 진실한 것이 있을까. 진지하게 마주하고도 상처받지 않을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은 그저 먼지 쌓인 침대와 같아서 인생은 눕기를 바라고, 잠들기를 바라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소원도 없다.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절망도 따지고 보면 찰나에 주어진 통증 같은 것이다."  (p.42)


시류에 편승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를 읽었다. 읽게 되었다거나 읽음에 처해졌다거나 읽어버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원하지도 않았던 책을 비자발적인 동기로 읽게 되었지만 책의 내용은 생각보다 좋았다. 철학자의 저서라고 해서 현학적인 말들로 가득 채워진 것도 아니요,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 본인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글이 지극히 절망적이거나 딱딱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보이는 위트와 유머는 왠지 모를 미소가 번지게 했다.


"젊은이들이여, 돈과 명예에 한 번뿐인 삶을 팔지 말라. 돈과 명예는 부도덕한 자들과 동행하지 않는 한 그대들을 반기지 않는다. 물질과 직위는 사람의 성품을 얕은 여울로 인도하는 사막의 물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p.160)


글을 마무리 짓기 전에 앞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나 나름의 답변을 해야 할 시점이 된 듯하다. 그렇다고 책을 통하여 완벽한 답변을 준비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쥐뿔도 몰랐던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조금이나마 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나의 대답을 제시하는 까닭은 우리들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속내를 쇼펜하우어가 속 시원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친한 친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마음속 생각을 쇼펜하우어는 족집게처럼 쏙쏙 뽑아내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체면 때문에 혹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으로 짐짓 안 그런 척 허세를 부렸던 우리로서는 쇼펜하우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저 아프면서도 반가운 것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한 자들,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 천국이 저희 것인 양 함부로 면죄부와 구원을 판매하는 목사들마저도 나이가 들면 그들이 누리는 권위와 명성보다 나이를 먹고 몸에서 빠져나간 혈기와 기운을 그리워한다. 천국이 가까워졌음에도 밤마다 욕정에 시달려 침상을 뒹굴던 수십 년 전의 보잘것없었던 자신을 그리워한다."  (p.55~p.56)


새해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많은 이들이 계획을 세웠을 테고, 어떤 이는 그 계획에 따라 지금까지 착실히 실천에 옮겼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벌써 작심삼일을 실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의 희망고문이자 계획인 부자 되기 프로젝트를 세운 이들은 어쩌면 쇼펜하우어로 인해 그 계획을 모두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허무맹랑하고 무모한 계획을 실천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느니 오히려 실현 가능하고 즐거운 일에 매진하는 게 백 번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 그것이 어쩌면 지하에 계신 '쇼' 선생을 기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썼던 폴 발레리의 시구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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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로 감싸였던 도시의 표피를 한 겹 도려낸 듯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도시 상공에 걸렸습니다. 소한 추위는 꿔서라도 한다는데 그것도 옛말인 듯 겨울 햇살을 받은 대기는 온통 따사롭기만 합니다. 나는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손에 들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휴대폰도 자가용도 없던 먼 옛날의 기억이 다가옵니다. 외출을 할라치면 언제나 한두 권의 책이 필수품처럼 여겨지곤 했던 그닥 멀지 않았던 과거. 그 시절 학교 앞 서점에서 인기를 끌었던 책은 손에 쏙 들어가는 포켓북과 두께가 얇은 시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쩌면 책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가며 구입하던 한두 권의 책값도 지갑이 얇은 학생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천상병 시인의 시집을 생일 선물로 받았던 기억이 아슴아슴 떠오릅니다.


캐치볼

                    안희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

불타는 공이었다


되돌려 보내려면 마음의 출처를 알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투수는 보이지 않고


언제부터 내 손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을까

벗을 수 없어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알 수 없겠지 이 모든 순서와 이유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왔을 것이다

불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불행을 불러내는 주술사처럼

뭐든 미리 불태우려고

미리 아프려고


내 마음 던진 공을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그래도 가끔은

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불타는 공이 날아왔다는 것은

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글러브를 단단히 조인다


잔디밭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감상합니다. 저마다의 표정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꼬닥꼬닥 마른 나뭇잎이 비행을 하듯 날아와 내 발치에 떨어집니다. 쏟아지는 졸음에 가져갔던 시집은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가방에 넣고 말았습니다. 동글동글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비탈을 굴러 저 멀리 달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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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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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술을 못 마신다. 불행하게도 내 몸에는 알코올을 분해할  때 생성되는 아세트 알데하이드를 제거하는 효소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타인에 비해 대단히 적다는 것이다. 내가 술을 해독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건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속이 거북해서 토하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보고 선배들은 자꾸 마시다 보면 술도 늘고 그런 증상도 사라질 거라며 위로와 함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러나 선배들의 진심 어린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의 체질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면서 어쩌다 참석한 술자리에선 언제나 술에 취한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고단한 일과를 보내곤 한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차라리 내가 마시고 취하는 게 낫겠다.'는 푸념을 넋두리처럼 내뱉으면서 말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정지아의 에세이집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나와 같은 특이 체질의 사람들에겐 그저 대리만족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술에 얽힌 작가의 잡다한 경험을 풀어놓은 이 책이 그닥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너스레와 솔직함에 있지 않을까 싶다. 틀에 박힌 유교적 사고방식의 굴레에서 성장했을 성싶은 그녀가 '여자'라는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과의 음주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남녀평등을 신념으로 삼았던 빨치산 아버지를 둔 덕분이 아니었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엄마가 아니라 아빠에게 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엄마는 남녀평등을 원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지만, 당신 딸을 대하는 마음은 여느 엄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남자애들과 밤을 새워 논다는 걸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반면 아빠는 진정한 평등주의자였다!"  (p.22)


소문난 애주가이자 자칭 시티걸이었음을 강조하는 작가는 해가 짧은 구례의 산간 마을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두 마리의 개, 그리고 100세에 가까운 어머니와 함께 산다고 했다.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을 듯한 풍경이지만 그녀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리산의 눈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술을 부르고, 혼자 취할 수 없는 기나긴 밤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술 한 잔에 녹아든 옛 시절의 추억과 사람들. 고향에서, 수배길에서, 강단에서, 먼 이국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숟가락으로 떠 계란에 붇던, 큰아버지의 그 조심스런 손길이 그립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렇게 속절없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심사 복잡한 날이면 고립된 우주 같던 큰아버지의 방이 떠오르고, 큰아버지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얹히고, 위스키가 아닌 소주가 그리워진다. 위스키로는 달래지지 않는, 소주로밖에는 달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우리 민족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p.106)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술보다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끌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깨트릴 수 없는 벽에 잔금을 내고 종국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서로가 확인할 수 있는, 마법과 같은 음료가 술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찬란한 젊음의 시절이 있기야 했겠지. 그때의 나는 몸 따위 돌아보지 않았다. 몸 따위, 하찮았다. 정신은 고결한 것, 육체는 하찮은 것.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모든 행위를 혐오했다. 혐오라니. 몸이 있어 존재하는 것인데. 젊은 나는 참으로 하찮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하찮게 천대해왔던 불쌍한 나의 몸에게 블루를, 귀하디귀한 블루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아름다운 육체가, 찬란한 젊음이 펼쳐보이는 어느 여름날의 천국에서."  (p.262~p.263)


누군가에게 술은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하는 위로와 희망의 손길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하는 마법의 양탄자가 되기도 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다리를 뻗고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술이 우리에게 주는 크나큰 혜택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늦둥이 딸로 태어나 독재정권으로부터 늘 감시의 대상이 되었던 작가가 술을 매개로 좋은 사람들과의 연대를 꿈꿀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터, 그에 얽힌 질펀한 이야기들이 이보다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갑진년 새해 첫 주가 포근한 날씨 속에서의 진득한 미세먼지처럼 몽롱하게 흩어지고 있다.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내게 한잔 하라고 권하는 듯 말이다. 나를 위로하는 누군가에게 건배를 청하고 싶은 밤. 그렇게 2024년의 첫 주가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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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구나 한번쯤 꼴통보수를 꿈꾸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국적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도 한 번 꼴통보수나 돼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자신이 꼴통보수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꼴통보수가 되었을 때의 혜택이 너무도 크고 달콤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예컨대 전직 대통령의 사저 주변에서 밤새 꽹과리를 치며 시끄럽게 하는 것은 물론 흉기를 들고 위협적인 행동을 일삼아도 처벌을 받기는커녕 잘했다며 그의 누나를 대통령 홍보수석실에 특별 채용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욕설을 일삼는 목사도 언론이나 정계의 주요 인사들이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떠받드는 등 대한민국에서의 꼴통보수에 대한 대우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엄연한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분쟁지역이라며 일본 극우의 편에 섰던 자도 잘했다며 국방부 장관에 기용하고,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비하하고 막말을 일삼았던 자도 여당의 비대위원으로 기용하는 등 대한민국에서는 꼴통보수의 전력이 출세를 향한 징검다리이자 훌륭한 이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언론도 그들의 비상식적 행동에 대해 비판하거나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 그들이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꼴통보수가 최고권력자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를 비판했던 언론은 살아남기 힘들어짐은 물론 주변의 지인들까지 고초를 겪었던 일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서 넘치도록 많이 보아왔고 지금도 목도하고 있다.


내 주변에도 그런 혜택을 바라고 꼴통보수로 전향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둔 까닭에 취업 등 다방면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지인 중 한 사람도 지금은 누구보다도 철저한 꼴통보수가 되어 출세를 꾀하고 있다. 죄도 없는 자신의 아버지를 무참히 살해한 대한민국의 공권력에 대해 적개심을 품을 만한데 그는 오히려 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내 인생은 또 내 인생 아니겠느냐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야당의 당대표를 살해하려 했던 인물도 어쩌면 꼴통보수로서의 이력을 쟁취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도 우리나라의 공권력과 언론이 잘 무마해 줄 것이라는 믿음과 나중에 그 이력을 발판으로 대한민국의 권력층으로 진출할 수도 있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꼴통보수가 되기를 꿈꾼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그 혜택이 너무도 달콤하고 유혹적이어서. 차마 뿌리칠 수 없는 그 유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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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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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감정을 등급별로 명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겠지만, 소설가 최은영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등급에 자신의 감정을 위치한 채 글을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최은영 작가가 표현하는 감정은 대체로 슬픔에 국한된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의 슬픔, 타인이 느끼는 날것 그대로의 슬픔을 자신의 가슴에 넘치도록 가득 담아 자신이 쓰고자 하는 한 문장 한 문장의 소설에 고스란히 우려내는 것을 볼 때마다 내게는 없는 그 능력이 내심 부럽기도 하고, 이따금 질투를 쏟아낼 때도 있지만 작가의 재능을 아끼는 한 사람의 애독자로서 무엇보다 작가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소설을 쓰는 얼마 간의 시간 동안 그와 같이 깊은 슬픔에 젖어 지낸다는 건 개인의 건강에는 아무래도 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전달하는 낱낱의 감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건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그 모습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p.44~p.45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에서)


최근에 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역시 우리의 감정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한다. 은행원이었던 '희원'이 뒤늦게 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한 후 만났던 시간강사와의 관계와 헤어짐을 되돌아보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교지 편집부 활동을 함께 했던 세 사람의 경험과 한계를 그린 '몫', 비정규직 문제 속에서 동갑내기 인턴 다희와 카풀을 하면서 전혀 다른 대화를 하는 지수의 관계를 다룬 '일 년',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부모 역할을 해온 언니와 그 언니가  결혼을 한 후 형부로부터 무시당하는 현실의 모멸감에 맞서려는 ‘나’의 모습을 그린 '답신', 텃밭을 배경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여동생 이야기를 담은 '파종', 작고한 이모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온 조카의 관계를 그린 '이모에게' 어릴 적 식모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기남이 결혼하여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의 작은 실수와 손자인 마이클의 위로를 통해 자신의 기억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 중식당의 냄새, 식기의 모양, 음식의 종류, 노인 옆에 있던 젊은 남자,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이 입었던 옷과 큰언니라는 사람의 표정까지도.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p.306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중에서)


감정의 소모는 체력의 소모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몸속 에너지를 허비함은 물론 사람을 지치게 한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처럼 최은영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각각의 인물에 빠져들곤 한다.


"하지만 모두 다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었다. 죽어서라도, 다시 태어나서라도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단순한 진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으며, 그가 자신에게 준 마음을 갚을 방법 같은 건 없다는 진실이었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지울 수 없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남으리라는 진실이었다."  (p.199 '파종' 중에서)


새해가 시작된 후의 며칠은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남은 날들이 많아서 하루를 설렁설렁 보내는 탓도 있을 테고, 1년의 아득한 날들을 계획하다 보면 사는 게 참으로 부질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밀린 숙제를 하듯 분초를 다투며 바삐 움직이던 12월의 농밀한 시간에 비하면 1월은 얼마나 성근 시간들로 채워지는가. 최은영의 소설집을 읽다 보면 가슴 한켠에 '쿵' 하고 무거운 바윗덩이가 얹히는 느낌이 든다. 가벼워지기 쉬운 연초의 내 발걸음에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채우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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