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지음, 황규백 그림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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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다>. 책의 제목 치고는 너무나 평범하고 밋밋하다. 평범하다 못해 촌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런 촌스럽고 밋밋한 제목도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저자가 살아온 길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와 같은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없을 듯 여겨지기도 한다. 저자가 걸어온 길이 그대로 책의 제목으로 걸린 듯 어디 하나 어색한 구석이 없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괴테 할머니'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저자 전영애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인생을 배우는, '인생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저자였기에 <인생을 배우다>라는 책의 제목은 더없이 잘 어울리는 듯 여겨진다.


"남의 삶을 세세히 알 수야 없다. 그러므로 남들은 대체로 편안하거나 그저 그만한 것 같고 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앞을 스쳐가는 삶의 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p.139)


한국을 대표하는 독문학자이자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동양 여성 연구자 최초로 '괴테 금메달'을 받은 명실공히 괴테 권위자이기도 한 전영애 서울대 교수가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마음에 떠오르는 단상과 후배들에게 전하고픈 삶의 지혜를 담아 책으로 펴낸 <인생을 배우다>는 저자의 푸근한 인상처럼, 자신의 삶을 통하여 둥글게 마모된 마음의 원형이 여유와 기품으로 묻어난다. 삶 자체로 기쁨이고 선물인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을 전하고 싶은 욕심, 그것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였다고 밝히는 저자는 자신이 만났던 아름다운 인연들을 소개하며 우리처럼 각박한 현대인들이 이따금 잊고 있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뿐만 아니라 프란츠 카프카, 니체, 쿤체 시인 등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문학세계가 황규백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담겨 있어, 책을 읽는 즐거움과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마모되지 않고 이런 삶의 이치를 생각하는 순간도 좀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끔씩, 잠시나마 그 사슬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젊은 날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있어야, 그런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세상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76)


저자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여백서원을 짓고 가꾸었다고 말한다. '혼자 힘으로, 외로움의 힘으로 만든 이 터에서 여러 사람이 쉬고 배우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는 저자와 같은 참어른이 있는가 하면, 159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숨진 이태원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자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끄러운 어른들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정치인들을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지 않는 한 우리의 젊은이들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병들고 마모될 게 뻔한 일, 기성세대의 책임이란 바로 그런 것, 자본의 사슬로부터 우리 젊은이들을 구출하여 젊음의 태동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닐까. 달리 더 무엇을 해줄 것인가.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친구들의 소중함을 좀 더 가르쳐야 할 것 같다. 내가 남을,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나도 자동으로 귀해지는 이 자명한 이치를 마음에 새겨주어야 할 것 같다. 능률화가 가속화되는 미래에는 인구의 8할 정도는 불필요하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고, 빈부격차의 심화도 심각하게 체감된다. 우리가 파멸로 가는 공룡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p.164)


현 정부 들어 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이 가속적으로 늘고 있다. 그에 따라 전에는 없거나 찾기 어려웠던 증오 범죄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야당 대표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갈고 목을 찌르는 연습을 해온 정신 나간 자도 있었고, 여당의 여성 국회의원에게 상해를 입힌 미성년자도 있었다. 이런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의 정치인들은 그 심각성도 인지하지 못한 채 증오심만 부추기고 있다. 폭주하는 증오 기관차의 끝을 보자는 것. 우리는 그 결말을 향해 오늘도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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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 고명재 산문집
고명재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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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신체의 변화 중 하나는 이따금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푸른 멍 자국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과 부딪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고 보면 보란 듯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아픈 것도 아니요,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중병도 아닌데 병원을 가거나 누군가에게 내보이며 엄살을 떨 만한 거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어디서 무엇에 부딪혔을지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아마도 젊은 시절에 비해 피부도 얇아지고 외부 충격에 대한 감각도 둔해진 탓이리라.


우리 신체의 외부 충격에 대한 반응이 감각이라면 우리 영혼의 외피에 가해지는 충격에 대한 반응은 감정이 아닐까 싶다. 신체에 가해지는 외부의 충격, 이를테면 부딪히거나 데거나 추위에 노출되거나 간지럽힘을 당하는 등의 여러 충격에 대해 우리는 각각 다른 형태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외부로부터 듣는 소식, 예컨대 슬프거나 기쁘거나 놀랍거나 화나는 소식 등에 대해 우리 영혼은 각각에 맞는 감정을 자신의 신체를 통해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둔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을 굳이 노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예방 차원이 아닐까 싶다. 둔해진 감각을 통해 죽음의 고통을 약화시키고 둔감해진 감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의 고통을 조금쯤 덜어내는 게 아닐까.


"이처럼 극도로 아름답고 순정한 것은 우리의 기관器官을 철저하게 파괴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분산시켰다. 눈眼으로 견딜 수 없다면 아름다움을 나누자. 그 후로 그것이 밀주처럼 태어났다. 그것은 눈 쌓이는 소리보다 고요한데 귓속에서는 화산보다 크게 울리고 그것은 꽃 하나 없이 백리를 넘어 사람들 마음에 맹렬하고 은은한 향기를 찌른다. 그렇게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음악이 생겼다. 마음을 열고 깊이 맡는 향기가 생겼다. 지금도 우리는 그 노래를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시라고 한다."  (p.134)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수시로 점검하고 예민하게 유지해야 한다. 특히 압축된 언어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시인은 하시라도 젊은 감각과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읽는 내내 나는 신체의 감각과 영혼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 글은 어쩌면 리뷰라기보다 리뷰를 가장한 나의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키워준 비구니 스님을 떠나보낸 후의 슬픔과 그리움이 잘 벼린 칼날처럼 독자들의 가슴을 찌르는,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갈무리하는 시인의 절제된 문장들이 감각과 감정이 날로 둔해지는 나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을 강에 뿌렸다. 아무리 재를 흘려도 강은 맑게 흐르고 그 강변을 걸으면 당신이 되살아난다. 얼굴에 검댕이 묻고 숯이 번진다. 그러나 이제 숯을 씻어내지는 않는다 열과 빛을 간직한 채 살기로 했다. 서서히 땅거미 내리고 소리가 잠기고 저녁이 오면 강물에 숯이 풀리고 그렇게 모든 강물은 탄천이 되어 우리 속을 세차게 흐르고 있다."  (p.248)


나이가 든다는 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생긴 정강이의 멍을 발견하는 것처럼 영혼의 외피에 생긴 멍울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뒤늦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시가 되고, 음악이 되고, 그림이 되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가슴속 멍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올 것이 있다. 비와 눈은 오는 것. 기다리는 것. 꿈의 속성은 비와 눈처럼 녹는다는 것. 비와 눈과 사람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라지며 강하게 남아 있는 것. 남아서 쓰는 것. 가슴을 쏟는 것. 열고 사는 것.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것. 그렇게 행과 행 사이를 날아가는 것."  (p.253)


꽤나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리뷰를(리뷰를 가장한 나의 생각을) 쓰자니 문장은 얽히고 생각은 뒤섞인다. 늦잠을 자고 만 휴일의 게으름이 문장 곳곳을 파고들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의 리뷰를 남겨야 하겠다고 결심했던 건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시인의 감각이 몹시도 탐나서, 둔감해지는 나의 감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아마도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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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 - 의류 수출에서 마천루까지 가는 곳마다 1등 기업을 만드는 글로벌세아 김웅기 회장의 도전경영
김웅기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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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의 회고록이나 성공담을 읽거나 들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럽다거나 나도 그의 삶의 태도를 따라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이 그가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었을까 하는 조금은 짠한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타인의 성공 노하우나 경험담을 듣는 자리에서도 나의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대개 자리를 배정받기 위해 광클릭을 해야 하거나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통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사로부터 그만의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배울 생각은 않고 저 사람은 저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다소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의 태도에 혀를 끌끌 차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런 강연이나 좌담회는 대체로 강의 후에 강사와 참석자들 간의 질의응답이나 참석자들의 느낌이나 각오를 듣는 게 일반적인지라 내가 엉뚱하게도 강사님은 지금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드셨느냐 하는 다소 안 됐다는 느낌의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참석자들 대부분으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게 마련이었다.


"세상을 탐험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껴본 사람만이 기회와 가치를 알아보고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본 만큼, 아는 만큼 거둔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난 세상에는 온통 보물이 가득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낯선 곳에 데려다 놓았다. 거기서 얻은 사람과 기회, 성취가 안전한 곳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이겼다.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모험가의 편이어서 기회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쉼 없이 모험 중인 사람에게만 온다. 물론 보물을 알아보는 안목과 인내심, 먼저 달려가는 실행력과 성실함은 필수다."  (p.7~p.8)


글로벌세아 그룹 김웅기 회장의 사업 도전기를 담은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를 다 읽은 나의 소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35세의 직장인이었던 저자가 자본금 500만 원과 직원 2명으로 의류 수출 회사를 설립하여 37년이 지난 지금 자산과 연매출 모두 6조 원을 상회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경과 도전의 기록을 담은 이 책은 여타 기업의 창업 성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양산업으로 분류되던  의류, 섬유를 기반으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어 세아상역이라는 작은 회사로부터 나산(인디에프), 쌍용건설, 태림, 발맥스기술, 세아STX엔테크, 전주페이퍼까지 품으며 2023년 대기업 집단(공시대상 기업집단)에 포함되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건 순전히 김웅기 회장 본인의 열정과 노력 덕분이라 하겠다.


"어떻든 기업은 정치 앞에서 무기력하다. 세아상역은 경협보험에 가입하여 투자비 100억 중 70억은 보험금으로 회수했다. 그러나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영세한 중소기업들은 막대한 투자손실이 발생했다. 북측 근로자들은 직장도 잃고 기술을 배울 기회를 잃었다. 개성공단 폐쇄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중단되어 경제 개발이나 발전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정치가들이 발 벗고 나서서 투자를 유치하고 나라를 혁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나라도 많았다."  (P.187)


누구나 다 열정과 노력만으로 제2의 김웅기, 제3의 김웅기가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될 리도 없고 말이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가 이룩한 결과만 부러워할 뿐 그 과정의 고단함을 간과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삶에서는 언제나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아무것도 아닌 양 흘려보내곤 한다. 예컨대 1억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내 가족의 생일을 놓칠 수도 있고, 부모님과의 여행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다만 그 사람의 가치관의 문제일 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성취라는 건 결국 순간순간 자신이 고른 선택의 총합일 뿐이다. 내가 누군가의 성취를 딱히 부러워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웃풋(output)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풋(input)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취는 그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 즉 그의 희생에 대한 당연한 성과인 것이다.


"바람개비에게 바람이 없는 상황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바람개비를 돌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서라도 돌리고야 만다. 인간의 의지는 새로운 것을 만들고, 놀라운 결과를 보상으로 돌려받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천수답(天水畓) 경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주 말한다."  (P.328)


책의 저자인 김웅기 회장도 이제 70대가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많은 성취를 이룬 행복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사업가로서 그의 시간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그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볼 때 자신이 이룬 경제적 성과보다는 가난한 나라 아이티에 세운 세아학교에 더 많은 자부심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김웅기 회장이 이룬 성과와 그의 철학을 존중한다. 그리고 피가 끓는 젊은 시절의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면 한 번쯤 그의 열정을 닮아보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는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야속하게도 신은 우리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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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매끄럽고 냉기가 흐르는, 마치 공들여 닦은 투명한 유리창에 감도는 듯한 푸른빛입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문지르면 뽀득뽀득 소리가 날 것만 같습니다. 바람이 잦아든 바깥날씨는 제법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지 지나는 행인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진 듯 환합니다. 한동안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든 것만으로도 어깨에 얹힌 짐의 무게가 조금쯤 가벼워진 듯 느껴지나 봅니다. 서민의 삶이란 이렇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국격을 높이기 위한 대통령 부인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23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00달러(약 300만 원) 짜리 디올 핸드백, 한국 여당을 뒤흔들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 목사가 몰래 촬영한 영상에 김건희 여사가 이를 받는 모습이 담겨 여당 측을 뒤흔들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WSJ는 “가방 논란은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 속에 지지율이 하락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또 다른 정치적 문제를 안겨준다”고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건희 여사에 대한 보도는 월스트리트저널(WSJ)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로이터통신 역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논란을 다뤘습니다. 로이터통신은 24일 “‘디올백 스캔들’로 인해 선거를 앞두고 있는 윤석열 정부·여당이 혼란에 빠졌다”며 “오는 4월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되찾으려는 시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논란에 휩싸였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어 “이는 정치적 폭탄”이라면서 “김건희 리스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게다가 로이터통신은 김 여사가 과거 주가조작 의혹에 휩싸였으며, 야당에서 이에 관한 특검법이 추진됐다는 사실도 설명하면서 2021년엔 박사 학위와 관련해 허위 및 표절 논란으로 김 여사가 공개 사과를 했다고도 전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기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언급과 함께 “김경율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사치로 악명 높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김 여사를 비유하면서 정부와 여당 사이에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소식과 이 때문에 윤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잠시 분열을 드러냈다는 소식도 기사로 실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두 언론에 김건희 여사의 활약이 대대적으로 보도된다는 건 여당인 국민의힘이나 대통령에게 희소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례가 드물게 대한민국의 영부인이 세계적 인물로 부각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인 이멜다 여사의 과거 명성(?)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겠지만 지금 추세를 꾸준히 유지한다면 어쩌면 대통령의 퇴임 이후에는 이멜다 여사를 능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김건희 여사의 건강과 건투를 빕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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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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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너그러울 수 있을까요? 관용과 포용의 한계는 과연 그 끝이 어디일까요? 나의 평가가 조금 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 각자가 지닌 너그러움의 한계는 스스로에게 오는 물질적, 정신적 피해가 전혀 없는 선에서만 가능하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예컨대 성소수자에 대한 관대함은 그들로 인해 나의 종교생활에 조금의 피해도 미치지 않을 때, 천안함 생존 장병이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배려는 나의 정치 성향과 내가 낸 세금에 눈곱만큼의 피해도 입히지 않는 선에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희생과 아픔은 폭력과 공권력의 대치라는 색안경이 벗겨졌을 때 등 대한민국 국민 각자가 생각하는 한계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피해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종교가 달라서, 정치적 성향이 같지 않아서, 추구하는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직장 내에서 직급이 다르거나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 등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받는 누군가에 대한 고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적어도 주류로부터 배제된 비주류에 속하거나 그들과 함께 걸을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까닭입니다. 그들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공동체 밖으로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김승섭 교수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지금 현재 고통을 받고 있거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정한 인식과 매몰찬 태도 말입니다.


"혐오는 쉽습니다. 가장 약하고, 아픈 당사자들을 욕하면 되니까요. 어떤 이들은 HIV 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 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라고 함부로 손가락질합니다.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혐오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 증가시키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p.188)


책에서 저자는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서를 쓰거나 법정 증언을 했던 경험을 소개하면서 상대측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고, 우아한 얼굴로 합리적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종 승소하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우리의 현실이 이럴진대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할 수 있는 '합지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하에 차별금지법을 '나중에' 처리할 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를 뒤집을 만한 합리적 근거는 무엇일지 묻고 있습니다. 영국의 BBC는 한국,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이와 비슷한 법률이 존재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차별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두 국가 중 한 나라가 된 셈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삶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불평등에 대한 연구이다. 사회역학은 권력과 자본에서 배제된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측정하고, 부조리한 환경이 약자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역학 연구는 종종 사회적 약자 집단이 기득권 혹은 전체 인구 집단에 비해서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 나쁜지를 확인한다."  (p.168)


나는 김승섭 교수의 저작 대부분을 읽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독서의 재미나 지적 허영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과거에 비해 해가 갈수록 이웃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폭이 줄어들고 있지나 않나 하는 자각과 반성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 이웃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반려견 반려묘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감정적인 접근이나 감상적인 인식만으로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정확한 근거와 합리적인 주장을 통해 의견이 다른 사회 구성원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일지도 모릅니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  (p.161)


“모든 참사나 재난에서도 각 인간은 고유하거든요. 개인마다 고유한 관계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욕구와 고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공통의 사건을 겪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여길 때가 많아요.”  (p.300)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척이나 소외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주장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나 단순한 상식의 차원에서도 나와 의견이 다른 이는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혐오합니다. 사회 통합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앞장서서 도모해야 할 종교와 정치의 기능이 상실된 까닭입니다. 차별과 배제를 통해 강력한 지지자들을 획득하려는 정치 모사꾼들과 이를 정의인 양 보도하는 사이비 언론으로 인해 차별과 혐오는 더욱더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조리를 그저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사회가 유지되고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이 아닌, 우리 곁을 지키는 '인간'의 체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김승섭 교수의 저작을 읽는 것도 36.5℃의 진실을 믿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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