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와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언론에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와 같은 말은 다수의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우리나라 언론의 기형적 성장 과정에 있다. 정권에 기생하여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정권의 눈치를 보는 수준을 넘어 정권을 찬양하는 수준에 이른 언론만이 정권으로부터 여러 혜택을 보며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저변에는 언론사의 지배구조의 문제에 있다. 외형적으로 언론사의 지배구조는 사적 지배구조와 공적 지배구조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개인이 주식을 보유하는 주식회사는 사적 지배구조이고 공공이 주식을 보유하거나 공공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은 공적 지배구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KBS와 뉴스타파를 제외한 모든 언론사는 모두 예외 없이 주식회사이다. 그러나 한겨레 신문처럼 국민주 형태로 공모된 소액주주가 72%의 지분을 소유한 언론사에 있어 사유화 문제가 직접 야기되지는 않는다. 공적 재원인 시청료가 수익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KBS가 공적 지배구조 형태를 띠면서도 공공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회사의 대표를 선임하는 이사회 구성이 정치권력에 의해 이루어짐에 따라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이사회 구성이 바뀌고, 그에 따라 대표의 성향도 바뀌며, 자동으로 보도 운영자들의 구성도 180도로 바뀌는 기형적인 체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언론사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적 기관이 아니라 자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본주의 선봉 기업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정부를 찬양하는 어떤 기사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그럴 준비가 늘 갖추어져 있다. 비록 국민들에게 눈총을 받거나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다시 일어난다면 우리나라 언론의 90% 이상이 식민 지배를 찬양하는 기사를 연일 쏟아낼 것이라고 본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외모를 추켜세우는 기사 축에도 속하지 않는 기사를 연일 쏟아내거나 논리에도 맞지 않는 대통령의 언사를 어떻게든 감춰주려는 야바위 기사들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가 망조에 들었구나, 하는 한탄을 아니할 수 없다.


오늘만 보더라도 그렇다.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상생의 금융, 기회의 사다리 확대' 주제로 대통령의 '국민과 함께 하는 민생 토론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공매도 금지 가 일시적인 총선용 조치가 아니며 확실한 부작용 차단 조치가 구축되지 않으면 (6월까지 공매도를 금지하기로 했지만 그 이후에도) 다시 재개할 뜻이 우리 정부는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주가 지수는 큰 폭으로 하락하여 '블랙 웬즈데이'의 오명을 떠안았다.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라고 자처하던 대통령이 경제 성장의 뒷배가 되기는커녕 경제 악화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셈이다. 무슨 말만 하면 반대의 성과를 내는 것이다. 과학 발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R&D 예산을 깎고, 요양 보호를 강조하면 그에 대한 혜택은 대폭 줄어드는 식이다. 그럼에도 조, 중, 동을 비롯한 언론사 대부분이 정부나 대통령을 찬양하는 기사로 연일 도배를 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에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든 것이다. 날씨가 궂다. 다들 감기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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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후 네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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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은 이따금 현실에선 맞닥뜨릴 수 없는 가슴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진행이나 결말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럴 때는 정말이지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화풀이를 하여 속에 있는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작가는 답답한 독자들의 마음에는 영 관심이 없다는 둥 풀어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답답한 것은 오직 독자의 몫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기껏 읽던 책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내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진퇴양난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치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이야기는 은퇴한 노부부가 꿈에 그리던 자신들만의 집을 갖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혼잡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호젓한 시골 생활을 즐기며 행복한 노후를 보낼 생각에 마냥 들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한 집에서 가까운 단 하나뿐인 이웃인 팔라메드 베르나르댕 씨가 방문한다. 의사 출신이라는 그의 방문을 부부는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나 그 이웃은 첫 방문 이후 매일 같은 시각에 찾아와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안락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는 이제 불청객의 수준을 넘어 부부의 평화와 안식을 깨트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세월이 느리게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온 세상 사람들이 세월이 빨리 간다고 떠들어 댄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해 1월만큼 그 말이 틀렸던 적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에는 각 시간대별로 독특한 리듬이 있었다. 저녁나절은 길고 안온했고, 아침나절은 짧고 희망에 넘쳤다. 오후의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통이 시시각각 심해져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4시가 되면 시간은 진창 속에 처박히는 것이었다."  (p.85~p.86)


부부는 이제 불청객으로 변한 베르나르댕 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별별 수단을 다 강구한다. 베르나르댕 씨가 올 시간에 맞춰 집을 비운 채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베르나르댕 씨가 듣건 말건 지루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어 머무르는 시간이 고통스럽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저녁 식사에 베르나르댕 씨 부부를 함께 초대하기도 하고, 자신이 가르쳤던 옛 제자의 방문을 흔쾌히 허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다. 베르나르댕 씨를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자각과 함께 자존감의 하락이 몰려왔다.


"나는 일개 시골 고등학교 교사로 40년 동안 세상이 경원하는 사어(死語)를 가르쳤고, 찬란한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아내에게 평범한 즐거움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에서 내가 얻어 낸 자그마한 이점, 다시 말해서 재능 있는 학생의 진심 어린 경탄의 감정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그 젊은 처녀의 눈빛에서 나를 가엾은 늙은이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읽었던 것이다."  (p.141)


주인공은 결국 다시는 방문하지 말아 달라는 경고를 베르나르댕 씨에게 하게 되지만 소심한 성격의 주인공 역시 그날 이후 이유도 알 수 없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웃집 남자의 자살 시도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그를 구해 낸다. 공포의 대상이자 미움의 대상이었던 이웃집 남자의 자살을 못 본 척 넘길 수도 있었는데 그를 구해 준 의미를 주인공 본인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질문은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대되는데...


"오늘은 눈이 내린다 1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그날처럼. 나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셰익스피어는 묻고 있다. 그 이상 위대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달 전 여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쳐 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p.217)


내 주변에도 은퇴 후 전원생활을 즐기겠노라는 선언과 함께 시골에 집을 짓고 귀촌을 했던 지인들이 몇몇 있다. 그러나 그들 중 90% 이상의 사람들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도시로 복귀하고 말았다.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복귀를 단행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이야 알 수 없겠지만, 시골 원주민들과의 갈등이나 평생 길들여진 도시 생활의 패턴을 버리지 못한 게 주된 이유 중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공포의 대상이거나 기피하고픈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만남의 횟수나 물리적 근접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다. 결국 우리는 매일 만나고는 있지만 상상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살인을 꾀하는 어떤 대상과 섞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의 주인공 에밀과 베르나르댕 씨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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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24년도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보자


소맥 한 잔이 생각나는 화창한 주말입니다. 리더 멧돼지를 꿈도 꾸지 않았던 뒷골목 시절의 나는 이런 날이면 으레 나를 따르는 똘마니들 몇몇과 함께 서울의 근교로 나들이를 나가곤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자리에는 언제나 술과 젊고 예쁜 암컷 멧돼지들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자면 뒷골목의 신참 똘마니들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꽤나 큰 비용이 들게 마련이지만 우리들 월급이 축나기는커녕 술에 떡이 되어 돌아오는 우리들 각자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몇 달치 월급보다 많은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곤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꿈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시절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곤 합니다.


그 시절 나와 가깝게 지내던 뒷골목 똘마니들을 제외하면 많은 멧돼지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는 몇 가지 편견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내가 평상시에 말이 없고 과묵할 것이라는 편견입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조잘조잘 말이 많았던 탓에 나를 아끼는 이웃의 어른들이나 부모님으로부터 '덩칫값도 못 하는 놈'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덩치에 걸맞게 말을 줄이라는 뜻이었지요. 두 번째 편견은 내가 술이 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뒷골목 시절의 과거에는 약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게으르고 운동을 싫어하는 탓에 주야장천 술만 먹고 체중 관리를 등한시했던 나는 이제 소맥 몇 잔만 마셔도 필름이 끊기곤 합니다. 또 하나의 편견은 내가 자식이 없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암컷 멧돼지 보기를 돌 보듯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나는 젊고 예쁜 멧돼지만 보면 마음이 동하곤 합니다. 저질 체력이라서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말이 많았던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된 뒤에도 여러 구설수에 올랐던 전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법에도 맞지 않는 나의 어벙벙한 말이 비난을 자초한 측면이 있지만 다년간의 음주로 인한 알코올성 치매를 앓고 있는 것이 어휘 선택에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치매라는 병이 과거의 기억은 오히려 또렷한데 최근에 있었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멧돼지들이 그 뜻을 알기 어렵다고 했던 몇몇 문장을 들어 보자면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레귤레이션이다',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날리면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등입니다. 내가 한 말이지만 나로서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024년 갑진년도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보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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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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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다만 보는 이의 시각이나 관점의 차이일 뿐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에 대해 꽤나 기특한 마음이 들었고, 삶의 진실을 향해 조금쯤 거리를 좁힌 듯하여 뿌듯해했던 것이다. 다른 이의 칭찬이 없다 해도 말이다.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작년에 비해 돈을 조금 더 모았다거나 하는 일들은 일견 내 삶에 있어 진전이나 발전인 듯 보이지만, 그 작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할 때 내 자신이 문득 측은해지는 것이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했을 때도 그와 같은 현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 문명으로 인류의 삶이 풍족하고 여유 있게 변하는 듯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나처럼 생각하는 소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위안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인간의 출생과 자유까지 마음대로 통제하는 미래의 문명 세계를 그린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유대가 사라진 세계, 죽음까지도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진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한편 기술의 진보와 과학의 발전이 우리 인간을 과연 어떤 곳으로 인도할 것인지 깊게 살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그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창밖에 던져버렸어요, 야만인 씨. 자유 말입니다!” 그가 웃었다. “델타들이 자유를 이해하리라고 기대하다니!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리라고 기대하고요! 참 순진한 청년이군요!”  (p.333~p.334)


생물학자로 유명했던 할아버지 토머스 헨리 헉슬리와 생물학자로 유네스코 초대 회장을 지냈던 그의 형 줄리언 헉슬리 등 명문가에서 성장한 올더스 헉슬리는 종교와 철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말년에는 동양철학과 불교에도 관심을 보였던 헉슬리 자신의 사상은 이 책에 등장하는 원시 지역(Reservation)의 ‘야만인’ 존을 통하여 표출된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맞춤형’ 대량 생산으로 탄생하는 인류, 그들은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통해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한다. 노화도, 외로움도 겪지 않는 인류는 원할 때면 언제든 문란한 성관계를 맺는 등 쾌락과 만족감 속에서 삶을 향유한다. 노동 시간 이외에는 단순한 오락들로 짜여진 일과를 보내고, 혹여라도 기분이 나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 소마(soma)를 통해 즉각적인 쾌감을 경험한다. 소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사고 능력까지 빼앗는다. 이 세계의 구성원은 모두가 행복하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虱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p.362~p.363)


100여 년 전에 발표되었던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주는 충격은 당시에 비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올더스 헉슬리가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꿀벌의 세계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직분에 충실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활동하며, 노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이 사라지는 게 과연 행복일까. 야만인 청년 존을 통해 유토피아와 원시 세계를 비교하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도 야만인 '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문명사회를 떠나 원시 사회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잔류할 것인지...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대기층에 미세먼지의 농도를 더하고 있다. 하나가 좋으면 반드시 하나가 나쁠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규칙인가 보다. 어쩌면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던 새해 소망이나 바람도 그 대가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주말 휴일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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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직장인에게 일과 시간의 절반은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의 시간은 식사량만큼의 무거워진 체중 탓인지, 누군가 시곗바늘에 껌딱지라도 붙여 놓은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식곤증으로 인한 인지 부조화 탓인지 오전에 비해 시간은 현저하게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다. 1시간쯤 흘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확인해 보면 30분을 겨우 지나고 있고, 적어도 30분은 지났을 거야 하면서 쳐다보면 간신히 10분을 넘겼을 뿐이다. 이렇게 시계만 쳐다보는 날이면 퇴근 후에 기다리는 약속이 있느냐는 둥 괜한 트집을 잡히기 일쑤이다. 나는 단지 천천히 흐르는 시간에 뿔이 나 있을 뿐인데...


오늘도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뿌연 하늘이 며칠째 이어지다 보니 우리나라도 이제는 유럽의 겨울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은 느낌이 든다. 뿌옇게 흐린 하늘을 보면서 마음마저 괜스레 우울하고 답답해지는... 며칠 전 유럽 출장을 다녀온 친구와 잠시 시간을 내어 수다를 떨었다. 물가가 어찌나 비싸던지 웬만한 식당에선 다른 음식을 추가로 시키는 게 부담스러울 지경이라고 했다. 숙박비 역시 다르지 않아서 우리나라의 모텔보다도 못한 호텔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삭신이 쑤시고 결린다며 엄살을 떨었다. 유럽의 물가가 오른 탓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원화의 국제 가격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진 탓일 게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이 악화된 탓에 환율이 오르고 다른 나라에서 원화가 맥을 못 추는 것이리라. 이제 우리는 우리보다 성장률이 떨어지는 나라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현실에 처한 것이다. 지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눈 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이제는 눈 떠 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셈이다. 지도자를 잘못 뽑은 대가 치고는 너무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게 아닌가.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사는 부연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하죠. 하지만 그렇게 부차적인 말이나 부수적인 표현이 누군가에겐 목숨만큼 얻기 어려운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문장을 쓸 때 부사를 빼라는 문장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지 않아요. 인생은 '너무'와 '정말' 사이에서 춤추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부차적인 것들 때문에 울고 웃으니까요.)"  (p.53)


'너무'와 '정말' 사이에서 춤추는 모든 이에게 이 나른한 오후에 '비타500'의 활력을 드리고 싶다. 마음으로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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