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뿐 아니라 어느 분야든 최고의 위치에 근접할수록 개인의 욕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개개인의 능력이나 그릇에 비해 그가 추구하는 욕심이 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정상적인 절차에 의한 정공법보다는 탈법이나 편법에의 유혹이 커지게 마련인데, 그것이 꼭 그 사람의 인간성이나 가치관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나처럼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오를 가능성조차 없는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예컨대 자신이 속한 분야의 최고 권력자에게 뇌물을 제공한다거나 다른 분야(주로 정치권이지만)의 권력자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고 꾀하는 등 그 방법 또한 다양하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최고 권력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권력을 놓고 내려오는 길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어떤 권력이든 권력의 속성상 어느 한 편에 속하지 않으면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자신과 연대할 수 있는 편을 만들지 않으면 권력자의 입지는 심히 불안해지게 마련이고, 그 효력이나 권세 또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 돌아가는 대한민국 정세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독선과 오만의 정치로 일관했던 현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자신들의 입지마저 흔들리자 지난 MB정권의 인사들과 연대하여 위기 국면을 타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와 같은 현상이 비단 정치권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나 음악, 영화나 공연 등 권력으로부터 일정 부분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듯한 예술계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언론에 노출되어 있는 정치권보다 편법과 탈법의 수위가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다고는 볼 수 없다. 전원일기를 통해 명성을 쌓았던 배우 유인촌이 권력에 의탁하여 문화계의 수장을 맡는다거나 리더로서의 자질은 없지만 권력을 등에 업고 국방 분야의 장이 된 신원식 의원 등 우리 주변에는 그릇에 비해 과한 자리를 꿰찬 인사들이 차고 넘친다. 그런 까닭에 정치권의 어떤 선거가 있을 때마다 별 관련도 없어 보이는 문화계, 언론계, 체육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야설이나 쓰던 여당의 모 인사도 권력의 일선에서 떵떵거리고 있지 않던가. 게다가 대통령 부인과의 연루설이 파다하던 모 여인은 또 어떻고...


추석이 지나자 날씨가 급변했다. 더워서 헉헉 숨을 몰아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소슬한 바람에 한기마저 느끼게 된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것이다. 자연은 이렇게 한결같은데 인간의 얼굴은 매 순간이 다르다.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 산책이나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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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문학 역시 개개인의 삶을 관통하여 세상에 출현한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이의 성향에 따라 삶을 통과하는 방식은 제각각 다른 절차를 밟게 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이 경제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풍요로운 나머지 소일의 목적으로 글을 생산하게 되고, 어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인기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단지 머릿속에서의 취사선택 과정만 거친 후 글을 생산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삶에 깊이 드러난 상처의 틈새로 폭발 직전의 슬픔을 꾸역꾸역 밀어내기도 한다. 글을 쓰는 과정이 이러하기에 어떤 글은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시간의 잉여에 의해 탄생한 푸석푸석한 글이 되고, 어떤 글은 비린내 나는 인간의 욕구가 매 문장마다 점철된, 부패한 글이 되기도 하고, 어떤 글은 상처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소나무 송진처럼, 끈적끈적한 슬픔의 잡아당김으로 인해 한 자 한 자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는 속독 불가의 글이 되기도 한다.


개인의 재주만으로 매끄럽고 나무랄 데 없는 글이 탄생했다고 할지라도 글쓴이의 삶에 상처가 없다면 그 글은 건조하고 푸석푸석한 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좋은 글이란 어쩌면 글쓴이의 삶에 상처가 많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삶의 상처는 개인간의 관계를 다지는 접착제이자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의 윤활유인 동시에 시간의 깊이를 더하는 우리 뇌의 각성제인 까닭이다. 먼 나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글이 그것을 증명하며 가깝게는 한강의 소설이 그것을  입증한다. 정신분석에 문외한인 내가 빅터 프랭클의 저서를 음미하며 읽을 수 있는 까닭도 그런 이유일 게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 상처가 많았던 이의 글은 인류를 위한 대속이자 희생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도 보편적 인류애에 기인하는 까닭이다. 하여, 자신의 삶에 일부러 상처를 낼 필요는 없지만 상처가 많은 이의 삶을 우리가 보듬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한 듯 보인다.


"오늘날 살아 있음, 혹은 무언가 되어 가고 있음을 산문으로 표현하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담론의 형식으로서 산문은 최소한, 확립된 의미의 연속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 산문은 주변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의견들 사이의 교환이며, 공통의, 설명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언어는 대부분의 공적 담론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일시적이지만, 역사적이기도 한 상실이다."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에서)


문학을 전공하지도, 전문가로부터 문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도 않은 내가 십수 년째 블로그에 글을 쓰고, 때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문학을 어쭙잖게 논한다는 건 꽤나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비전문가의 생각들이 모여 문학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보람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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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 중 하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인간성도 좋을 것이라는 착각 혹은 타인에 대한 뛰어난 공감 능력과 이로부터의 선한 행위, 평균을 상회하는 도덕적 규범 혹은 도덕적인 삶의 추구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등가법칙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믿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좋은 글이란 개인의 축적된 경험과 많은 독서량을 통해 나오는 게 일반적이므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일수록 남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다독이 사람의 성품을 좋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임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할 수 없다는 게 현실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에 비해 자신의 삶을 종합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는 데 있어서 그 횟수나 객관화의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도, 가치판단의 기회도 갖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이다. 예컨대 현실에 떠밀려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간을 쪼개 책을 읽을 리도 만무하며, 유흥에 빠져 흥청망청 살아가는 사람들이 쾌락으로부터 빠져나와 책을 가까이할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자신이 느끼는 바를 글로 옮긴다는 건 더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조금 더 도덕적인 삶을 추구할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때 웹소설을 통해 이름을 알린 여당의 모 인사가 라디오 방송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가 웹소설로 나름 성공을 해본 사람이라 잘 아는데요."라는 그의 말을 우리가 액면 그대로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인간성도 좋다는 등가법칙으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에 그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비판한 어느 가수에 대해 "연예인이 무슨 벼슬이라고 말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아무런 책임도 안 져야 되느냐"고 말했다. 자신의 웹소설에 대한 비판은 표현의 자유이고, 사회현상에 대한 연예인의 비판은 벼슬이냐는 식으로 따지는 행태는 그의 인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글쓰기는 개인이 갈고닦은 하나의 기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에 대한 하나의 결과물일 뿐 인성이나 도덕적 규범을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이기적이고 고집이 센 사람으로 변해가게 마련이다. 젊디 젊은 장 모 인사가 나이가 들었을 때를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는 과연 어떤 형상의 괴물로 변해 있을 것인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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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09-17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글쓰기란 재주는 인성과 무관할 수는 있어도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는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오래 기억되겠지요. 무엇보다... 재주 /테크닉 이전에 대상(인간/비인간)에 대한 애정이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꼼쥐 2023-09-23 14:14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혹은 자연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이 글을 쓰는 기술만 익혔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라 하겠지요. 그럼에도 알량한 기술을 무기로 쓰레기와 다름없는 글을 양산하는 걸 보면 참으로 한심합니다.

2023-09-23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24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2. 헤어질 결심


근 한 달 만에 쓰는 일기입니다. 그동안 나는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똥광 멧돼지를 소문 관리 위원장으로 임명하였고, 내가 속한 '멧돼지의 힘' 만찬회에 참석하여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의 똘마니들과 함께 모여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퍼마신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참, 잊을 뻔했습니다만 그 사이에 나의 아버지 멧돼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수컷 멧돼지의 세계가 늘 그런 것처럼 나와 아버지 멧돼지의 사이도 그리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멧돼지 또한 살 만큼 살았고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리면 멧돼지의 초청에 응했던 것입니다. 기시감 멧돼지도 참석한 자리라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더불어 죽음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불현듯 삶의 덧없음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지금 나는 멀리 인도에 와 있습니다. 날리면 멧돼지와 기시감 멧돼지 역시 참석한 자리인지라 오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편하게 앉아 마른 오징어 안주에 소주잔이나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나를 지지하는 멧돼지들도 이따금 이런 질문을 합니다. "도대체 왜 기시감 멧돼지에게 그토록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의 일반 멧돼지들의 여론과 상관없이 매번 일방적으로 기시감 멧돼지의 편만 드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나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리더 멧돼지에 당선된 후 1년이 지날 즈음이었습니다. 나는 문득 퇴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누가 나 다음의 차기 리더 멧돼지가 되더라도 내가 감옥에 가는 건 피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내 멧돼지 역시 이를 감지한 듯 최근에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하여 보고 있습니다. 물론 멧돼지 세계와 영화 속 인간의 세계는 엄연히 다른 것이겠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아내 멧돼지의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박해일, 탕웨이 주연의 '헤어질 결심'입니다. 어쩌면 나는 퇴임과 동시에 효용가치 제로인 쓸모없는 멧돼지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아내 멧돼지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아내 멧돼지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듯합니다. 나를 추종하는 똘마니들도 비슷한 생각이겠지요.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퇴임 이후의 삶을 의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쩌면 기시감 멧돼지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리더 재임기간 동안 나는 기시감 멧돼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으로부터 너무나 멀고 낯선 나라 인도에 와 있습니다. 소맥 생각이 간절하지만 곁에 있는 똘마니들조차 극구 말리는 바람에 억지로 참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아내 멧돼지로부터 혹은 나의 똘마니들로부터 비참하게 버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헤어질 결심'을 굳혀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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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우아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도서관 이용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여인은 그게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이따금 꼬아 앉았던 다리를 풀어 방향을 바꿔 앉을 뿐이다. 그럼에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꽤나 불편한 듯 곧게 편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 경직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려는 듯.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알 길은 없다. 굳이 알고자 하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무례한 방법을 동원한다는 건 현 정권의 정치 모리배들이 하는 짓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우아함은 우아한 대로 남겨둔 채 천박한 인간들을 개선하는 데 힘을 모으는 게 저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척도가 될 테니까.


한 국가의 통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 나라의 경제 지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 정권의 점수는 낙제점에 가깝다.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미안함이나 부끄러움을 표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직 전 정권에 대한 탓으로만 돌린다. 이런 무도한 정권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어느 해병대 장병에 대한 수사마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공권력을 동원하여 압박을 가하기도 하고, 현 정권 들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선생님들의 자살 소식에도 나 몰라라 뒷짐을 진 채 시간만 끌기도 하고, 핵 오염수를 방류한 일본의 천인공노할 만행 앞에서는 국민들을 협박하면서까지 덮어주는 데 열을 올리고, 동해를 일본해로 명명하며 노골적으로 일본 편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미국 바이든 정권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순국선열들을 공산당으로 몰면서까지 친일파들의 후손을 보호하려 하고...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현 정부의 뻘짓 앞에서 우리는 정치의 부재를, 국가의 부재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정권 들어 먹고사는 문제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마당에 '이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는 국민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그를 대해야 할까. '저런 멍청한 자를 누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았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겠나.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 세상을 등진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발인 소식을 뉴스로 접하면서 휴일 오후의 나른함에 슬픔 한 스푼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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