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화는 주변에 있는 모든 집들의 창문이 창호지에서 유리로 바뀌던 시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밖에서는 집안의 어느것도 보이지 않던 시대에서 모든 게 훤히 들여다 보여 무엇 하나 감출 수 없는 시대로 급격하게 바뀌던 그 시점 말이지요.
왜 우리는 모든 게 명명백백해지고,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진실만 말할 것 같은. 진리의 순간이 도래한 것만 같았던 그 시점부터 소통은 끊어지고,
불신은 증가했으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감추지 못해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던 걸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가 그때 저마다의 꿈을 적어 보냈던 희망의 주소지는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했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이를테면 모두가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며,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직 사랑과 신뢰의 눈길만 있을 것
같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초록색 이파리 세 개가 그려진 깃발 아래서 사시사철 주린 배를 움켜 쥐고 땀을 흘려야 했던 부모 세대의 탈진은
신기루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능 한파가 몰아쳤던 어제와는 딴판의날씨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다른 것처럼 과거에 했던 기대와 오늘의 현실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까닭은 투명한 창유리 속에 너무도 많은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투명함 속에
숨겨진 거짓과 위선은, 창호지에 어룽지던 검은 실루엣과는 사뭇 다른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는커녕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무너진 그런 세상에 도착한 듯합니다.
당신이 보낸, 그리고 나의 온 마음을 담았던 희망의 메시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못된 배달부가 당신과 내가 알지 못하는,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어떤 곳으로 배달한 것은 아닌지요. 혹은 '수취인 불명'의 낙인을 찍어 어두운 반송함에 쳐박아 두었는지요. 기다림은
이제 속절없는 체념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수능시험을 본 아이들, 그보다 한두 살 더 어린 아이들도 미래를 향한 희망의 편지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합니다. 당신과 내가 보냈던 순진한 편지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의 눈에서나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탄생과 함께 체념을 배우는 세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희망의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