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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나는 종종 '책잠'에 빠져들곤 했는데 이런 나를 두고 형이나 누나들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 말하자면 내가 힘든 일을 피하기 위해 짐짓 못 들은 체 한다는 거였다. 예컨대 아주 추운 날 연탄을 날라야 한다거나, 샘에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거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한다거나 할 때면 나를 아무리 불러도 못 들은 체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책잠'에 빠져 있어서 듣지 못했노라고 해명하곤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정말 일단 책을 잡기만 하면 마치 가수면 상태로 진입한 것처럼 책에 빠져들곤 했었다. 나는 그것을 '책잠'이라 부르곤 했는데, 형이나 누나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일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핑곗거리 내지는 변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큰 소리로 불렀는데 듣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그러나 나는 정말 책에서 깜박 '깨어났'을 때 현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잠시 동안 어리둥절하곤 했었다.

 

내 방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탓에 '책잠'에 한껏 빠져둘고 싶은 날이면 형과 누나의 눈을 피해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곤 했었다. 곰팡내 지독한 광이나 외양간으로. 나는 그곳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책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따금 진짜로 잠이 든 적도 없지 않았으므로 그럴 때마다 형과 누나는 나를 찾아 헤맨 적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제 나는 '책잠'에 빠지지 않는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며 짬짬이 읽는 독서가 그렇게 될 리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한동안 길들여져 온전히 책에 집중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쩌면 책이라는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단조롭고 안전한, 때로는 평화롭고 푸근한 느낌에 한껏 취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아들과 함께 서점에 들러 책을 읽을라치면 아들을 통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책에 흠벅 취한 아들은 혼자 킬킬대기도 하고, 인상을 쓰기도 하고, 조용히 미소짓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책잠'에서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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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첫눈인가 봅니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저는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눈이니 제게는 첫눈인 것입니다.  부유하는 눈송이들은 지구의 중력과는 무관한 듯 그저 가볍습니다.

 

오늘 아침, 여느 날처럼 어둠에 싸인 산을 올랐을 때 저는 내심 눈 덮인 산길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람만 거셀 뿐 눈은 내리지 않더군요.  어제 내린 비로 낙엽이 쌓인 등산로는 조금 질척거렸고 미끄러웠습니다.  밤새 불었던 바람은 마른 가지를 부러트려 등산로 여기저기에 흩어 놓았고, 어둠에 익숙지 않은 나의 발부리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비인지 진눈깨비인지 잠시 흩뿌렸습니다.  오늘의 날씨에 지레 겁을 먹은 등산객들은 집에서 나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유난히 인적이 드물었던 오늘의 등산로에는 바람 소리만 가득했습니다.  어둠은 끝내 걷히지 않았고, 그 어둠 속에서 젖은 낙엽들만 밟혔습니다.

 

빗줄기로 시작된 오늘의 눈은 소나무 위에 슬몃 얹혀 12월의 첫날을 기억하게 합니다.  지금 밖에는 부유하듯 눈발이 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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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0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곳에도 첫눈이 많이 왔답니다.
그런데 지붕에는 첫눈치곤 많이 내려쌓였는데요.
길바닥에는 거의 쌓이지 않고 금방 다 녹더군요.
여태까지 따스한 늦가을 날씨가 물러가지 않았던 탓 같습니다.

조금 전, 밖에 나가 이웃집 승용차 지붕에 쌓인 눈을 뭉쳐
밤하늘 높이 던져올려봤네요.^^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던진 눈뭉치를 받다가
잘못 받는 바람에 부서진 눈뭉치가
몸속으로 들어가 가슴 밑에서 차갑게 녹았습니다.
첫눈과의 상견례를 꼼쥐 님 윗글을 읽다가 이렇게 치렀답니다.^^

꼼쥐 2014-12-02 09:41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저는 오늘 아침 산을 올랐을 때 쌓인 눈을 밟는 느낌이 좋았어요.
떨어진 기온에 비해 많이 춥지는 않았구요. 아마도 바람이 잦아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뭇가지 위에도 소복소복 눈이 쌓여 있더군요.
 

바람이 불고 이따금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쓰고 몇 번인가 되짚어 생각해야 했습니다. 바람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비가 먼저였는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거듭하여 생각하느냐 비난할 분도 분명 있을 터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문제에 골몰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자본주의 논리로 따지자면 너무나도 하찮고 가치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경우도 있고 정말 하찮은 일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기는 가깝거나 먼 미래의 일이 되겠지요. 현실에서는 내 앞에 닥친 일에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처할 방법만 찾는 데 골몰하기 마련이니까요. 지나고 나면 훤히 보이는 일인데 현실에서는 왜 그다지도 어려운 것인지요.

 

나는 끝내 바람이 먼저였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지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주말의 풍경은 지금처럼 바람이 불고 이따금 비가 내리는 날씨는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암갈색의 플라타너스 낙엽이 차도 위에 시체처럼 흩어져 그 스산함을 더하는...

 

가깝고도 먼 미래에 나는 또 어떤 식으로 오늘을 평가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씀씀이는 나날이 줄고 있는데 생활비는 왜 다달이 늘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시간을 더 할애해야 했었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구요. 아무튼 나는 오늘 바람이 먼저였는지 비가 먼저였는지 골똘히 생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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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허리를 다쳐 고생하고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허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살았던 요 며칠 동안 나는 그동안 알지(엄밀히 말하자면 체감하지) 못했던 몇몇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니까.

 

일의 시작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갔던 월요일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주로 월요일에 일주일 먹을 식량(그래 봐야 혼자서 몇 끼 먹는 것에 불과하지만)을 구입하기 위해 근처 마트에 들르곤 한다. 그날도 마트에 들러 생수며 과일이며 (비상식량 성격의)라면이며 (아침 식사 대용으로 쓰일)떡이며 몇몇 필요한 것들을 사서 짧은 시간 안에 장보기를 마쳤었다. 늘 하던 일이니 더 오래 머물 이유도 없었다. 물건을 골판지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조수석에 실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물건을 꺼내려는데 옆에 주차된 차와의 간격이 너무 좁아 어쩔 수 없이 운전석쪽의 문을 통해 박스를 꺼내야 했다.

 

박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조수석에서 운전석을 지나 문을 통과하기까지 불편한 자세로 용을 써야 했다.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집(숙소는 아파트 2층이라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까지 운반하여 냉장고에 넣을 것은 넣고 무사히 정리를 마쳤다.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늘 하던 대로 아침운동을 나갔는데 그때부터 뜨끔뜨끔 아프기 시작했다. 어찌나 아프던지 윗몸일으키기는 아예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산을 내려왔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설 때부터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어찌나 아프던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을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허리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허리를 곧게 펼 수조차 없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점심을 먹고 약국에 들렀다. 파스라도 붙여볼 요량으로. 화장실에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였다. 조금 나아지는가 했는데 마음뿐이지 상황은 점점 악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밤새 찜질팩을 허리에 두르고 씨름을 했다. 그 덕분인지 오늘은 그나마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통증은 계속되고 있지만 말이다. 파스를 있는 대로 다 붙였더니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한동안 앉아 있다 일어설라치면 의자 팔걸이를 붙잡지 않고서는 곧바로 서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살면서 허리가 아팠던 적은 한두 번 있었지만 이번처럼 심하게 앓았던 적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몸을 잘 관리해온 덕분이겠지만 그런 까닭에 오히려 몸을 아무렇게나 굴려온 게 아닌가 싶다. 건강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 불러온 참화 앞에서 나는 조금쯤 자책을 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성을 했다.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오직 다리 힘만으로 걸으려니 찌르르 감전된 듯 발끝까지 저려왔고 밤에는 손도 저렸다. 오죽하면 몸에 걸쳤던 코트의 무게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허리가 떠받치는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직접 겪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허리가 아픈 사람들의 고통도, 건강의 고마움도. 오늘도 밤새 찜질을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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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4-11-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이 글을 읽고 아무생각 없이 좋아요를 눌렀는데 ..ㅜㅜ 죄송하구만요 ㅎㅎㅎ
전 허리 아파본 적은 없는데
허리 아픈 분들 말 들어보면 장난이 아니더군요. 잘 낫지도 않고.ㅠㅠ
당분간 조심 다니셔야 겠어요. 무거운 것도 들지 마시구요 ~^^

꼼쥐 2014-11-27 20:26   좋아요 0 | URL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조금만 충격이 가도 `억` 소리가 절로 나오고. 무엇보다도 앉았다 일어날 때 꾸부정한 허리를 펼 수도 없고. 참 답답하더라구요. 그런데 오늘은 조금 나아졌어요.

오후네시 2014-11-2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허리아픈건 글로만 읽어도 너무 힘든거같아요 쾌차하세요!!ㅜㅜ

꼼쥐 2014-11-27 20:2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여러 이웃분들의 염려 덕분인지 조금 나아졌네요.

hnine 2014-11-2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엔 안가보셔도 되겠어요?
거의 모든 신경과 골격이 척추에서 뻗어나가니 허리가 아프면 온몸이 아픈것이나 마찬가지일텐데요.
무거운것 들때 조심하라는 말을 저도 아직 실감을 못하고 있는데 꼼쥐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어서 나으셔야할텐데요...

꼼쥐 2014-11-27 20:28   좋아요 0 | URL
그동안 건강에 자신있다 생각하고 조심하지 않았던 게 잘못인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냥저냥 걸을 만하더군요. 통증도 조금 덜해졌구요. 고맙습니다. ^^

세실 2014-11-2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받으셔야 할듯요. 허리는 쉽게 낫지 않던데요...
저도 얼마전 생애 처음으로 스크린 골프 치고는 오른쪽 팔이아파 고전하고 있답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요.

꼼쥐 2014-11-27 20:30   좋아요 0 | URL
밤새 찜질도 하고 지인분한테 지압도 받고 정말 여러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들인데. 이제는 그만그만하니 조심하면 곧 나을 것 같아요.

qualia 2014-11-27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리 고장나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죠.^^
꼼쥐 님, 허리 정말 심하게 아프신가봐요.
저도 노가다하다가, 목욕하다가, 쪼그려앉았다가, 갑자기 허리가 고장난 적이 많아요.
심하게 다쳤을 때는 단 1센티미터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허리를 어떻게, 어느 부위를 다치셨는지 모르겠지만
허리 고장에 대처하는 제 나름의 방법이 있어 말씀드려 봅니다.

먼저 방바닥에 일자로 쭉 엎드립니다.
엎드린 자세에서 두 팔로 방바닥을 짚고(┏○┓)
아랫몸은 방바닥에 밀착시킨 채 윗몸을 위로 찬찬히 젖혔다 폅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씩 살살 윗몸을 젖히면서 통증을 조절합니다.
통증을 참으면서 젖혔다 폈다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통증이 점점 사라지면서 점점 큰 각도로 젖힐 수 있죠.
그러니까 안쪽으로 구부러진 활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젖히는 운동을 (구부리는 각도/빠르기/강약 등등을 조절하면서) 반복하는 겁니다.

이렇게 윗몸 젖히기를 반복할 때는 허리께보다는
몸통 중간쯤의 척추를 젖힌다는 느낌으로 해야 효과가 좋아요.
그리고 윗몸을 젖힐 때 동시에 목도 쭉뽑아 뒤로 젖히면 효과가 더 좋죠.
이런 윗몸 젖히기(혹은 구부러진 척추 바로잡기)는 상당히 효과가 좋아요.
약 쓰고 병원 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자가치료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심하셔서 함 해보셔요.^^

꼼쥐 2014-11-27 20:33   좋아요 0 | URL
자세가 안 좋은 상태에서 무거운 것을 들다가 그리 되었어요. 상체를 차 안에 두고 하체는 차 밖에 둔 채로 운전석쪽에서 조수석 의자 위에 있던 박스를 잡아당기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자세가 구부정하고 힘도 제대로 줄 수 없었거든요. 좋은 방법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당장 시도해봐야 겠네요.
 

우리의 대화는 주변에 있는 모든 집들의 창문이 창호지에서 유리로 바뀌던 시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밖에서는 집안의 어느것도 보이지 않던 시대에서 모든 게 훤히 들여다 보여 무엇 하나 감출 수 없는 시대로 급격하게 바뀌던 그 시점 말이지요. 왜 우리는 모든 게 명명백백해지고,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진실만 말할 것 같은. 진리의 순간이 도래한 것만 같았던 그 시점부터 소통은 끊어지고, 불신은 증가했으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감추지 못해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던 걸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가 그때 저마다의 꿈을 적어 보냈던 희망의 주소지는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했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이를테면 모두가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며,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직 사랑과 신뢰의 눈길만 있을 것 같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초록색 이파리 세 개가 그려진 깃발 아래서 사시사철 주린 배를 움켜 쥐고 땀을 흘려야 했던 부모 세대의 탈진은 신기루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능 한파가 몰아쳤던 어제와는 딴판의날씨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다른 것처럼 과거에 했던 기대와 오늘의 현실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까닭은 투명한 창유리 속에 너무도 많은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투명함 속에 숨겨진 거짓과 위선은, 창호지에 어룽지던 검은 실루엣과는 사뭇 다른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는커녕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무너진 그런 세상에 도착한 듯합니다.

 

당신이 보낸, 그리고 나의 온 마음을 담았던 희망의 메시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못된 배달부가 당신과 내가 알지 못하는,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어떤 곳으로 배달한 것은 아닌지요. 혹은 '수취인 불명'의 낙인을 찍어 어두운 반송함에 쳐박아 두었는지요. 기다림은 이제 속절없는 체념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수능시험을 본 아이들, 그보다 한두 살 더 어린 아이들도 미래를 향한 희망의 편지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합니다. 당신과 내가 보냈던 순진한 편지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의 눈에서나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탄생과 함께 체념을 배우는 세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희망의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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