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김혜빈 외 지음 / 사계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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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는 여전히 쌀쌀하지만 연일 꽃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봄은 봄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니 아파트 화단에도 산수유꽃이 새초롬하니 피었다. 계절의 변화에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산수유꽃의 개화는 늘 놓치고 만다.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슬쩍 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대지가 꿈틀대는 이맘때면 나는 '아, 소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설레곤 한다. 봄이 우리에게 급격히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소설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장 먼저 드러내는 '문학계의 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발간한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은 이 봄에 맞춤처럼 찾아온 소설집이다. 신춘문예 등단작가 5인의 단편소설과 에세이가 각각 한 편씩 실린 이 책은 신예작가의 시선이라는 점도, 소설과 에세이가 동시에 실렸다는 점도 무척이나 신선하다. 마치 이제 막 피어나는 봄처럼 말이다. 먼저 책에 실린 단편소설을 살펴보면 평범한 인간들 속에 소수자로 살고 있는 늑대인간을 그린 '솔리터리 크리처', 사라진 가족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정원사', 한 사람의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권능',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인 기우와 이혼 소송 중인 탁구 강사 호정을 통해 우리가 맺고 있는 허망한 관계를 바라보게 되는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가까운 사이로 존재하지만 두 사람의 속마음은 두려울 정도로 서로 다른 '이주'가 김혜빈, 김사사, 공형진, 하가람, 신보라 작가가 쓴 단편소설이고 뒤에는 이들 각자의 에세이가 한 편씩 실려 있다.


"호정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담장 아래 떨어진 살구를 줍는 탐정의 얼굴을.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열매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모습을. 전날 짓무른 과육에서 느껴지던 미끄덩한 식감과 신맛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을 먹으면 배탈이 날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 바닥에 떨어뜨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까지도. 그러면서도 혀 아래로는 침이 고인다."  (p.129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중에서)


"우리의 약속이 세 가지로 늘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이주와 함께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주는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우울한 거야, 내려다볼 줄도 알아야지, 하며 중얼거렸다."  (p.158 '이주' 중에서)


각각의 소설은 우리가 알던 틀에서 조금씩 어긋나 삐걱거린다. 새로운 근육을 썼을 때의 어색함처럼 혀에 착착 감기는 익숙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도, 글을 완성해 가는 방식도 기분 좋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이 순간처럼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설렌다. 이들도 언젠가 자신의 문체와 구성 방식에 익숙해져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글이 원숙해질지언정 늘 신인의 자세로 새로움을 추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인데. 나는 자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다가 어쩌면, 아무것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다가 내가 쓰고 있는 글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아무것이든 상관없다의 반복.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은 아무것이든 상관없음과 싸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일이란 어쨌든 싸우는 일. 승패는 나의 몫이 아니다. 결국에는 '도'와 '든'의 반복."  (p.188~p.189 '신보라의 ''도'와 '든'으로 살기' 중에서)


책에서 선보인 다섯 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허상과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시도하고, 상처를 입고, 회복기를 거쳐 다시 또 도전하기에 이른다. 삶이란 관계와 관계 맺기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까닭에. 끊임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우리는 끝없이 관계를 맺고, 상처를 입고 헤어지며, 다시 또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모두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부러워하는 평범한 소시민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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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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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이따금 답도 알 수 없는 이 질문을 붙잡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글을 줄기차게 읽어왔다.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썼던 위지안 교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썼던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이었던 모리 교수 등 여러 책을 전전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승과 저승의 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승의 이 편에 있는 내가 저승으로 향하는 저 사람들의 메아리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 진의를 어찌 해석할 수 있을까.


"불안은 자꾸 잠을 잘라둔다.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긴 밧줄 같은 잠에 묶여 불안이 나오지 못할 만큼 자야겠다."  (p.275)


무위의 질문에 사로잡힌 나는 또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읽었다. 바람을 움키듯 나는 결국 헛힘만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가 마주하는 질문은 언제나 진한 향기로 유혹한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생명 연장에 대한 유혹을 내려놓은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간절함의 시간일 테니까. 나는 삶의 이쪽 편에 서서 웅웅 바람결에 메아리로 들리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허사로 귀결되는 무용의 독서를 이어간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p.307~p.308)


생의 마지막 항암치료를 앞두고 김민정 시인에게 썼다는 허 시인의 편지. 쓰고 있는 작은 시집이 있는데 내달라는 내용과 함께 원고는 메일로 보낼 테니 오지 말라는 당부. "너를 보면 겨우 참았던 미련들이 다시 무장무장 일어날 것 같아. 시인이니 시로 이 세계를 가름하는 걸 내 업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니 마지막에도 그러려고 한다."는 허 시인의 편지. 책을 읽는 우리는 그저 먹먹한 슬픔만 한 줌 손에 쥘 뿐 정작 찾고자 하는 질문의 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 사이의 넓은 행간은 내가 레테의 강을 건널 쪽배를 타는 순간에나 읽을 수 있으려나.


"글을 참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듯 쓰는 사람들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부럽다는 생각. 허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자신이 다치지도 타인을 다치게 하지도 않는 글. 그런데...... 글은 그것뿐인가?"  (p.230~p.231)


'글을 참 맛깔나게 쓰던' 허수경 시인. 다정함은 인간의 체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더이상 우리는 시인이 보내는 다정한 인사를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내가 기억하는 시인을 향해 내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최선을 다한 다정함의 끝에는 울컥울컥 무른 슬픔이 묻어나겠지만 봄바람이 부는 소슬한 오후를 내 다정함의 온기로 덥혀 보려 한다. 주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조금 더 다정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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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 - 마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처방
정신과 의사 토미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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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는 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처럼 나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이를테면 평상시에 듣는다면 대수롭지 않거나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 어떤 말도 적절한 시점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우리네 말도 다 궁합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말들이 다 의미가 거창하거나 말하는 이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적당한 말로 작용했을 뿐이다. 말과 나 사이의 특별한 인연이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을 들려줄 귀인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고 귀인과 내가 만날 가능성을 점치기 위해 토정비결을 볼 필요도 없다. 어느 날 우연히 펼친 책의 한 페이지에서 힐끗 보았던 어느 문장이, 운전 중에 들었던 어느 디제이의 한 마디 인사말이 지금까지 있었던 우울한 감정이나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단박에 날려버리는 기폭제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읽었던 대부분의 에세이는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거나 '잘 될 거야'와 같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주였고,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와 같은 쇼펜하우어 방식의 따끔한 훈계는 많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 까닭에 언제부턴가 쇼펜하우어의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단에 랭크되기 시작했다.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이 영혼의 성장이나 삶의 태도에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삶을 직시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 삶의 파고를 넘는 데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128 인생의 목적: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은 사실 없는 것이죠. 모두 자신의 비행기를 조종하듯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바람을 타고 즐겁게요. 착륙하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어디로 향해도 괜찮아요."  (p.158)


정신과 의사 토미가 쓴 <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은 얼마 전에 읽었던 그의 저서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에 이어 두 번째 읽게 된 책이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상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가 선택한 하나의 키워드에 대한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덧붙인 이 책은 자신의 생각을 구구절절 늘어놓은 여느 에세이와 다르게 저자가 생각하는 핵심 포인트를 한두 문장으로 정리하여 기록했을 뿐 길고 잡다한 설명이 없다.


"157 사유: 우리는 사유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질문하고, 무언가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분투하죠. 이렇게 우리는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려고 합니다. 즉, 사유하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예요."  (p.189)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Chapter 1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도 괜찮아요', Chapter 2 '인간관계는 사실 개선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Chapter 3 '사실 진짜 고민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아요', Chapter 4 '강해지는 방법은 집착을 줄이는 거예요'라는 소제목으로 분류되며 각각의 챕터에 저자가 선정한 40~50개의 키워드와 덧붙이는 말이 들어 있다. 챕터의 중간에는 'TOMY의 상담실'이라는 코너가 있어 실제 상담 내용을 짧게 실었다.


"이 책은 그동안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경험한 정서적 치료방법과 트위터 글에서 엄선한 "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들을 모았습니다. 어떤 팔로워로부터는 "잠들기 전에 토미 선생님의 글을 여러 번 읽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제 글을 책이라는 형태로 출간한 거죠.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깬 아침, 일이 힘들 때마다 언제든지 여러 번 읽어보세요. 조금이라도 당신의 기분이 나아진다면, 저는 정말로 기쁠 거예요."  (p.13 '시작하며' 중에서)


나의 신념 중 하나는 누구에게도 조언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간절히 원하지 않는 한 나는 어떤 조언도 하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아끼는 후배라서 하는 얘긴데...'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말 치고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상대방의 기분만 상하게 하여 좋았던 관계마저 서먹한 관계로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와 같은 사례는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칭찬만 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무척이나 짧은 인생을 살다 가는지도 모른다. 대기 중에 떠도는 미세먼지가 하루 종일 걷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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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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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읽을 만한 책이 없거나 한 권의 책을 이제 막 다 읽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장르가 전혀 다른 책을 연달아 읽어야 할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곤 한다. 하루키의 애독자인 나로서는 시중에 출간된 그의 책 중 읽지 않은 게 없지만 마땅히 읽을 책이 없어 빈둥거리게 되는 독서 휴지기이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지만 이전 책과 장르가 너무 달라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이를테면 연계 독서용으로 하루키의 책 중 한 권을 골라 읽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격수가 잡은 공이 2루수를 거쳐 1루수에게 전달되는 병살 플레이의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책은 2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갔던 공이 길게 머물지 않고 가볍게 빠져나오는 것처럼 단순한 중계과정의 역할을 할 뿐 어떤 교훈이나 감동이 주가 되지는 않는다. '전에 읽을 때는 몰랐었는데 이 책에 이런 내용도 있었네!' 하는 정도의 감탄이 이따금 있을 뿐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몹시도 치열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일기를 읽고 있으려니 그런 분위기가 알알이 전해진다."  (p.70)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에 일 년 구 개월에 걸쳐 연재했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이 책은 하루키의 첫 잡문집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그의 일상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이 순서도 없이 뒤섞여 있지만 개중에는 눈에 번쩍 띄는 글들도 더러 있어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된다. 요즘에는 인터뷰나 대담에서도 잘 들을 수 없는 글쓰기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 책에 실렸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십여 년 전에도 분명 읽었을 텐데... 조금 길게 옮겨 본다.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라, 재주가 있는 사람 같으면 주위에서 "와, 제법인데"라는 둥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그러나 거기서 좀 더 칭찬을 들으려다가 영 그르친 사람을 난 몇 명이나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분명한 방향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그냥 '재주'로 끝나고 만다. 그럼 그런 방향감각은 어떻게 하면 체득할 수 있을까? 요는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 됐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어떻게 여자를 꼬드길 것인가, 어떻게 싸움을 할 것인가, 초밥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런 것들 말입니다. 한 차례 그런 일들을 겪어보고 '쳇, 뭐야, 이 정도면 굳이 글 같은 걸 쓸 필요도 없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고, '그래도 아직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 잘 쓰고 못 쓰고는 제쳐놓고 - 그때는 이미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을 쓸 수 있게 된 상태다."  (p.33~p.34)


하루키의 글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하루키의 일상이 무척이나 단조로운 데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모름지기 작가란 삶의 참여자인 동시에 세밀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모닝커피 한 잔 후 글쓰기 작업, 아침 식사 후 오전 글쓰기, 10km의 러닝이나 수영, 점심 식사 후 다른 집필 작업, 저녁 식사 후 9시 취침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루키는 마치 은둔형 외톨이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지름길은 역시 자신의 일상을 최대한 단조롭게 만드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일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늘은 뭐 할까?' 혹은 '오늘 누구를 만나 재미있게 놀까?' 하고 매일 궁리에 궁리를 더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리라. 작가란 타인의 삶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을 좋아해서 영화관에서만 네 번 정도 봤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슬랭도 소설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상당하다. 특히 동양인에 대한 차별 언사가 엄청나다. 언어적인 면 하나만 보아도 베트남전쟁은 미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지저분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고 실감한다."  (p.259)


한겨울로 회귀하려던 날씨는 조금 풀려 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3일이라는 짧지 않은 연휴를 특별한 일정도 없이 뒹굴뒹굴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 나는 게으른 일상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양념처럼 버무린 하루를 쇠똥구리의 걸음으로 힘겹게 떠밀고 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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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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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시인이 삶의 낙차가 그리 크지 않은, 비교적 유순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왔을 거라는 짐작이다. 시인과의 친분이나 일면식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바람이나 희망이 섞인 추측성 가설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 까닭은 독자로서 시인을 아끼는 마음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비가 없는, 바르고 평탄하기만 한 삶이 어디 있을까마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삶의 물살을 타고 유람을 하듯 천천히 삶의 굴곡을 넘어왔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강가에서 2


  깊은 물 속으로, 더 깊은 물 속으로 내려서면서 우리는 발끝으로 당신의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습니다 이명처럼 오랜 날들이 지나고 우리가 닿은 곳은 당신의 하구河口였습니다 밤새 비 내리고 폭풍우가 멎은 아침, 흰구름이 피어오르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맑게 닦인 모래알처럼 고운 당신의 웃음이 우리를 받았습니다


저마다의 삶은 '비 온 뒤의 웅덩이처럼 내 기다림 뒤에 있는 당신'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고 시간의 외길을 꼬닥꼬닥 걸어가는 것이지만 우리가 시인의 시를 천천히 암송하고 있노라면 삶도 죽음도 별것 아니라고, 다만 '그대가 내 손을 잡고 부르던 노래는 죽음이었'을 뿐이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된다. 시의 효용은 언제나 절망과 낙담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지만 이성복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현실의 무게를 절반쯤 덜어내는 방법을 조곤조곤 일러주는 것이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아슴아슴 졸음이 밀려드는 오후, 나는 삼일절 연휴를 기다리며 이틀처럼 긴 하루를 견뎌낸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또는 덜컥거리는 하나의 슬픔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울음


  때로는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는지 잊었습니다 내 팔은 울고 싶어 합니다 내 어깨는 울고 싶어 합니다 하루 종일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 하나 덜컥거립니다 한사코 그 슬픔을 밀어내려 애쓰지만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그 슬픔이 당신 자신이라면 나는 또 무엇을 밀어내야 할까요 내게서 당신이 떠나가는 날, 나는 처음 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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