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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 하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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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삶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물을 흘리며 인정하지 않는 한 삶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삶은 꽤나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므로 사업의 실패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일들로 인하여 겪게되는 상실감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인생을 몇 가지 단계로 나눈다면 1년, 1년 나이를 먹는 시계열적 추세 변화와 삶은 하등의 관련성이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극구 피하려 하지만 말이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애먼 거미를 기피하는 것처럼.

 

나는 녹색의 여린 잎을 내밀고 있는 양지쪽의 철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어리숙한 사람도 이따금 제법 그럴 듯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도 떠오르는 그 순간에 적어두지 않으면 금세 잊혀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지만 말이다.  한번 떠오른 생각이 내 머릿속에 진득하니 눌러 앉는 법이란 결코 없다.  마치 대기표를 뽑아 들고 기다리는 다른 여러 생각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이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변심한 여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냉정하게 자리를 뜨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댄스 댄스 댄스>를 읽고 있노라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카를 융의 '그림자 이론'을 소설로 각색한 듯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하루키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주인공은 현실 속의 사람들과 한 발짝 멀어져 있다.  자발적 소외.  그렇다.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경제적으로나, 능력으로나 그닥 뒤처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주인공의 의식은 때로 원시의 신화와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짙은 암흑은 폭력의 입자를 내 주위로 떠돌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바다뱀처럼 소리도 없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볼 수조차 없다.  구제할 수 없는 무력감이 나를 지배한다.  온몸의 모공이 송두리째 어둠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셔츠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다.  목구멍이 칼칼해진다.  침을 삼키기도 힘들어진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일까?"    (상권 p.132)

 

책에서 주인공인 '나'는 잡지사의 자유 기고가로서 이혼 경력이 있는 34살의 사내다.  작품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은 그 성향에 따라 '환상의 세계(또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과 '영혼의 세계(또는 관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뚜렷이 구분된다.  내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그랬다.  배우이자 학창 시절 친구인 '고탄다', 고급 콜걸이자 환상의 여인 '키키', '키키의 친구 '메이', 외팔이 시인 '딕 노스'가 이미지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주인공인 '나'와 예지능력이 있는 열세 살의 소녀 '유키', 그녀의 어머니인 '아메'는 관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가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키키'와 만났던 삿포로의 돌핀 호텔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키키'를 만나야겠다는 결심으로 도쿄에서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삿포로로 향한다.  그러나 돌핀 호텔은 예전의 그 호텔이 아닌 새로운 호텔로 개축되었다.  다만 그 이름만 그대로인 채.  그 호텔에 머물면서 '나'는 예전에 사라진 돌핀 호텔의 관념 속에서 '양 사나이'를 만난다.  '양 사나이'는 '나'에게  "춤추어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되도록 멋있게 춤을 추어라" 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나는 호텔 여직원 '유미요시'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나'는 '양 사나이'의 충고에 따라 운명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채 춤을 추듯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과 의문의 죽음이 이어진다.  '아메'가 죽고, '고탄다'가 죽고, '딕 노스'도 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애적 표현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  대신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무력감이 조용히 소리도 없이 물처럼 방 안에 차 있었다.  나는 그 무력감을 밀어 헤치듯이 목욕실로 가서 <레드 클레이>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샤워를 하고, 부엌에 선 채로 캔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스페인 어로 하나에서 열까지 센 다음,「끝났다」하고 소리 내어 말하고는 손뼉을 치자 무력감은 바람에 날려가듯이 휙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나의 주술(呪術)이다."    (하권 P.19)

 

"죽은 '정어리'와 마찬가지로, 결국 키키는 당연히 죽어야 했기에 죽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내게는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체념이었다.  광대한 해면에 내리 쏟아지는 비처럼 조용한 체념이었다.  나는 슬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영혼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지면, 산뜻하고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모든 게 소리도 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모래 위에 그려진 표지를 바람이 날려 버리듯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하권 P.229)

 

'나'는 환상의 세계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현실을 조화롭게 인식한다.  그것은 일종의 춤을 추는 과정과 비슷하였다.  작게 스텝을 밟으며 서서히 빠져드는 춤처럼, 관념의 세계로 침잠하던 의식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이다.  비록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환상의 세계에서 하나 둘 사라지지만.  '나'는 결국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 '유미요시'를 만나고 현실의 사랑을 이룬다.  '유미요시'는 '나에게 사라지지 않는 현실의 구원자였다.  그들도 물론 언젠가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메이의 죽음이 내게 가져온 것은, 오래된 꿈의 죽음 및 그 상실감이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내게 어떤 체념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혼다(고탄다)의 죽음이 가져온 것은, 출구가 없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와 같은 절망이었다.  고혼다의 죽음에는 구원이라는 게 없었다.  고혼다는 자신 속의 충동을, 자기 자신에 잘 동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힘이 그를 극한적인 장소까지 몰고 간 것이다.  의식의 영역의 제일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어둠의 세계까지."    (하권 P.249) 

 

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성지 순례를 갔던 관광객들이 폭탄 테러를 당하고, 무고한 사람이 간첩 누명을 쓰는 이런 세상에 때로는 어둠 속에 갇혀 '양 사나이'를 만나고 싶지만 인생은, 삶은 우리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 춤을 추듯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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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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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도 하지요.  책을 읽다 보면 그 계절과 딱 맞는 그런 책과 만날 수 있다는 게.  혼잡한 거리에서 우연히 친한 친구와 마주치는 그런 경우처럼 말입니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결과 나날이 도타워지는 봄의 기운이 나를 인도했던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요.  숨죽였던 계절이 기지개를 켜는 이맘때면 세월의 켯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추억 한토막쯤 풀어내어 한나절 그 추억 속에서 노닐고 싶은 심정.

 

박완서 작가의 유고집 <노란집>은 그런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와 나는 일면식도 없고 생전에 어떤 인연의 끈으로 엮여진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 양 스스럼없이 내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봄의 기운이 소리가 되어 터져나오기에는 조금 이른 이 계절에 작가가 들려주는 소소한 일상의 추억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작은 것들의 소중함, 그 이야기들이 얼음장 같던 내 마음을 사르르 녹입니다.  나는 저으기 안심하며 푸근해지는 것입니다. 

 

"설이 지나고 제법 해가 길어진 어느 날 아침이었다.  곧 해가 뜨려나, 파스텔 조의 노을빛을 받은 숲의 나무들이 흡사 꼼지락대는 것처럼 보였다.  겨우내 맨몸으로 삭풍을 견딘 늠름하고도 날카로운 가장귀들이 마치 간지럼을 참듯이 들썩이고 있는 게 암만해도 수상쩍었다.  나는 숲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마당 끝까지 걸어갔다.  우리 집 마당 끝은 조그만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숲과 연결돼 있다.  바람 없는 조용한 새벽이었다."    (p.126)

 

어느 책이건 글에서 작가 자신의 성품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참 드문 경우입니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글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또렷이 그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서(그것이 소설이든 산문이든 간에)는 언제나 살아생전의 작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솔직한 성격과 똘망한 기억력 덕분이겠지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굳이 감추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삶은 있는 그대로의 소설이자 잘 씌어진 한 권의 산문집일 것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대가족 속에서 자랄 때부터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거짓을 말하거나 남의 것에 손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걸로 교육받았고 구태여 그걸 어길 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 된 것이었을 텐데도,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쟤는 제 털 빼, 제 구멍에 넣을 애'로 통했다.  엄마도 칭찬의 뜻보다는 융통성 없음에 대한 한탄 비슷하게 그런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런 나를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예뻐하신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p.234)

 

삶의 질곡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다정한 할머니가 어린 손녀의 포동한 손을 붙잡고 자신의 삶을 차분히 들려주는 듯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정의 찌꺼기들일랑 흐르는 세월에 훠이훠이 날려보내고 맑고 투명한 이야기들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경리 작가가 박완서 작가를 아껴하셨던 까닭도 그런 이유겠지요.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장 긴 동안일 수도 있는 노년기, 다만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    (p.121~p.213)

 

밤이 깊었습니다.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의 손길처럼 순한 달빛입니다.  어쩌면 나는 오늘 그렇게 순한 잠을 잘 듯합니다.  꿈결에서 새싹의 수런거림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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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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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1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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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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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춥다는 말을 먼저 하더군요.  입춘이라는데 이렇게 추울 수가 있냐구 말이죠.  마치 누군가에게 떼를 쓰는 듯한 말투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강원도 두메 산골에서 보냈던 터라 어지간한 추위쯤이야 그럭저럭 잘 견딘다고 자신하지만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때보다 더한 추위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저의 생각도 한낱 인간의 오만함에 불과한 것일지도요.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뭇하지만 아마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나 봅니다.  어찌나 추웠던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매년 겨울이면 손과 발에 동상을 달고 살았었고, 손등이 터서 쩍쩍 갈라지곤 했었지만 그러려니 하며 지냈었는데 그날은 추워도 너무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으로 꽁꽁 언 손과 발을 넣었을 때 어찌나 아리고 아프던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잘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요즘은 저도 이따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무작정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이른 나이여도 편안한 죽음을 맞는 것이 더 행복한지 지금으로서는 가늠을 하기 어렵지만 제게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엄정한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오늘 저는 최인호 작가의 유고집 <눈물>을 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그 고통을 같이 할 수 없겠지요.  그 절대 고독의 순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것인지, 허망한 인간 삶을 손에서 놓고나면 나는 그 무엇에 의지한 채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인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작가의 <산중일기>를 읽고 리뷰를 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작가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났고 남아 있는 우리들은 그의 유고집을 읽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확한 것이겠지요.  2008년에 침샘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열정을 불태웠던 고 최인호 작가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인간이 갖는 숙명적인 나약함 앞에서 절규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자세히 탁상을 들여다보니 최근에 흘린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이 마치 애기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이 난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눈물로 탁상의 옻칠을 지울 만큼 저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 모양으로 흘러내린 탁상 겉면의 눈물 자국도 제게는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코올 솜으로 닦으면 영영 눈물 자국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 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p.13)

 

그렇습니다.  작가는 1987년 6월에 세례성사를 받았고 2013년 9월에 세상을 마치기까지 그는 오직 하느님을 의지하여  살았던 듯합니다.  '최인호 베드로'로서 말입니다.  5년여의 투병기간을 작가는 '고통의 축제'라고 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작가는 그 축제를 온전히 즐겼다고 저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너무도 미약하고, 너무도 쉽게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마주한 한 인간으로서의 작가는 그가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먼저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증거들을 말이죠.

 

끝없이 이어지는 신앙고백에 읽는 독자에 따라 혹 불편하다 느끼실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닌 것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작가처럼 죽음을 맞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고, 그때 우리들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신앙이든, 자신의 신념이든,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나 자책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그렇게 대물림하듯 배우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이런 구절에서 저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용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존재이자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발견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똑같이 비를 맞고 똑같이 햇빛을 받는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있어서는 이미 용서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면 베드로처럼 일곱 번도 용서할 수 없겠지만 그 형제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수만 번이라도 너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10)

 

참으로 재주가 많은 작가였습니다.  살아서의 작가는 누군가로부터 질시와 원망을 듣기도 했을 터이고, 인간으로서의 잘못도 많았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것들도 서서히 잊혀지겠지요.  다만 그의 작품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읽히고 또 읽혀질 것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가 부여받은 재능을 다 펼치고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그가 할 일은 다 한 것이 아닐까요?

 

입춘이라는데 봄은 여전히 멀리 있다고 느끼셨나요?  바람이 휩쓸고 간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구름 한 점 없었던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봄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듯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오늘 우리는 각자의 삶을 또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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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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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p.144)

 

우리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른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어린 시절의 유희를 한동안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아무런 다른 도구도 없이, 또는 같이 놀아줄 친구도 한 명 없이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할까, 싶지만은 밀란 쿤데라는 독자의 이런 의심을 미리 알아채기라도 했었다는 듯 그의 책을 집어드는 순간 그런 의심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게 만든다.  예컨대 그의 책은 어린 아이들이 지칠 줄 모르고 빠져들던 장난감 블록이나 이제 막 이성에 눈 뜬 사춘기 소년의 눈에 비친 아릿한 소녀의 잔상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 갖는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가 기록한 문장들은 비존재에 대한 세심한 관찰(우리가 사유 혹은 사색이라 일컫는)을 통하여 얻어진 최종 결과물처럼 보여지는데, 이러한 비존재(예컨대 영혼, 사랑, 동정심, 우정, 우연 등)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우리가 소설이 소설로서 유지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어왔던 몇몇 요소들(이를테면 주인공의 성격이나 외양, 주인공 상호간의 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등)을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교묘히 숨겨놓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것들이 하찮은 것, 또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  이를 통하여 작가는 비존재에 대한 독자의 생각을 환기시키고,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의 의도에 동참하게 된다.

 

"토마스는 <한 번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문장에서 태어났다.  테레사는 뱃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    (p.9)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p.59)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시킨다."    (p.63)

 

"극단적인 것은 그것을 넘어서면 생명이 끝나는 경게선의 표시이며, 정치와 마찬가지로 에술에 있어서 극단주의에 대한 열정은 죽음에 대한 위장된 욕망이다."    (p.111)

 

"애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딱히 그 가능성의 실현을 보장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성적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p.165)

 

이러한 문장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씌었더라면 그의 작품은 감히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그 무엇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쩌면 하루키의 성향과 대척점의 위치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비꼬는 듯한 미셸 푸코나 미셸 트루니에의 작품과도 사뭇 다르다.  밀란 쿤데라는 비존재에 대하여 심각할 정도로 진지하다.

 

"이미 말했듯 소설의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문장, 그리고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언급되지 않았던, 근본적 인간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메타포에서 태어난다. (---중략)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중략)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p.254~p.255)

 

이런 까닭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소설 이외의 또 다른 기능, 이를테면 끝없는 상상과 추론을 요구하는 놀이로서의 기능, 장난감으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어른들에게 사색의 도구로써 기능하는 셈이다.  하여,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스토리의 전개에 집중할 필요 없이 하시라도 소설의 어떤 쪽을 펴고 사색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한 문장만으로도 하루 온종일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게 한다. 

 

"여자는 분노에 찬 영혼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혼의 여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p.185)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p.228~p.229)

 

"뇌 속에는 시적 기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존재하여 우리를 매료시키고,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을 기록하는 모양이다.  토마스가 테레사를 알고 난 뒤부터 어떤 여자도 그의 뇌 속에 있는 이 지대에 아주 사소한 흔적조차도 남길 권리가 없었다."    (p.239)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어떤 현상이나 실체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전혀 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문장이 추구하는 바가 우리의 외부 현실과는 동떨어진, 실재하지 않는 비존재를 끝없이 서술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과 추론을 요구하는 소설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쩌면 독자의 상상력과 추론이 덧붙여짐으로써 한 권의 완전한 소설로 재탄생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밀란 쿤데라는 소설이 갖추어야 할 기본 골격만 제시할 뿐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셈이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p.358)

 

설을 하루 앞둔 오늘 침묵처럼 겨울비가 내렸다.  나는 정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시도 때도 없이 읽었고, 하도 여러 번 펼쳐 봐서 책의 모서리가 다 닳아버렸지만 리뷰를 쓰는 일만큼은 여전히 미루고 싶다.  내가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순수가 세월의 갈피에 닳고 또 닳아 퇴색되다가 끝내 이 리뷰와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서 두렵다.  침묵처럼, 슬픔처럼 겨울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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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어 - 세상 사람들이 뽑은 가장 소중한 단어 50
정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지난 달 이맘때쯤에 비하면 밤이 딱 내 손바닥 길이만큼 짧아졌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밤은 시나브로 제 길이를 조금씩 조금씩 줄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침 산행길에서였습니다.  짙은 어둠이 깔린 산을 오를 때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침 여섯 시는 이른 시각이었고, 어둠 속의 숲은 제 모습을 감춘 채 그저 고요 속에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불현듯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내게 갑작스러운 밝음이었습니다.  마치 다 익은 감이 뚝하고 떨어지듯 내 앞에 펼쳐진 하루의 아침은 생경한 풍경이었습니다.  생에 처음으로 맞는 아침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 느닷없음에 잠시 망연하였습니다.

 

아침의 느낌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느낌을 품은 채 정철의 <인생의 목적어>를 읽었습니다.  밝음 속에서 또렷하던 숲의 나무와 꽁지를 까딱거리며 밝게 우짖던 까치의 모습처럼 낱글자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카피라이터인 작가에게 글자는 그토록 느닷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선한 느낌은 나만의 것이었을까요?  아무튼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식이다.  엄마나 아빠가 아닌 사람은 있지만 자식이 아닌 사람은 없다.  우리는 안다.  자식들은 안다.  거의 모든 부모의 인생의 목적어가 바로 자식이라는 것을."    (p.244)

 

카피라이터는 분명 한 글자 한 글자의 낱말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쓰는 카피는 유려한 문장보다는 톡톡 튀는 발상과 일상의 권역에서 벗어난 낱말들의 생경한 배열을 추구하는, 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쉬 잊혀지지 않게 하려는, 소망을 담은 그들의 기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갈고 닦았으면 낱글자 하나하나에서 저토록 반짝이는 윤기가 날까요?

 

"달래 준다 해서 달이다.  어두운 곳에 사는 외로운 사람들을 따뜻한 빛으로 달래 준다 해서 달이다.  달동네란 달이 유난히 가까이 내려오는 동네, 달빛을 누구보다 환하게 받는 동네라는 뜻일 것이다.  지구 밖에 사는 달도 이렇게 어두운 곳을 향하는데 지구 위에 사는 당신의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시선을 조금만 돌려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바라볼 생각은 없는가."    (p.322)

 

설문을 통하여 찾았다는 인생의 목적어.  설문에 대답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50개의 인생의 목적어가 이 한 권의 책 안에 담겨있었습니다.  누구든 이 단어들을 주제로 한 권의 책을 엮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 정철만큼 새롭게 바라볼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비슷비슷한 의미의 나열은 달력에 적힌 하루하루의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가 느꼈던 오늘의 아침은 그 달력에서 폴짝 뛰어 나온 살아있는 아침이었습니다.  모름지기 글이란, 좋은 책이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믿는다,가 잘 안 되면 믿어 준다,로 시작해 보세요.

믿어 준다,가 얼마 후엔 믿는다,로 바뀝니다."     (p.143)

 

언젠가 박경리 작가는 말하셨습니다.  "왜 쓰는가?" 하는 질문은 "왜 사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라고 말이죠.  한 작가의 글에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의 정도와 색의 질감은 천차만별일 듯합니다.  단순히 글이 딱딱하거나 화려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글 속에 담겨진 작가의 마음이 문제겠지요.  '글'이란 결국 '그를 향한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철 작가의 독자를 향한 마음은 봄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까치의 울음 소리가 여직 생생합니다.  좋은 소식이 오시려나 봅니다.  소한, 대한도 다 지나고 이제는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작년 겨울에 비하면 올 겨울은 너무도 허술했던 겨울이었을까요?  아니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장군을 제가 미처 보지 못한 탓일까요?  봄처럼 포근했던 오늘, 나는 정철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따뜻한 온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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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25 13:26   좋아요 0 | URL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꼼쥐 2014-01-30 17: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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