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는 게 참 아프다. 
어제 소식을 들은 즉시 달려갔어야 했는데...
나는 전화를 받고 한참이나 갈등했었다.  그 시각 나는 아내와 아들을 대동하고 분당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빗줄기가 점차 거세지는 밖을 바라보며 내가 가르치는 아이의 슬픈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내가 달려갈 수 없는 여러 이유를 마음속으로 구차하게 떠올리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오늘 사무실에 사정을 말하고 조문을 갔었다.
폐암으로 투병을 하던 아이의 어머니는 아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아이의 아버지와 굽은 허리로도 손주들을 위해 노동일을 하시는 할머니,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장녀에게 지워질 책임을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조문객을 맞는 아이를 보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여전히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아이는 내 손을 잡고 한참이나 울었다.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아이의 여린 손에 약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황.  나는 아이의 미래가 아득하기만 했다. 
여전히 나는 그녀의 선생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타인'임을 절감한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당돌했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와 자신의 성적만 밝히며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싶다며 입을 앙다물던 아이.  나는 엄마든 아버지든 부모 중 한 사람을 모셔오지 않으면 받아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그 아이는 어차피 자신은 고아나 다름없으니 부모는 모셔올 수 없다며 그냥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말했었다.  나는 속으로 참 맹랑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의 가정형편은 같이 공부하는 친구로부터 들었다. 
그 후 나는 아이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한차례 병문안을 갔었다.
아이만 맡기고 찾아 뵙지도 못해 미안하다는 어머니의 말에 아이가 참 야무지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빨리 쾌차하시기만 하면 다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다들 형편이 고만고만한 아이들만 모아 가르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유난히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는 말없이 공부만 할 뿐 게으름이라고는 몰랐다.

그랬던 그 아이의 엄마가 어제 죽었다.
세상에서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잃고 그 아이는 오열했다.
나는 막차를 타고서라도 어제 이곳으로 내려왔어야 했다.  가장 외로웠을 때 나는 그곳에 없었고, 의례적인 조문객으로 그 아이를 찾았다.  그 아이가 희망을 잃지 않고 나의 숙소를 다시 찾아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중학생 수업을 간신히 마치고 고등학생들은 수업을 하지 못하겠다고 알렸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이 험난한 삶을 헤쳐가야 하는 아이의 미래가 미어지도록 가슴 아프다.
오늘은 정말 너무너무 사는 게 아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1-05-12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학생, 앞으로도 그렇게 앙다문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길, 먼저 세상을 뜨신 엄마의 염원이 기운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기운을 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옆에서 그런 학생들의 경우를 종종 보실텐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도 참 마음이 무거우시겠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 계신거겠지요. 꼼쥐님도 힘 내시고요.
사는거, 아프지요. 감히 저도 동의합니다.

꼼쥐 2011-05-13 15:15   좋아요 0 | URL
어제는 회사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밥맛도 없어서 하루 종일 우울했어요.
오늘 화장을 할텐데 이틀씩이나 회사에서 나올 수는 없어서 마음만 무겁습니다. 아이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답니다.
 

지난 금요일이었다.
고등학생들 수학 강의를 마치고 아이들이 문제를 풀고 있을 때, 나는 그 잠시의 짬을 헛되이 버릴 수 없어 뒷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기로 했다.
늘 잠이 부족한지라 짬짬이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집안은 금세 난장판으로 변한다.
가끔 여학생들이 청소를 거들어 주겠노라 팔을 걷어붙이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피곤에 지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마저도 거절하게 된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돌아간 후 건성건성 정리를 해도 새벽 한 시는 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으니 다음 날 출근을 생각하면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주섬주섬 빨래를 걷다가 밖을 내다보니 젊은 남녀가 심하게 말다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사는 숙소는 아파트 단지내에서 가장 뒷쪽에 위치해 있고, 뒤로는 작은 산책로가 있다.
아침이면 그 산책로를 따라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지만, 밤이면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 불빛으로는 조금 어둡다 싶은 느낌이 들어서인지 통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호젓한 길에서, 더구나 자정이 가까워 오는 한밤중에 그들의 모습은 내 시선을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빨래를 걷다 말고 잠시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니 여자는 분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는 듯 보였다.  그런 여자를 뒤로 하고 떠나려는 남자와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여자.
잠시 동안 그렇게 실갱이가 벌어졌고, 한 순간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감싸더니 갑작스레 진한 키스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빨래를 걷으러 나왔던 본연의 임무를 빨리 마쳐야겠기에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들어와 빨래를 내려 놓으며 한 마디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웬 사람들이 가로등 밑에서 뽀뽀를 하네.  이 늦은 시각에..." 했더니 사내 녀석들은 불에 데인 듯 자리에서 벗어나 뒷베란다로 몰려갔다.
빨리 들어오라고 해도 좀체 말을 듣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밖을 주시하던 아이들 중 한 녀석이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그 가엾은 청춘남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안에서 문제를 풀던 여학생들은 남자 아이들을 향해 '변태같애'라는 말을 되내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아이들은 유난히 '변태같다'는 말을 자주 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갖가지 상황에도 그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사내 녀석 중 하나가 뽀뽀를 하던 남자가 자신의 친구 같더라는 말을 하자 아이들은 또 그 아이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정말이냐며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냥 두었다가는 아침이 될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을 기세였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로 옆집 사람들이 혹시 잠이라도 깰까봐 나는 아이들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보냈다.  혈기왕성한 아이들을 보며 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짖궂었던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절로 미소가 번진다.
학교를 오가는 길목 어귀에서 흘레개라도 발견하면 돌을 던지거나  찬물을 끼얹으며 낄낄대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름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출근시간에 자가용 사용을 포기했다.
아직도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한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춥다는 느낌은 갖지 않을 정도이니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회사까지  걸어서 가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언제부턴가 퇴근 후에 내가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부를 하기 위해 나의 숙소를 찾는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이 근방의 학생들에게 나의 신상 정보가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가끔은 내가 가르치는 아이의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소개를 받고, 쑥스럽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내가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물론 학생의 부모들과 상담을 하면서 근처에 사는 어른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던가.
으레 그렇듯 그런 소문은 조금씩 과장과 허풍이 섞이게 마련이다.
나에 대한 소문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잘 가르친다는 말과 내 성격이 친절하고 자상하며 아는 것이 많다는 말도 내가 들었던 소문의 내용 중에 허풍의 한 예이다.
내게서 배우지 않는 아이들도 나에 대한 궁금증이 컸었나보다.
때로는 수업 중간에 아무개 친구라며 전할 말이 있어 왔다는 핑계를 대고는 내 얼굴만 힐끗 쳐다보고는 달아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이 근방의 아이들에게 원치도 않던 유명인이 되었다.
거리에서 낯모르는 학생이 인사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이고, 동네의 작은 가게에서도 잘 모르는 어른들이 반색을 하며 아무개 선생님 아니냐며 인사를 건넨다.  때로는 담배를 사러 들렀다가도 그렇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담배 대신 계획에도 없던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전적으로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한 행동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동네에서는 행동에 몹시 조심스러워진다. 
피우던 담배를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무단횡단을 할 수도 없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의 눈길이 항상 나를 감시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아이들과 같이 나눠 먹으라면서 떡이며, 과자며, 음료수 등을 한아름 안겨주는 경우도 많다.  가뜩이나 빠듯한 내 용돈을 생각할 때, 나는 이런 선의를 거절하지 못한다.(가끔 양심의 가책은 느낀다.  나는 생각처럼 공짜만 밝히는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다.)

나는 오늘도 걸어서 출근을 했다.
때마침 등교하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나는 괜스레 우쭐해진다.
차를 타고 출근을 할 때는 전혀 들어오지 않던 풍경들도 새롭다.
자정이 되어서야 끝나는 수업의 피곤함이 비로소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나는 반경 2km  이내의 유명인으로 살고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숙소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이럴 때면 납덩이처럼 무거운 피로가 방안 곳곳에 제멋대로 자리를 잡는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피곤한 내색을 할 수 없다.  가뜩이나 공부로 지친 아이들에게 나의 피로까지 얹어줄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언제나 기운이 넘쳐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다.  어쩌면 선생이란 위치는 가르치는 일보다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

오늘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버렸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아이.  틱 장애가 있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게 되는 그 아이는 오늘도 다르지 않았고, 학교에서와는 달리 아무도 놀리지 않는 분위기여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처음보다 더 심했는지도 모른다.(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 
중학생들의 수업을 마칠 즈음 다른 아이들의 불만이 봇물이 터지듯 터져나왔다.
시끄러워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불만과 함께 그 아이가 계속 나온다면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겠다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의 원칙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지만, 어느 누구라도 본인 스스로 개선할 수 없는 신체적 약점을 갖고 다른 친구를 놀려서는 안된다는 것.
만일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 아이는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내 방침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원칙이 보기 좋게 깨진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내 원칙을 감히(?) 깰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일주일을 버텨왔었나 보다.
어쩌면 그것이 무료로 배우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들의 쌓인 불만을 모두 듣고는 한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수업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같이 하겠지만 자습을 할 때는 그 아이만 따로 내 방에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격앙된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이 문제로 틱 장애를 가진 그 친구를 따돌려서는 안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아이들의 불만을 조용히 듣기만 하던 그 아이를 따로 불러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장애를 딛고 큰사람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는 순간 그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될 수 없는 법이라고 일러주었다.  어쩌면 자신의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 그 성과가 더욱 빛날 수도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중학생 수업이 끝나고 야자를 끝낸 고등학생들이 몰려왔을 때, 나는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 몸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아이들은 성인이 아닌 아이들이다.  배울 것도 많고, 참고 인내할 것도 많은 나이.
나는 그 아이들에게 여전히 부족한 사람임을 절감한다.
아무일도 없다는 듯 표정을 바꾸고 고등학생 수업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던지...
주말을 쉬고 다음주가 되면 오늘의 일은 이 밤처럼 까맣게 잊혀지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낮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나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예상도 못한, 내가 뭐라 대답할 수도 없는 곤혹스러운 내용이었다.

"저...00이 엄만데요.  지금 전화 받기 괜찮으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말씀 하세요."
"우리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선생님 바쁘실텐데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전화드렸어요."
"네? 아니, 왜요?"

나는 책상의 전화벨이 울리는 것도 듣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업무 시간에는 가급적 업무 외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의 결벽증에 가까운 성향도 그때는 작동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직원이 내 전화를 대신 받았고, 지금은 통화중이니 메모를 남겨달라며 전화를 끊을 때까지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00이랑은 대화를 해보셨나요?"
"몇 개월 전부터 자퇴할 생각으로 여러 정보를 알아봤었나 봐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꺼낸 말이라 말리지도 못하겠더라구요."

내가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그 학생은 유독 눈에 띄었다.
많지 않은 고등학생 중에 체구는 작지만 다부져 보였고, 유난히 말수가 적은 반면 한번 말을 꺼내면 딱 부러지게 끝을 맺는 학생이었다.
가끔, 내가 낮에 회사일로 지쳐있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피곤해 보인다며 자신들 때문에 고생시켜 드려 죄송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에 의하면 성적도 반에서 1,2등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이렇게 정을 나눌 수 있는 학생들이 있어, 그리고 가르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학생이 있어 행복했는데...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내 숙소를 찾아온 그 학생에게 자퇴에 관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혼자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짠했다.
학생의 어머니 말씀으로는 내년 4월에 검정고시를 치르고 자신이 목표하는 대학에 반드시 입학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었단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그 학생의 고단한 삶이 직장일에 지친 내 어깨에 켜켜이 내려 앉는 밤이다.  
어느날이던가 학교의 분위기도 산만하고, 상위권 대학의 합격율도 그리 높지 않아 검정고시를 볼까 하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때 나는 왜 학생의 고민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학교를 그만두어도 여전히 내게 도움을 요청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껏 모교 프리미엄을 누리고 살았던 내가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으며, 검정고시라는 외롭고 힘든 길을 선택하려는 그 학생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으랴.
친구들과 함께 이 늦은 밤까지 묵묵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학생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외로워 보인다.  내게 모교는 어떤 의미였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