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근로자의 날을 핑계로 인근의 도서관을 찾았었다. 가볍게 흐린 하늘과 활동하기에 적당한 기온, 주변을 감싸는 연록색 풍경 등으로 인해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차에서 내려 도서관 입구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데 엄마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는 귀여운 아가를 보게 되었다. 혀 짧은 발음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어가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오는 아이는 이따금 제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스스로의 행동이 무척이나 대견하다는 듯 다른 누군가의 동의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이고 우리 oo, 계단도 잘 내려가네." 하면서 아이에게 힘을 실어주곤 하였다. 나는 계단 한켠에 멈춰 서서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저 아이는 엄마와의 아름다웠던 이 순간을 언제고 기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사건이 결부되지 않는 한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은 너무도 쉽게 잊힐 테니까 말이다. 살면서 기억해야 할 작고 소중한 추억은 오히려 바람처럼 가볍게 잊히는 법이니까.'


우리가 삶의 매 순간순간을 뒤뚱거리는 아이의 느린 발걸음과 그럼에도 넘어지지 않고 앞을 향해 바르게 걸어가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집중력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다지 불안하거나 불행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은 아주 짧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건성건성, 온 힘을 다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게 아닐까. 건방을 떨면서 말이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한낮에는 제법 더위를 느낄 만큼 기온이 크게 오르지만 밤에는 소매깃으로 찬바람이 스며든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장을 나갔다가 생각지도 않은 차멀미를 했다. 며칠 앓았다고 이렇게나 체력이 떨어진 걸 보면 나도 이제 건강을 자신할 나이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읽어야 할 책이 몇 권 쌓였는데 영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걱정이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는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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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9년이 지났다. 며칠째 이어지는 미세먼지 탓인지 오늘도 하늘은 그저 뿌옇기만 하고 사람들의 기억을 비껴가는 아이들의 울음과 아우성. 이른 나이에 고인이 된 아이들의 원망과 분노는 여전히 삶을 유지하는 이 시대 정치인의 욕심과 무관심에 의해 서둘러 잊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잊혀가고 있다. 죄 많은 기성세대는 해를 더하며 또 그렇게 업을 쌓아가고, 언젠가 받게 될 자신의 업보를 무거운 줄도 모른 채 짊어지고 있다. '공정한 건 아니다만, 며칠 동안, 아니 단 하루에 있었던 일이 인생의 행로를 바꿔놓을 수도 있단다.'라고 썼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어느 소설 문구처럼 단 하루, 한 순간의 선택이 너희들로부터 남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결과를 낳게 했던 어른들의 무관심과 나태가 가슴 저릿한 아픔으로 전해진다. 해마다 오늘이면...


세월호 참사와 비슷한 이태원 참사가 현 정부의 원년에 벌어졌음에도 그에 대한 사건 당사자들의 반성이나 처벌은 거의 없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는 정권의 오만함을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소시오패스적 무관심을 말한다. 집권 1년차도 지나지 않은 정부가 지지율 30%를 하회할 정도로 민심이 극도로 이반하는 까닭은 뭐니 뭐니 해도 공감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모든 관계자들이 공감 능력이 부족하거나 전무하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때같은 자식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그리 대하지는 못한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종군 성노예와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우리 선조의 아픔과 원한을 인류애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분노를 그리 쉽게 접을 수는 없었다.


현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은 결국 그들이 수립하는 모든 정책이 인류애의 보편적 가치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현상에 대한 비판은 국수주의도 아니요, 폐쇄적 민족주의도 아니다. 인류애를 부정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이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노력이 없는 한 국민들의 민심이반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천주교 사제단의 시국미사나 대학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은 오히려 작은 저항일지도 모른다. 인류애의 보편적 가치를 저버린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모두 부정하는 일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권력이 영원할 리 없다. 그리고 반성하지 않는 권력은 비참한 종말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삶의 준칙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9주기.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의 가슴 가슴마다 노란 물결이 일지 않을까. 바람이 불고 이따금 몰려오는 비구름에 하늘은 어둡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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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4-30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간 글이 뜸하셔서 바쁘신가 생각했는데 몸이 많이 상하셨군요. 글을 쓰실 정도의 체력은 간신히 돌아오신 것 같지만 행간에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모습이 보며 안타깝습니다.
마스크를 몇년간 쓰면서 처음에는 매년 걸리던 감기도 안걸린다며 좋아했는데 최근 마스크 해제가 되면서 병의원에 외래환자가 넘쳐납니다. 흙을 만지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토피에 걸리거나 면역력이 약한 이유와 마찬가지겠지요.
부디 어서 완쾌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신랄한 글을 쓰실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요.
댓글을 허용하지 않는 글로 올리셔서 이 글이 댓글을 올립니다.

꼼쥐 2023-05-02 19:23   좋아요 1 | URL
그동안 몸이 아프고 체력도 떨어지다 보니 만사가 귀찮아지더군요.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도 꽤나 번잡한 느낌이 들었고 말이죠. 귀찮기는 해도 마스크 덕분에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잘 지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벗어던지고 나니 스스로를 방어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나 봅니다.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씩 체력을 높여가면서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샅바를 걸고 으라차차 용을 써보는 하루, 오늘을 허리 위로 높이 들어 모래판에 시원하게 메다꽂는 들배지기 한판승을 기대하였지만, 비와 황사를 핑계로 모처럼 아침운동을 거른 나는 아침부터 헤롱헤롱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들배지기 한판승은 커녕 경기 개시도 전에 GG를 선언하고 만 것이다. 오늘 나의 모습은 일본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대통령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렇다고 나는 폭탄주로 러브샷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에 찬 질문과 함께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르쳐야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사 과목은 그저 수능이나 취업을 위한 귀찮고 어려운 암기 과목 정도로만 생각했던 어른들이 우리나라 대통령의 뻘짓 덕분(?)에 우리부터 반성하고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결기를 보이는 것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에서도 '한국사 바로 알기 동호회(가칭)'를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순히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중요 포인트만 달달 외우고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잊어버리는 그와 같은 헛된 공부를 지양하고 하나를 배우더라도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취지는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다.


봄비가 그친 뒤의 청량한 공기를 기대했는데 황사의 습격으로 목이 칼칼하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샅바를 걸고 으라차차 용을 써보는 하루. 시간이 마냥 더디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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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정부의 외교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정부의 한 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이 16일 오전에 숙소인 임페리얼 호텔에 도착했을 때 로비에 있던 일본인 몇 분이 박수를 쳤고, … 17일 대통령 일행이 숙소 떠나 공항으로 갈 때 호텔의 모든 직원이 일렬로 도열해서 대통령 일행이 떠난 후까지 계속 박수를 쳤다. 일본 주민도 박수를 보냈다. 공항 직원도 박수를 보내줬다”면서 “이 정도면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데 어느정도 성공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된다”고도 했다. 일본 정부의 관계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자가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웃었다. 웃을 일 많지 않은 요즘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해 보라. 예컨대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원하는 모든 것을 싸 들고 방한하여 생각지도 못한 선물 보따리를 펼쳐 놓았을 때,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당연히 미국 대통령을 환영하며 박수를 칠 게 아닌가. 당연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일본 정부의 관계자가 자신들의 외교 성과로 발표할 일이지 우리나라의 관계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일본 정부의 관계자가 우리나라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외교 성과를 한국어로 말하는 줄 알았다.


월요일이다. 대한민국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월요병을 앓고 있을 테다. 물론 개인별 경중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중증의 월요병을 앓을 때가 더러 있다. 휴일에 너무 과격한 운동을 했다거나 밀린 업무를 보느라 쉬지를 못해서가 아니다. 해외 여러 나라의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느라 온종일 휴대폰과 씨름한 날이면 다음날 맞는 월요일은 거의 초주검 상태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시차가 서로 다른 여러 나라의 외국 친구들이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은 일주일 중 일요일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화가 많은 날은 일요일 새벽부터 전화를 받기 시작해서 밤 늦은 시각까지 통화를 하게 된다. 물론 한 명이 아닌 여러 나라의 여러 친구들과.


최근에 친구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코로나 시국에는 전 세계를 선도하던 대한민국이 지금은 어떻게 경제와 안보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나? 더구나 한 국가의 환경이 이렇게나 빠르게 급변할 수 있나?" 외국 언론의 경제면이나 정치면에 우리나라가 자주 등장하다 보니 친구들도 대한민국의 사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주로 대통령의 교체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친구들은 나의 대답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했다. 대통령 한 명 바뀐다고 대한민국과 같은 경제 대국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아무리 여러 번 반복적으로 말해줘도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의존도가 그렇게 막강하다면 그게 독재국가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나는 분단국가라는 우리나라의 사정상 대통령의 권한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게다가 그런 위험성을 잘 알면서도 정치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낮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처지가 아닌지라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정치는 확실히 기형적이다. '조선은 원래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침략론자의 발언을 일본 대학생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인용하고 있으니 오죽하겠나. 중증의 월요병 탓인지 몇 자 쓰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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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쓰기&글쓰기 2023-03-21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은 임기가 너무 기네요...

꼼쥐 2023-03-22 14:59   좋아요 1 | URL
참으로 긴 시간이 남아 있지요. 아까운 시간인데 말이죠.
 

겨울 끝자락의 냉기가 채 여물지 않은 성긴 봄기운의 틈새로 스민 탓인지 새벽 등산로는 여전히 겨울과 같은 한기를 품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갈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별빛도 없는 하늘엔 살 오른 반달이 홀로 쓸쓸했다.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 탓인지 새벽에 산을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인근의 아파트에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한 집 두 집 연이어 불빛이 밝혀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은 또 그렇게 분주한 하루를 준비하는 듯했다. 한강 작가의 시 '새벽에 들은 노래 3'이 생각나 옮겨 적는다.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 편의  시를 나직나직 읊어보는 일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저녁을 몰래 꺼내 보는 것처럼 운치가 있는 일이지만 갈수록 메말라가는 정서는 시와 나 사이의 거리를 시나브로 멀어지게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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