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가 시작됐다. 2012년 도시바가 개발한 ALPS(Advanced Liquid Processing System: 진보된 액체 처리 설비)를 통하여 핵 오염수의 일부를 정화했다고는 하지만 ALPS의 명칭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핵과 관련된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물에 섞인 오염물을 흡착하거나 이온 결합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물질에 오염수를 흐르게 하여 물에서 일부 핵종을 제거하는 방식인 ALPS는 그 성능을 다른 나라의 과학자들이 실증적으로 검증한 바도 없는, 한마디로 대용량 정수기일 뿐이다. 적어도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핵 오염수를 완전히 제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단순히 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방류를 결정한 것이다. 완전한 폐로는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이로써 지구 전체의 바닷물은 핵 오염수의 침범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히 고백하겠다. 현실적 어려움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국민 여러분께 이해를 구하겠다."고 말했었다. 취임해서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신념을 강조한 바 있다. 일본과 가장 인접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국민 대다수가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면서 수산물 섭취가 건강에 미칠 영향에 대해 불안해하는 이 마당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물고 생까는 모습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우리는 이런 비열한 자를 대통령으로 뽑았고, 그의 통치를 받는 불쌍한 국민으로 전락한 셈이다.


지난 금요일 회사 근처의 한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는데 밑반찬으로 제공된 고등어 튀김에 선뜻 손이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밥그릇 위에 제 몫으로 나온 고등어를 잽싸게 옮겨 놓았을 텐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나 역시 반찬으로 제공된 다른 수산물에 젓가락조차 대지 않았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고, 삶에서 해볼 수 있는 기본적인 경험들을 두루 겪어보았던 내 나이대의 사람들은 어쩌면 수산물 섭취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암 발병과 같은 두려움은 어떤 연령대든 피해 갈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기형아 출산은 당사자들에게도,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 계획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가 계속되는 한 남은 내 삶에서 수산물 섭취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핵 오염수 방류로 인해 전에 없던 질병의 발병률이 높아진다면 해수욕 또한 꺼려질 터, 날로 지구가 뜨거워지는 이 시국에 이 또한 불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 부부는 결혼을 앞둔 자식도 없으니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있겠지만... 아아, 이 난리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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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8-26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순히 먹거리의 문제가 아닌 환경,주권,생존의 문제인데, 향후 각국의 핵 오염수 처리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 치욕적인 사건의 멍청한 공범으로 기록될 것 같네요.

꼼쥐 2023-09-03 12:05   좋아요 1 | URL
그럴 듯합니다. 이보다 더 멍청한 짓은 없겠지요. 친일을 넘어 숭일의 단계까지 이른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단과 처사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말복도 지나 처서가 가까운데 날씨는 여전히 한여름처럼 무덥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당신도 역시 번잡했던 여름휴가의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고민 중에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의 중간은 언제나 이렇게 넘긴 힘든 고개를 넘어가듯 힘겹기만 합니다. 그에 비하면 소한 대한으로 이어지는 요즘의 겨울 추위를 견디는 일은 얼마나 수월한지요. 과거 혹한의 겨울 추위가 길게 이어지던 기억 속의 겨울에 비하면 말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당신 또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줄 압니다.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그럴 테지요.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대통령 한 명 잘못 뽑는다고 무슨 큰일이야 나겠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국민들 대부분이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크나큰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데에는 그닥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은 붕괴되었으며, 국민을 돌봐야 할 정부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던 대한민국의 공무원 제도는 이제 아이들의 놀이터인 세계 잼버리 대회 하나 치러내지 못할 수준의 보잘것없는 것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자국의 국방 안보를 오직 강대국의 힘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노력은 오히려 안쓰럽기만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힘이 약한 국가는 주변의 힘이 센 국가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 타국의 안보를 마치 제 일인 양 앞장서서 돌봐주는 국가는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재일 한국인을 뱃속 벌레로 취급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을 겪었던 강제노동 피해자의 배상금에 대해 돈만 받으면 됐지 그게 전범기업의 돈이든 한국 기업의 돈이든 무슨 상관이냐며 자국민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천한 역사 인식은 급기야 어처구니없는 광복절 경축사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독립운동을 건국운동으로 폄훼하는가 하면 광복절 경축사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분단의 현실을 말하면서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를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어떤 학술적 용어에도 없는 '공산전체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그의 지적 한계이자 무식의 발로였습니다. 그의 논리대로 하자면 군에 입대하는 모든 입영 대상자들에 대해 입대 전 먼저 사상검증을 하고 인권운동이나 진보주의 운동을 한 전력이 있는 젊은이는 모두 현역 대상에서 제외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정 반대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진보주의 운동을 한 젊은이는 1순위 징집대상이 되었고, 소위 반공을 주창하던 자들은 부동시네, 담마진이네 하면서 입대에서 제외되었던 것입니다.


1년 전의 과거를 되짚어 보면 우리는 너무나 안일한 현실 인식을 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물론 인간은 개인의 의지보다는 주변 환경에 지배되는 까닭에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기보다 등 떠밀려 살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잠에서 깨는 듯하지만 날를 둘러싼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어찌 될까? 생활비는? 우리 가족은? 등과 같은 여러 조건들에 의해 종국에는 등 떠밀려 출근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순수한 개인 의지인 듯 보이는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주변의 환경에 의해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변의 환경과 자신의 위치를 세밀히 살피지 못하면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결과에 맞닥뜨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겪는 현실처럼 말이지요.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던 세네카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 한다."고 말이지요. 결국 개인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는 타인의 생각에 지배되는 모르모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요. 대통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독서를 하지 않는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키울 만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여유를 확보할 리 없으며, 그런 지도자가 바른 역사관과 바른 현실 인식, 바른 생각과 바른 판단, 그리고 바른 명령과 지시 또는 바른 행동을 할 리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말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당신에게 먼저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던 것이 편지의 말미에 이르러 겨우 생각났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당신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당신 역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무능한 대통령 밑에서 어찌할 수 없는 치욕의 날들을 감내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보다 더 많은 임기가 그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디 건투하시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옥체를 보중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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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8-2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경악할 만한 문제들이 많아서 혼돈 속에 살고 있는 기분이에요.
사회도 눈에 띄게 흉흉해지고요. 책이라는 안식처가 있어 다행입니다.

꼼쥐 2023-08-21 08:13   좋아요 0 | URL
요즘 유행하고 있는 ‘무정부‘, ‘각자도생‘이라는 단어를 현실에서 체감하고 있습니다.

렛잇고 2023-08-2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갑갑해요. 이 정부 언제 끝나려나요.ㅠㅠ 끝이 없어보이는 중에 꼼쥐님의 글 넘 후련합니다.

꼼쥐 2023-08-21 19:09   좋아요 0 | URL
힘든 사람들끼리 이렇게 넋두리라도 해야 속이 풀릴 듯합니다. 그러다 보면 임기가 끝나겠지요.

나와같다면 2023-08-2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산주의면 공산주의고 전체주의면 전체주의지 ‘공산전체주의‘란게 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저런 말을 뱉은건지 두렵습니다

꼼쥐 2023-08-21 19:10   좋아요 1 | URL
저도 공산전체주의라는 말은 처음입니다. 무식한 것들...쯧쯧
 

채 오전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기온은 벌써 30도를 훌쩍 넘기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한 햇살과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텁텁한 습도. 연일 온열질환자가 급증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후~' 한숨을 길게 내쉬어본다. 답답한 가슴을 털어내듯. 장마가 그치자마자 비 한 방울 구경할 수 없는 잔인한 혹서기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낯선 휴가지의 어느 해변에서 맞는 이른 아침의 바람은 익숙했던 어떤 것들과 정든 사람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떨쳐내려는 듯 얼굴에 닿는 느낌마저 크게 다른 것이다. 늘 마주하던 바람이 아닌, 마치 처음 느껴보는 듯한 낯선 바람의 감촉. 견디기 힘든 혹서기에 휴가를 떠나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소슬한 느낌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최악의 여름으로 평가되었던 그해 여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겪으면서 나는 '도대체 뭐 이런 날씨가 있담?' 속으로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했었다. 견디기 힘든 삶이 이어진다고 해서 남은 삶을 스스로 조절할 수는 없는 것 역시 우리 인간인 까닭에 꾸역꾸역 혹은 그런 삶을 구차하게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욱더 치욕스러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매년 낯선 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만만치 않은 시간과 비용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봄비눈 작가의 신작 <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를 읽고 있다.

"니체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인생을 영원히 반복한다고 말하죠. 오직 한 번뿐인 이 삶을 후회하는 삶으로 만들 것인가, 다시 살고 싶은 삶으로 만들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또다시 살아도 괜찮을 만큼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사세요."  (p.9)

얼굴에 닿는 바람이 나를 어르고 있다. 도시의 열기를 실어 나르는 익숙한 바람이다. 말매미 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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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8-05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서기에는 피서(避書)로 피서(避暑)함도 필요해 보입니다.

꼼쥐 2023-08-06 12:08   좋아요 0 | URL
휴가중임에도 한동안 피서(避書)를 하면서 보냈는데 덥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더라구요. ㅎ 결국 피서(避暑)는 실패한 셈이지요. 지금은 가까운 도서관에 나와 빈둥대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첫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탓인지 거리에는 사람들 발길이 뚝 끊겼다. 이따금 강한 햇살과 타는 듯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제 갈길을 가겠다는 몇몇 학생들의 젊은 혈기와 만용이 쏟아지는 햇살에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베리아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등 이상 고온 현상이 지구 곳곳에서 관측되는 요즘, 올여름을 어찌 나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여름이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골목 가득했다. 말하자면 여름은 아이들의 계절이었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더위에 지쳐 강물에 멱을 감기도 하고, 어스름한 달밤이면 참외며 수박 등 군것질 거리를 찾아 서리를 모의하기도 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항상 나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곤 했다. 그러나 정해진 서열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코흘리개 꼬마가 제 덩치의 두 배쯤 되는 동네 형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드는 경우가 더러 있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철없는 어린아이라고 해도 제 살길을 생각하지 않고 무데뽀로 덤비는 경우는 드물었고 자신의 형 혹은 삼촌을 뒷배로 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싸움 실력으로 치자면 한 주먹 거리도 되지 않을 테지만 형이나 삼촌을 믿고 저보다 한참이나 위인 형이나 누나에게 대드는 모습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시절의 코흘리개 꼬마를 떠올리곤 한다. 일본과 미국을 뒷배로 삼아 천지분간도 없이 나대는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북한과 중국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밖에 다른 어떤 장점도 없는데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미국의 과도한 경제적 압박이나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아무런 항의나 거부 의사를 내비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형이나 삼촌의 지시를 받은 코흘리개가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읊어댐으로써 동네 형들에게 따돌림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는 형국이랄까. 철부지 어린애라면 제 이속을 차릴 줄 모르니 그와 같은 짓도 거침이 없겠지만 다 큰 어른들이 도대체 뭔 짓거리인지...


올해 들어 처음 있었던 폭염주의보는 저녁이 다 된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직장 동료들은 요즘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를 방류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해산물을 먹어두자며 점심 식사는 언제나 해산물을 1순위로 하고 있다. 해산물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것도 길어야 한두 달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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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으로 아침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의 부지런함을 마치 전쟁터의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말입니다. 어제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각에 자주 마주치는 할머니 한 분과 처음 보는 아주머니 한 분의 대화를 옮겨 보면 이러했습니다. "형님, 일찍 나오셨네요. 언제 올라오셨어요?" 하면서 아주머니가 반갑게 묻자 "나? 나는 벌써 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필라테스도 20분 하고 이제 막 내려가려는 중이야." 하면서 자신의 부지런함을 한껏 뽐내는 듯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부지런도 하셔라. 몇 시에 나오셨는데요?" 하면서 치켜세우자 "5시가 채 되기 전에 집에서 나왔을 거야." 하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답을 하고는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언제나 상냥하고 새초롬한 태도로 일관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등산로에서 자주 마주치는 욕쟁이 할머니 역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합니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지팡이 없이 씩씩하게 걷곤 하셨는데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은 언덕길에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양념처럼 가볍게 섞던 욕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내게, "여자가 이쪽으로 오면 저쪽으로 도망가고, 저쪽으로 오면 이쪽으로 도망가. 여기에 이상한 여자가 하나 있어." 하면서 말듯 모를 듯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하면서 가볍게 헤어졌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집회 대응 방식을 보면서 내가 등산로에서 만났던 이런저런 사람들을 떠올렸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그닥 달라질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이따금 미친(?) 짓거리를 하게 마련입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평범해 보이는 여성 정유정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80년대의 집회 현장처럼 매일매일이 스펙터클한 일상이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했던 경찰 공무원이라면 평화적인 시위가 무척이나 간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사라진 평화적인 시위가 오랜 시간 이어지다 보니 고위급 경찰 공무원들의 일상 또한 그날이 그날인 듯 지겹기만 했겠지요. 하여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망루에 있던 노조원을 향해 진압봉을 휘둘러 진압하게 했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조금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을 테고, 이것 또한 자신의 진급 기회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무방비 상태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캡사이신을 마구잡이로 뿌려 고통을 당하게 하는 모습도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행태가 이어지면 집회 참가자들 역시 자구책으로 다른 방법을 강구할 테고 우리는 오래전에 잊었던 80년대의 풍경을 일상처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 십분 이해가 될 듯합니다. 대화 상대가 없어 말할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어쩌다 만난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던지 종일이라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말을 쏟아냅니다. 듣는 사람이 말을 끊고 돌아서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말입니다. 현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그날이 그날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무척이나 지겨웠는지도 모릅니다.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는 모습이 그 시절의 낭만처럼 그리웠을 테지요.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때로는 혀를 자극하는 양념처럼 일상을 자극하는 강한 충동이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사람도 더러 있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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