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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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이라는 말은 달팽이처럼 느리고 완고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 형성한 제 나름의 삶의 방식을 고수한 채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삶의 방식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요지부동의 사람들에게 있어 '점진적'이라는 말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와 같은 까닭에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발짝을 내딛는다는 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며 기적에 가까운 변화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점진적'이라는 말은 혁명이자 기적을 향한 발걸음임을 새롭게 되새겨야 한다.


"당신이 잃은 건 생명보다 더한 것이었다. 말, 투명한 말의 맛, 참된 말에 대한 사랑, 그 모두를 잃은 것이다. 말 앞에서 당신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아픈 아이 같았었다. 그런데 릴케가 당신에게 먹을 것을 다시 준다. 한 편의 시, 이어지는 또 한 편의 시, 한 편의 이미지, 또 한 편의 이미지. 헐벗은 말과 함께 온전한 진실이 돌아온다. 진실과 함께 온전한 영혼이 돌아온다."  (P.26~P.27)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를 올해 두 번째 읽었다. 150쪽도 안 되는 이렇게 얇은 책을 한 해에 두 번 반복해서 읽는다는 건 전에는 없던 일이다. 가장 최근에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짧은 글을 남겼던 건 6월이었다. 나의 독서 편력(그렇다. 나는 정말 이런저런 책을 다양하게 읽고 있을 뿐 하나의 주제, 혹은 어느 한 명의 작가에 심취하여 전작(全作)을 읽는 일은 거의 없다.)에 비추어 볼 때 같은 책을, 그것도 네댓 달 만에 다시 읽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작가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삶의 저변 즉 근원에 닿는 한 문장에 영혼이 물들기 위해서'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는지도 모른다.


"혜성 같은 사랑은 영원에 단 한 번 우리의 심장을 스친다. 밤낮없이 지켜야 그걸 목격할 수 있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P.35~P.36)


누구나 그렇지만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에 매료되는 첫 번째 이유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그렇다고 미사여구만 나열한 허튼 문장이 아니라 현실에 숨겨진 진실을 간결하고 응축된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며진 아름다움과 진실되고 투명한 아름다움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나처럼 어리석은 독자도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보뱅에게서 주목할 것은 깊은 사유와 관찰을 통해 보이지 않던 관계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랑과 기다림, 피로와 어머니, 빛과 목소리, 기도와 침묵, 독서와 고통 등 우리가 미처 그 연결점을 찾지 못했던 수많은 관계와 이어짐을. 혹은 그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반면 여자들은 굶주린 고양이 같은 고통을 받아들인다. 되살아나려면 그들을 파괴할 필요가 있는 고양이이다. 그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되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리고 고통으로 정지된 이 시간을 메우려고 책을, 소설을 편다. 여전히 소설이다. 거기서 그들은 각각의 나날 속에 내재된 그것을 발견한다. 희망과 영락, 근심과 은총, 살아감의 영원한 상처를."  (p.89~p.90)


휴일 한낮의 소음이 빛의 소멸과 함께 빠르게 스러지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고,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고 썼던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은 불어오는 저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압도한다. '당신이 신문을 빠짐없이 낱낱이 읽을 수 있는 건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골목을 빠져나온 바람이 회오리처럼 가볍게 맴을 돌다 스러지듯 명멸하는 나의 기억 속에서 아주 잠깐 스쳐간다. 바람이 바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장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휴일 하루가 또 그렇게 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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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듣는 클래식 - 클래식이 내 인생에 들어온 날
유승준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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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가을비는 왠지 후줄근하고 추레한 느낌이 먼저 드는 것이다. 아스팔트를 뒤덮은 낙엽 더미가 떠오르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비에 젖어 볼품없어진 은행잎이나 단풍잎의 잔해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배수구로 쓸려가는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씁쓸하다. 마치 우리네 삶의 끝자락을 보고 있는 듯해서 말이다. 비가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낮게 깔리는 피아노 선율에 젖어 있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끝이 어디든 한번 시위를 떠난 사랑의 화살은 어딘가에 꽂힐 때까지 날아가는 법입니다.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미소가 머금어진다면 사랑에 빠진 것이고, 눈물이 난다면 실연의 아픔을 겪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생채기가 아물면 다시 사랑할 시간이 올 겁니다. 거센 겨울비가 내리는 밤 홀로 남겨진 쇼팽이 고독의 심연 속에서 위대한 음악을 만든 것처럼 말입니다."  (p.128)


나는 며칠째 유승준의 음악 에세이 <오십에 듣는 클래식>을 읽고 있다. 클래식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짬이 날 때마다 즐겨 듣는 까닭에 책에서 작가가 토로한 여러 문장에 나는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사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데 무슨 나이 구분이 필요할까마는 나이에 따라 좋아하는 곡도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더구나 오늘은 대입 수능일. 오늘이 지나면 수능 시험을 본 학생들이 한동안 긴장감을 잃고 방황하는 시기가 아닌가. 젊은 시절의 열정과 사랑,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고스란히 담은 명곡을 듣고 클래식에 빠져드는 시기도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다.


"억지로 듣는 음악이 아니고, 뭔가를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음악이 아니어서 좋았습니다. 가사가 없어서 더 좋았습니다. 물론 클래식 음악에도 가사가 있는 장르가 있지만, 팝송이나 가요처럼 자극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았습니다. 멜로디와 하모니를 따라서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면 되니 편안했습니다."  (p.17~p.18 'prologue' 중에서)


작가도 언급한 것처럼 그림이나 음악은 언어를 통한 대화의 매체가 아닌 까닭에 창작자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의무나 부담감이 없다. 언어는 말을 하는 상대방의 분명한 의도와 말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언어는 그만큼 직설적이면서도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은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감상하는 나의 감정이나 느낌이 중요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음악이나 미술은 작품 감상을 하는 관객의 상상력이 중시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의 각기 다른 상상력에 의해 해석의 여지도 다양하게 변하는 까닭에 음악이나 미술은 오히려 젊은이의 차지일 수도 있다. 자신의 미래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며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이 음악에 심취한 어느 관객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첼로 연주로 들어보신 적 있나요? 피아노나 바이올린 혹은 오케스트라 연주와는 또 다른 감성을 전해줍니다. 피아노가 막 사랑에 빠진 엘가와 캐롤라인의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고, 바이올린이 행복의 절정에 있는 엘가와 캐롤라인의 가슴 벅찬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첼로는 황혼 녘에 테라스에 앉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엘가와 캐롤라인의 넉넉하면서도 애잔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p.320)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에 5편의 클래식 곡과 5명의 음악가에 얽힌 비화를 다룸으로써 우리의 귀에 익숙한 20편의 클래식 곡을 작가 나름의 해석과 감상을 덧붙여 놓았다. 이를테면 눈으로 읽는 클래식 명곡 감상이랄까. 오늘처럼 가을비가 촉촉이 내려 손발은 물론 가슴까지 시려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클래식 명곡을 틀어놓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드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을 모두 내려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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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오페라 - 아름다운 사랑과 전율의 배신, 운명적 서사 25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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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내가 속한 고등학교 동창 모임의 송년 회합은 오페라 공연 관람이 주가 되었다. 12월의 어느 날을 골라 참석이 가능한 사람의 인원수를 체크하고, 회장이나 총무가 티켓을 예매하여 공연 당일 저녁에 모여 가벼운 식사와 함께 티켓을 배부하면 공연 관람으로 하루의 일정이 마무리되는, 예전에는 없던 건전한(?) 모임으로 바뀐 것이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을 보던 젊은 시절의 모임은 이제 친구들 모두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술에 관대하던 지난 시절의 문화도 많이 바뀌어 온 게 사실이고 말이다. 그렇게 관람한 오페라 공연이 제법 된다. 오페라의 '오'자도 모르던 친구들이 이제는 자신이 듣고 배운 오페라에 대한 지식을 뽐내느라 여념이 없는 걸 볼라치면 절로 웃음이 나오곤 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인터넷에서 스치듯 본 오페라 공연 소식이나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보게 되는 오페라 관련 서적의 제목을 꼼꼼히 적어 두었다가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알리곤 한다. 그것이 마치 나만 알고 있는 대단한 지식이라도 되는 양.


"물론 오페라를 생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소극장이나 야외 공연도 병행하는 뮤지컬과 달리 대부분 전용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는 낯설고 먼 장르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페라도 콘서트나 뮤지컬처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장르입니다. 오페라도 결국 하나의 단편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뮤지컬이 개인의 꿈과 사랑의 드라마를 노래한다면, 오페라는 역사나 인생의 역경을 표현하는 문학적인 줄거리를 노래합니다. 다채로운 매력으로 완전한 문학적 서사를 펼치는 무대. 성악가의 육성으로 전해지는 전율을 '오페라'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p.5~p.6 'Prologue' 중에서)


우리의 삶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끝나버리는 까닭에 살아가는 동안 나에 대한 기억이 타인의 기억 마당 한 귀퉁이에서 한껏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싶다. 친구들과 오페라 공연을 관람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문화콘텐츠 전문작가인 이서희가 쓴 『방구석 오페라(리텍콘텐츠, 2023.11.01)』는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음직한 오페라 25편을 소개하며, 이를 통하여 우리 삶에 색다른 전율을 전해준다. 우리가 오페라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페라 속 인물들이 우리들 각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감동적인 순간 이후로 이끌리듯 오페라를 찾아다녔다는 저자의 경험처럼 우리는 다만 오페라에 대한 '첫 경험'이 중요할 뿐, 오페라에 빠져드는 그다음 과정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오페라는 결국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환상과 비참한 현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곡 '밤의 여왕의 아리아(Konigin der Nacht)'가 탄생합니다. 해당 아리아의 유명세로, <마술피리>는 오페라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작품으로 자주 선정됩니다. 이처럼 <마술피리>는 어렵지 않게, 익숙하게 감상하기 좋은 작품입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어울려 무대를 즐기다 보면 작품 속 인물들과 긴 여정을 함께한 것처럼 어느새 끈끈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p.161)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변장까지 한 <피델리오>나 젊음을 얻기 위해 잔혹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파우스트> 등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낸 25편의 명작 오페라를 담고 있는 <방구석 오페라>는 어쩌면 오페라라는 낯선 장르를 경험하는 데 지레 겁을 먹었던 사람들에게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려주는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동문 모임에서 있었던 단체 오페라 관람을 통하여 오페라라는 낯선 장르를 어렵사리 경험하게 되었던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이 오페라라는 낯선 세계로 안내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인생 또한 얼마나 풍요로워질 것인가.


"<마탄의 사수>는 하나의 사건에 엮인 여러 인물의 입장과 마음을 다각도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극을 감상하며 인물들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리다 보면 누군가의 욕망에 동화된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p.192~p.193)


날씨가 춥다. 갑자기 변한 날씨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2023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올해도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함께 편안한 의자에 앉아 화려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오페라를 감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보낸 즐거웠던 추억이 내 모습과 함께 친구들의 기억 한 귀퉁이를 차지할 테고 나의 역사가 시나브로 타인의 기억 속에서 완성되어 갈 것이다. 오페라의 조명이 화려하게 빛나는 것처럼 우리네 생명의 불빛이 환하게 타오르는 한 나의 서사는 계속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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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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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소설 속 인물은 입체적이다. 작가의 소설 단 두 권을 읽어본 사람이 단도직입적으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차원적인 인물을 다면적인 모습의 살아 숨쉬는 듯한 인물로 재창조한다는 것은 웬만한 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신진 작가(2018년 데뷔)라고 말할 수 있는 장류진 작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그녀의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작가의 필력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대상이 관여하는 관계의 연관성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작가도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연구와 관찰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액셀을 밟은 발에도 살짝 더 힘을 줬다. 하늘과 구름, 연둣빛 잎사귀들을 머금은 호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나는 운전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신기한 일이었다. 심지어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드라이브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운전이 하고 싶어서 핸들을 잡는 사람들의 마음을."  (p.43 '연수' 중에서)


표제작인 '연수'를 포함하여 총 6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소설집 <연수>는 작가의 작품 중 내가 두 번째로 선택한 책이다. 내가 처음 읽었던 장류진의 소설은 <달까지 가자>였다. 코로나 시국에 코인 투자 열기가 뜨겁던 당시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세 여성의 유쾌한 생존 분투기를 그린 <달까지 가자>는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그 길로 소설가 장류진의 팬이 되고 말았다. 소설집 <연수> 또한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운전공포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주연'이 동네 맘카페를 통해 알게 된 '작달막한 단발머리 아주머니' 운전강사로부터 도로 연수를 받으면서 가볍게 스쳐갈 수도 있는 그 짧은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연수', 이박 삼일의 대기업 합숙면접에 참여한 '지원'이 조원 모두가 참여하는 협동 장기자랑 '펀펀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과 위기 상황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펀펀 페스티벌'.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지닌 새중앙에너지의 팀장 '김건일'은 '천 사장'이 운영하는 술집 '천의 얼굴'을 단골 회식 장소로 택하곤 했는데 '현수영'이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새중앙에너지의 회식문화는 급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쇠락을 이어가는 '천의 얼굴'과 암에 걸린 '천 사장'. '김건일' 부장은 '현수영'에게 은밀한 부탁을 하게 된다는 내용의 '공모'. 로드바이크 동호회를 운영하는 '나'와 회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면들을 그린 '라이딩 크루'와 작은 방송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선진'의 올림픽 취재기를 그린 '동계올림픽'.


"요즘 자주 하는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 또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말하자면 이런 것들. 어떤 착한 사람이 나를 납치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로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 두 팔을 등 뒤에서 묶고 극세사로 만든 보송보송한 안대로 내 눈을 가리고 하얀 봉고차에 태운 다음 내가 모르는 곳, 나를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줬으면. 그래서 딱 한달만 날 가뒀다가 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같은 것들."  (p.271 '동계올림픽' 중에서)


서른두 살의 나이에 국문과에 진학한 '박미라'. 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성공해 억만장자의 부자가 되었지만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었던 미라는 소설창작회 멤버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등 수모를 겪은 후 그리스로 창작 여행을 떠나게 되고, 졸업을 앞둔 '나'는 미라 언니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창작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미라 언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뛰어난 작품을 내놓는데...


"라라. 그러고 보니 언니에게는 필명이 있었다. 핸드폰 번호 바꾸고 필명을 쓰면 다시 소설 써내는 데 별문제 없지 않겠느냐고,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아물면 다시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내일 언니한테 그렇게 말해줘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멀어지는 하얀 차를 바라봤다."  (p.330 '미라와 라라' 중에서)


위대한 소설가는 어쩌면 글솜씨가 빼어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 그곳에 속한 사람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꾸준히 관찰하는, 말하자면 이 사회와 그에 속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남들보다 곱절은 뛰어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준에서 바라볼 때 장류진 작가는 분명 소설가로서 크게 성장할 사람인 듯 여겨진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평론가의 입장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갖는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1차적인 이유는 너와 나의 관계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며 우리네 삶의 8할은 결국 관계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소설가는 보이지 않는 그곳에 환히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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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 SF 작가 최의택의 낯설고 익숙한 장애 체험기
최의택 지음 / 교양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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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적어도 10여 년 전까지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이전까지로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을 다녀간 외국인이나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살았던 외국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너도나도 한국인의 '정'에 대해 말해 왔으니까 나 역시 그런 줄 알았고,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나의 성장기를 뒤돌아보더라도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음은 물론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을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상이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 오래전 풍습이 유지되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옛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어 사전에도 없다는 '정'이 일종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브랜드인 양 생각하며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이제는 더 이상 '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독서를 통해 배우고 있다. 자신의 아픔을 책으로 쓴 에세이를 읽고도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일인 양 아파하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마음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호기심 혹은 동물원의 희귀 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신기함, 어쩌면 그런 마음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럴진대 대한민국의 브랜드가 더 이상 '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현실 아닌가. 나는 최의택 작가의 에세이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단단히 고정한 다음 자퇴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보조 선생님과 함께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2층 교사 휴게실로 갔다. 2층 복도 저 끝에 가방을 들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엄마 얼굴이 보였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온몸을 들썩이며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는 물론 보조 선생님까지 눈물을 보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앞이 뿌예진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억억억 하면서 엄마랑 학교를 나서면서 그때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건 딱 하나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망함. 그 허망함을 자초한 건 분명 나였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내가 살면서 내린 선택 중 가장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내리치는 철퇴로 산산조각 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까."  (p.33~p.34)


근육병(선천성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작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이 오직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라봐 왔고,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세상과 단절된 채 집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쓰고 있는 책의 곳곳에는 유머가 넘치고, 이 사람이 과연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대목도 여럿 등장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가장 깊은 슬픔이 가장 큰 웃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뜬금없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때, 전부는 아닐지라도 분명 비극적인 사건으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이 에세이처럼, 인생은 멀리서 조망하며 인생 자체를 개인이 감독으로서 재편집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네 인생은 나름대로 재밌는 인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22)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작가가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10여 년의 기억이 담긴 1장과 2장에는 <슈뢰딩거의 아이들>로 문학상을 받고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고군분투가, 그리고 3장에는 SF 소설가로서 작가가 체득한 글짓기 방법과 최의택이라는 한 인물의 세계가 그려진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이따금 직장 동료들과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세상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던 어느 후배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 같은 게 웅크리고 잇다. 나의 장애를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알게 되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두렵긴 하다. 하지만 이제 와 멈출 수도 없다. 그러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여행하는 것처럼 가볍게 가보려 한다."  (p.13 '프롤로그' 중에서)


우리는 이제 당신의 아픔이 나의 언어가 아닌, 이해도 할 수 없는 먼 이국의 언어가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당신의 아픔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채 당신만의 아픔으로 남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먼지만 날리는 슬픈 내 마음의 풍경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부끄러운 현실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아픔이 오롯이 나의 언어로 이해되는 그날을 꿈꾸고 있다. 그날이 오면 대한민국의 브랜드도 다시 '정'으로 환원되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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