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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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던 어느 여성 생태학자가 생애 처음으로 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70에 가까웠다. 늘그막에 웬 소설이냐고 타박을 들어도 한참을 들었을 나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여인의 소설이 어찌 된 일인지 입에서 입으로 조금씩 소문이 나더니 2018년 출간 이후, 2022년 1월 기준으로 1,200만 부가 팔리면서 미국에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음은 물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실로 놀랍지 않은가. 책이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박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놀랍지만 그것이 생애 첫 작품이라니...


1960~70년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했던 당시의 시대상과 척박했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가 잘 어우러진, 게다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어느 누구의 보호나 보살팜도 없이 자란 탓에 자본주의 공동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처절한 고독과 사랑에 대한 갈망, 배신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애착과 자연의 순환 구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성장했던 한 여인의 성장 스토리는 자본과 유불리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외톨이가 된 카야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p.13)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카야는 다섯 아이의 막내였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넘어가던 시기에 엄마를 필두로 언니 오빠들이 모두 아빠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싸우다가 왼쪽 허벅다리에 파편을 맞고 폐인이 된 아버지의 수입원은 매주 수령하는 상이군인 연금이 유일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조디 오빠마저 집을 떠난 후 카야는 아버지와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빨래를 하고, 땔감을 구해 오고,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카야는 오빠의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앉아 하루의 끝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아주 짧은 찰나 어지러운 침대며 묵은 빨래 더미들이 바깥의 나무들보다 훨씬 또렷하고 다채롭게 보였다."  (p.25)


글을 읽을 줄도 셈을 할 줄도 몰랐던 카야가 학교에 갔었던 건 단 하루. 아이들의 놀림과 마을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에 카야는 스스로 습지에서의 고독을 선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을 모르는 카야는 편지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편지를 읽은 아빠는 편지는 물론 엄마의 체취가 묻은 모든 것을 불에 태우고 떠나버린다.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진 카야는 홍합을 캐고 훈제 물고기를 팔아 식료품을 사고 보트에 연료를 채웠다. 이런 모습을 가엾게 여긴 건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점핑 부부와 조디 오빠의 친구인 테이트가 유일했다. 흑인인 점핑 부부는 교회에서 얻어온 헌 옷과 신발을 주기도 하고 카야가 캐 온 홍합을 구매하기도 했다. 한편 습지 생태계를 잘 알고 있는 테이트는 카야에게 글을 가르치고, 카야와 함께 습지 생물들을 관찰하면서 애정을 키워갔다. 마을의 백인 사회에서 카야는 마시 걸로 불리는 것은 물론 더럽고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록수는 몰라도 시카모어는 이미 눈치를 챘다. 암회색 하늘 가득 수천 장의 황금빛 잎사귀를 휘날렸다. 어느 날 오후 늦게 수업이 끝난 뒤 테이트는 가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도 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테이트와 카야는 숲속 통나무집에 함께 앉아 있었다."  (p.153)


습지를 탐험하고 관찰하는 친구이자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테이트가 대학 진학과 함께 도시로 떠나자 카야는 다시 혼자가 된다.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던 테이트. 그러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테이트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외로움만 커져간다. 결국 카야는 바람둥이 체이스와 사귀게 되고, 학업을 마친 테이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카야에 대한 사랑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미안함을 안고 있었던 테이트는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카야의 습지 생물에 대한 관찰 기록과 수집품을 본 테이트는 출판을 권유하고 그렇게 카야는 출판 기념회에 초대된다. 그 덕분에 군인이 된 조디 오빠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신문에서 체이스의 약혼 소식을 접하게 된 카야는 분노한다. 카야를 단지 노리갯감으로 여겼던 체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카야를 만나러 오지만 카야는 이를 단호하게 뿌리친다. 화가 난 체이스는 카야를 폭행한다. 그러나 카야가 자신의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 관계자를 만나러 마을을 떠난 사이에 체이스가 20m 망루 위에서 떨어져 죽게 되고 카야는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p.434)


델리아 오언스의 첫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얼어붙은 독자들의 마음을 녹이고 주인공인 카야의 삶에 깊이 주목할 수 있게 되었던 까닭은 문학적 아름다움과 소설의 구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갈매기가 울고 파도가 치는 등 자연의 침묵 속에서 간간이 퍼지는 자연의 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숨결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작가의 호흡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리라. 자연을 동경하지만 무지와 두려움으로 인해 배척으로 일관해왔던 나와 같은 도시내기의 태곳적 향수는 카야라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산들바람처럼 스쳐가던 아름다운 문장들...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읽었던 게 아니라 어느 오지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나절을 머무르다 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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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팅 : 더 나은 인생을 위한 그만두기의 기술
줄리아 켈러 지음, 박지선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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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의 아시안컵 8강전 축구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16강전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도 그랬고 이번 경기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후반전 막바지까지 끌려가다가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서야 겨우 동점골을 넣음으로써 연장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극적인 것을 떠나 지켜보는 국민들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후반전 추가시간도 거의 끝나갈 무렵, '졌구나' 하는 체념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순간에 터진 동점골. 텔레비전으로 시청을 하는 우리도 이럴진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는 마음에 저절로 울컥해지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유행어처럼 쓰게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우리는 간혹 그릿(Grit)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젤라 더크워스가 주창한 이 개념은 사실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s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이며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치는 투지 또는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성공'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마치 전쟁터에 나서는 군인처럼 끝없는 투지를 요구받기도 한다. 어떠한 이유로든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패배자' 혹은 '실패자'라는 낙인을 각오해야만 한다. 오늘 새벽에 펼쳐졌던 축구 경기도 다르지 않았다. 사력을 다한 선수들이 이제는 더 이상 뛰기 힘들다며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더라면 경기를 지켜봤던 많은 국민들로부터 그런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낙인은 그들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벗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릿의 유무가 삶을 재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인식에 의문을 갖길 바란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자유를 여러분에게 주고 싶다. 언제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자유, 시작한 모든 일을 끝마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자유를 주고 싶다.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꺼이 그만두면 삶의 가능성은 확장될 수 있다. 이는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을 놓더라도 자신에게 기회가 많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퀴팅은 희망으로, 내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의 일을 그만두는 것으로써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얻는다."  (p.38 '머리말' 중에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릿은 미덕이고 퀴팅은 죄악이라고 믿게 되었다. <퀴팅(Quitting)>의 저자인 줄리아 켈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다가 그만두었던 경험, <시카고 트리뷴>에 입사해 기자로 일하면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만두고, 8권의 소설 시리즈를 집필하여 자신의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경험을 되살려 <퀴팅>을 썼다. PART 1 '퀴팅의 과학: 뇌는 퀴팅을 원한다', PART 2 '만들어진 그릿의 신화: "이제 그만할래"는 어떻게 모욕적인 말이 되었는가', PART 3'퀴팅의 기술: 다시 시작하는 법'의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무책임한 조언을 하자는 게 아니라 시작했던 어떤 일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그만둘 것인지 계속할 것인지를 냉철하게 결정할 수 있는 판단 근거를 제공한다.


"삶은 도박이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책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 책에서는 삶이 무조건 자기 책임이라고 호언장담한다."  (p.154)


노력한다고 누구나 다 일론 머스크가 되지는 않는다. 온갖 노력을 쏟아부으며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능력과 한계는 어렴풋이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이 쏟았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혹은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두려워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그런 상황을 적어도 한 번은 맞닥뜨리게 된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낸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그동안 쌓아온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과정을 벗어나고 보면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이 과거 자신이 누렸던 세상에 비해 좋을 수도 아니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용서다. 매번 상황을 바로잡지는 않았던, 실패하기도 했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실패할 테니까. 실패하고 계속 무언가를 그만둘 테니까."  (p.331 '맺음말' 중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궤변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시작하는 모든 일은 자의든 타의든 결국 그만두기 위함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어느 누구도 간절히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던 어떤 순간, 계속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어떤 순간부터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죽음 이후에 더 나은 삶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다를 뿐이다. 단 한 번뿐인 삶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도 이와 같은 규칙을 적용하려 드는지도 모른다. 익숙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가 하는 일과 추구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죄의식이나 열패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언제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신중한 판단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그만두라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만둘 시기를 하염없이 미루는 고지식한 사람이나 기준도 없이 수시로 그만두는 프로 이직러 모두에게 필요한 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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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오다 -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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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보다 부업을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피디이면서 동시에 작가인 사람들도 섞여 있는데 김현우 피디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다큐멘터리 피디이자 번역가인 그는 작가로서도 손색이 없는 듯 보인다. 손색이 없다기보다 뛰어나다. 한 가지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고... EBS 《다큐프라임》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 몇몇을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과 해야 할 일을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피디와 작가는 서로 닮아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전달하는 매체가 영상과 언어라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책 한 권으로 묶일 만큼의 글을 써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동안 뭔가가 정리되기는 했다. 글쓰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직업이었다. 대충 삼십대의 시기와 겹치는 십여 년을 이렇게 정리해보고 나니 뭔가 더 분명히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삶은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건 좀처럼 자신이 생기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p.253 '에필로그' 중에서)


작가의 본업인 다큐멘터리 기획 및 촬영을 위해, 그리고 잠시의 짬을 내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기록한 글을 책으로 엮은 <건너오다>는 작가가 다녀온 17개국 38개 도시를 선별하여 실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프랑스 파리나 영국의 런던 등도 있고, 미국의 로렌스, 앤아버, 미즐라와 호주의 마운트아니자, 필리핀 아닐라오 등의 이름도 생소한 도시들도 나온다. 특이한 것은 작가가 연출했던 작품 <김연수의 열하일기>의 배경이었던 중국의 변문진과 진황도 등의 기록도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일반 에세이스트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지명들이다.


"과거의 국경이었던 곳, 지금은 그런 과거를 전혀 모른 채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변문진의 일면산역에서, 경계를 넘는 방법을 생각했다. 경계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경계가 아니라 경계 앞에 선 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욕심이고, 욕심의 다른 이름인 미련 혹은 집착이고, 두려움이다. 장백산 담배 한 개비가 확인해준 사실이다."  (p.236)


육체의 성장은 시간과 영양을 공급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이나 영혼의 성장은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이나 애정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거기에는 반드시 여행과 같은 개인의 적극적인 체험이나 노력이 덧붙여져야만 한다. 어느 낯선 여행지에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삶의 허무나 고독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전보다 한 뼘 더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넓어진 마음의 여백을 지워지지 않는 삶의 의미로 채워가야 한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버린 나가사키의 도심을 폐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그곳을 '버리지' 않았다. 폐허는 오히려 나의 마음속 정경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버리다'라는 단어는 어쩌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어감만큼 잔인한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버림은 어쩌면 무관심의 동의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건 '(버림받는 대상에 대한 악의를 품고) 망가뜨리다'의 의미보다는, '적극적으로 지켜주거나 돌보지는 않는다'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적극적인 관심 혹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폐허가 된다. 상점들이 문을 닫은 나가사키의 도심에서 나의 마음이 '폐허'라고 느낀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다."  (p.195)


작가의 사색이나 체험의 기록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은 어쩌면 그가 존 버거와 같은 대가의 책을 여러 권 번역하고, 그것을 의미가 통하도록 수차례 반복하여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던 것처럼 한 권의 책을 써냈다고 그의 삶이 크게 달라질 거야 없겠지만 영혼이 성장하는 만큼 넓어진 마음의 여백이 허무와 공란으로 남지 않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키를 집안 문틀에 새겨 넣는 것처럼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다는 것은 영혼의 성장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이 쓴 책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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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지음, 황규백 그림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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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다>. 책의 제목 치고는 너무나 평범하고 밋밋하다. 평범하다 못해 촌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런 촌스럽고 밋밋한 제목도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저자가 살아온 길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와 같은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없을 듯 여겨지기도 한다. 저자가 걸어온 길이 그대로 책의 제목으로 걸린 듯 어디 하나 어색한 구석이 없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괴테 할머니'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저자 전영애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인생을 배우는, '인생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저자였기에 <인생을 배우다>라는 책의 제목은 더없이 잘 어울리는 듯 여겨진다.


"남의 삶을 세세히 알 수야 없다. 그러므로 남들은 대체로 편안하거나 그저 그만한 것 같고 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앞을 스쳐가는 삶의 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p.139)


한국을 대표하는 독문학자이자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동양 여성 연구자 최초로 '괴테 금메달'을 받은 명실공히 괴테 권위자이기도 한 전영애 서울대 교수가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마음에 떠오르는 단상과 후배들에게 전하고픈 삶의 지혜를 담아 책으로 펴낸 <인생을 배우다>는 저자의 푸근한 인상처럼, 자신의 삶을 통하여 둥글게 마모된 마음의 원형이 여유와 기품으로 묻어난다. 삶 자체로 기쁨이고 선물인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을 전하고 싶은 욕심, 그것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였다고 밝히는 저자는 자신이 만났던 아름다운 인연들을 소개하며 우리처럼 각박한 현대인들이 이따금 잊고 있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뿐만 아니라 프란츠 카프카, 니체, 쿤체 시인 등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문학세계가 황규백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담겨 있어, 책을 읽는 즐거움과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마모되지 않고 이런 삶의 이치를 생각하는 순간도 좀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끔씩, 잠시나마 그 사슬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젊은 날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있어야, 그런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세상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76)


저자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여백서원을 짓고 가꾸었다고 말한다. '혼자 힘으로, 외로움의 힘으로 만든 이 터에서 여러 사람이 쉬고 배우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는 저자와 같은 참어른이 있는가 하면, 159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숨진 이태원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자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끄러운 어른들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정치인들을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지 않는 한 우리의 젊은이들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병들고 마모될 게 뻔한 일, 기성세대의 책임이란 바로 그런 것, 자본의 사슬로부터 우리 젊은이들을 구출하여 젊음의 태동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닐까. 달리 더 무엇을 해줄 것인가.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친구들의 소중함을 좀 더 가르쳐야 할 것 같다. 내가 남을,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나도 자동으로 귀해지는 이 자명한 이치를 마음에 새겨주어야 할 것 같다. 능률화가 가속화되는 미래에는 인구의 8할 정도는 불필요하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고, 빈부격차의 심화도 심각하게 체감된다. 우리가 파멸로 가는 공룡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p.164)


현 정부 들어 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이 가속적으로 늘고 있다. 그에 따라 전에는 없거나 찾기 어려웠던 증오 범죄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야당 대표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갈고 목을 찌르는 연습을 해온 정신 나간 자도 있었고, 여당의 여성 국회의원에게 상해를 입힌 미성년자도 있었다. 이런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의 정치인들은 그 심각성도 인지하지 못한 채 증오심만 부추기고 있다. 폭주하는 증오 기관차의 끝을 보자는 것. 우리는 그 결말을 향해 오늘도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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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 고명재 산문집
고명재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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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신체의 변화 중 하나는 이따금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푸른 멍 자국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과 부딪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고 보면 보란 듯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아픈 것도 아니요,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중병도 아닌데 병원을 가거나 누군가에게 내보이며 엄살을 떨 만한 거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어디서 무엇에 부딪혔을지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아마도 젊은 시절에 비해 피부도 얇아지고 외부 충격에 대한 감각도 둔해진 탓이리라.


우리 신체의 외부 충격에 대한 반응이 감각이라면 우리 영혼의 외피에 가해지는 충격에 대한 반응은 감정이 아닐까 싶다. 신체에 가해지는 외부의 충격, 이를테면 부딪히거나 데거나 추위에 노출되거나 간지럽힘을 당하는 등의 여러 충격에 대해 우리는 각각 다른 형태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외부로부터 듣는 소식, 예컨대 슬프거나 기쁘거나 놀랍거나 화나는 소식 등에 대해 우리 영혼은 각각에 맞는 감정을 자신의 신체를 통해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둔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을 굳이 노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예방 차원이 아닐까 싶다. 둔해진 감각을 통해 죽음의 고통을 약화시키고 둔감해진 감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의 고통을 조금쯤 덜어내는 게 아닐까.


"이처럼 극도로 아름답고 순정한 것은 우리의 기관器官을 철저하게 파괴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분산시켰다. 눈眼으로 견딜 수 없다면 아름다움을 나누자. 그 후로 그것이 밀주처럼 태어났다. 그것은 눈 쌓이는 소리보다 고요한데 귓속에서는 화산보다 크게 울리고 그것은 꽃 하나 없이 백리를 넘어 사람들 마음에 맹렬하고 은은한 향기를 찌른다. 그렇게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음악이 생겼다. 마음을 열고 깊이 맡는 향기가 생겼다. 지금도 우리는 그 노래를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시라고 한다."  (p.134)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수시로 점검하고 예민하게 유지해야 한다. 특히 압축된 언어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시인은 하시라도 젊은 감각과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읽는 내내 나는 신체의 감각과 영혼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 글은 어쩌면 리뷰라기보다 리뷰를 가장한 나의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키워준 비구니 스님을 떠나보낸 후의 슬픔과 그리움이 잘 벼린 칼날처럼 독자들의 가슴을 찌르는,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갈무리하는 시인의 절제된 문장들이 감각과 감정이 날로 둔해지는 나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을 강에 뿌렸다. 아무리 재를 흘려도 강은 맑게 흐르고 그 강변을 걸으면 당신이 되살아난다. 얼굴에 검댕이 묻고 숯이 번진다. 그러나 이제 숯을 씻어내지는 않는다 열과 빛을 간직한 채 살기로 했다. 서서히 땅거미 내리고 소리가 잠기고 저녁이 오면 강물에 숯이 풀리고 그렇게 모든 강물은 탄천이 되어 우리 속을 세차게 흐르고 있다."  (p.248)


나이가 든다는 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생긴 정강이의 멍을 발견하는 것처럼 영혼의 외피에 생긴 멍울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뒤늦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시가 되고, 음악이 되고, 그림이 되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가슴속 멍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올 것이 있다. 비와 눈은 오는 것. 기다리는 것. 꿈의 속성은 비와 눈처럼 녹는다는 것. 비와 눈과 사람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라지며 강하게 남아 있는 것. 남아서 쓰는 것. 가슴을 쏟는 것. 열고 사는 것.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것. 그렇게 행과 행 사이를 날아가는 것."  (p.253)


꽤나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리뷰를(리뷰를 가장한 나의 생각을) 쓰자니 문장은 얽히고 생각은 뒤섞인다. 늦잠을 자고 만 휴일의 게으름이 문장 곳곳을 파고들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의 리뷰를 남겨야 하겠다고 결심했던 건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시인의 감각이 몹시도 탐나서, 둔감해지는 나의 감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아마도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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