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을 꿈꾸다 - 빛과 얼음의 땅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배리 로페즈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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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책은 다 읽고 나면 생각지도 못한 얼굴 하나가 문득 떠오르곤 한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때론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일 수도 있고, 할머니일 수도 있으며, 갑자기 세상을 떠난 가까웠던 친구의 얼굴일 수도 있다. 이따금 일면식도 없었던 엉뚱한 사람일 수도 있다. 배리 로페즈의 저서 <북극을 꿈꾸다>를 다 읽었을 때도 그랬다. 내게 떠올랐던 얼굴은 법정 스님. 2010년 열반에 드신 법정 스님의 얼굴을 떠올렸던 데에는 까닭이 있을지도 모른다.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드신 직후, 한동안 마음이 허전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나는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에 나와 있는 책들을 구해 읽기 시작했고, 한동안 나는 스님의 추천 도서 외의 어떤 다른 책도 읽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스님이 권하는 대부분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이 권하는 추천 도서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스님의 철학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스님의 주장은 일관되게 우리가 사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일부분인 우리도 자연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레이그루크의 <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도 그때 읽은 책이었다. 일본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에세이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읽었을 때에도 나는 법정 스님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었다. 스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어쩌면 자연주의 작가 배리 로페즈의 저서 <북극을 꿈꾸다>를 추천도서 목록 제일 윗자리에 올려놓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스님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가 흰기러기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잠들었던 그날 밤, 나는 머리 바로 위에서 녀석들이 야간 비행을 하며 내는 공기를 두드리는 듯한 요란한 날갯짓 소리도 들었다. 이런 태고의 소리들을 들으면 클래머스 강 유역은 매년 돌아오는 동물들이 다스리는, 기이할 정도로 인적 없는 오랜 동물들의 영토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기러기 떼 근처에서 며칠을 보내면서도 침입자가 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새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들의 어렴풋한 실체를 감지했다. 자연과 공간의 범위, 창공에서 내려오는 빛, 마치 물처럼 현재로 고여드는 시간."  (p.224)


55년이 넘는 동안, 북극을 포함해, 초원, 사막, 섬 등 80여 개 나라를 탐사하면서 스무 권이 넘는 책을 펴낸 저자는 2020년 75세의 나이에 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온 인생을 걸고 자연과 인간의 잃어버린 유대를 복원하기 위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북극은 나와 별 상관도 없는 동토, 눈과 얼음밖에 없는 공허의 황무지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북극을 꿈꾸다>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북극은 지상 최대의 육식 동물인 북극곰이 2만 마리 이상 서식하고 있고, 279종에 달하는 철새 수백만 마리가 짧은 여름 북극에서 번식하는 곳이다. 7월에는 다년생 식물의 꽃도 피고 곤충류도 번식하며,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부에는 모기도 있다. 대형 초식동물인 사향소, 야생 순록인 카리부, 1천 km 이상의 장거리를 이동하며 사는 북극여우가 있고 바다에는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고래가 서식하는 곳도 바로 북극이다.


"북극을 여행하던 4, 5년 동안 이 두 가지 기억이 자주 떠올랐다. 한 기억은 시간을 초월한 듯 빛에 가득 찬 숭고한 순수성과 침해받지 않은 대지 본래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하나, 엇나가버린 그 꿈은 북극이라는 단어에 서려 있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인간의 오랜 투쟁을 상기시켰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인간의 욕망과 목표도 바람이나 외톨이 동물, 돌투성이의 환한 들판과 툰드라만큼이나 이 대지의 일부분임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대지는 이 모든 것과 동떨어져 스스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p.18~p.19 '서문' 중에서)


유려한 문체와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독자로부터 쉽게 외면받았을지도 모른다. 총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지만 본문만 500쪽이 넘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낼 수 있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시적인 표현과 각각의 장이 갖는 완결성, 장과 장 사이의 긴밀한 연결성이 없었더라면 책이 갖는 가치를 차치하고서라도 나 역시 완독을 포기하고 말았을 듯하다. 학술적 가치는 크지만 표현이 매끄럽지 않은 책은 사실 웬만한 인내력으론 버티기 힘든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저자의 생생한 현장 경험이 문장의 생명력을 더하고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게다가 서구인들의 욕망으로 인한 북극 생태계의 파괴를 그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동식물과 원주민들의 특별한 삶과 대비시킴으로써 극적 효과를 살리는 듯하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화성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던 북극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변화하고 있음을 책을 읽는 독자들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찾아 헤매고, 결국 찾아내는 아름다움이란 것이 땅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깊고도 드문 아름다움의 한쪽 끝은 복잡한 역설과 다른 존재들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p.536)


나는 작가가 써 내려간 한 문장 한 문장의 글에 매번 감탄하며 읽었다. 그와 같은 감탄은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되었다. 우리 주변을 감싸는 모든 동식물, 심지어 하늘과 구름, 물과 흙 등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환경에 조응하고 그 미세한 언어를 자신의 몸을 통하여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작가가 지녀야 할 선행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진 인간의 지나친 오만은 작가로서의 능력마저 점차 앗아가고 있는 듯하다. 미세먼지가 전국을 뒤덮은 오늘, 나는 법정 스님의 청아한 목소리가 그립다. 어떤 책을 읽으면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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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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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적으로든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구체적으로 검증된 바는 없지만 독서가 유익하다는 데 우리 모두가 잠정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믿는 바를 꿋꿋이 실천하면 되는데 독서라는 특정 행위에 있어서 만큼은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대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독서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독서가 좋은 줄은 알지만 자신의 여건상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변명. 자신도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꾸준히 독서를 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떠오르곤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슨무슨 독서법'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된 독서 관련 서적이 시중에는 꽤 많이 유통되고 있다. 독서가 좋은 줄은 알지만 책을 읽지는 않는 많은 '독서 주변인'들을 위해 또다시 책이 발간되는 이 웃지 못할 상황이라니. 책을 읽지도 않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니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냐고 어이없어하겠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현실인 걸 어쩌겠나. 사실 '무슨무슨 독서법'이라는 제목의 책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독서 주변인을 위한 안내서'가 아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더 좋아하도록 만드는 책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독서 행위의 목적은 결국 그 책을 읽는 바로 그 시간을 위한 것 아닐까요. 그 책을 다 읽고 난 순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독서를 할 때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책을 읽고 잇는 그 긴 시간인 것입니다."  (p.58)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저서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의 부제는 '이동진 독서법'이다. 독서를 실천하기 위한 어떤 특별한 묘책이나 독서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을 리 없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독서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구입하고, 몇 장 읽다가 책장에 꽂아 놓은 채 책등이 하얗게 변색되는 먼 훗날의 어느 순간까지 책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저자는 책을 완독하지 않아도 된다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책의 구성은 단순하다. 1부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2부 대화 '읽었고, 읽고, 읽을 것이다' 3부 목록 '이동진 추천도서 500'으로 구성된 이 책은 사실 독서에 관한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나름의 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2부에서는 '씨네 21'의 이다혜 기자와의 책에 관한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세상에는 책을 읽지 않고도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있으니, 독서와 글쓰기가 정비례는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는 비례하는 것 같아요. 그 예 중 하나가 저이기도 해요. 제가 글을 쓰고 말해서 먹고살잖아요. 타고난 측면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노력한 측면이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옛날 글과 지금 글을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차이가 커요. 지금이 그나마 예전보다 나은 것 같다고 느끼는데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타고난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을 것 아니에요. 더 나아졌다면 그것은 학습한 부분이나 후천적인 결과 아니겠어요. 많이 쓰기도 했지만 많이 읽기도 했거든요."  (p.157)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나의 아들 역시 책을 좋아한다. 책을 좋아한다는 건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높은 국가에서는 다방면으로 유리한 측면이 있다.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을 한 적도 많지만 어느 시점부터 영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아들은 릭 라이어던이나 스튜어드 깁스 등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원서로 읽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아들은 영어 학원도 다니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영어 시험에서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국어 시험도 다르지 않았다. 늘 잠만 잔다며 할머니로부터 핀잔을 달고 살았으면서도. 그러던 아들은 군 입대를 위해 올해 2월 초에 본 토익 시험에서 만점을 받기도 했다. 유학 한 번 다녀온 적 없는 아들이 말이다.


이동진 작가는 책에서 '독서는 습관'이라고 썼다. 맞는 말이다. 나와 아내도 아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는 잠들기 전에 한두 시간씩 늘 책을 읽어주었고,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하던 초등학교 시절의 주말에는 언제나 집에서 가까운 대형서점을 방문하여 온종일 함께 책을 읽곤 했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고르도록 일절 간섭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걸 보면 신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독서력' 그러니까 책을 읽는 능력이라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책을 읽는 데에도 근력과 경험이 필요하고 그것은 습관과 시간으로 길러집니다. 이 독서력을 굳이 그래프로 표현하자면 포물선이 아니라 계단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올라간다기보다는 단계가 있는 거죠. 그리고 단계를 올리는 계기는 어려운 책을 읽어낸 경험일 확률이 높습니다."  (p.67)


집에 머무르기보다는 들로 산으로 여행을 하기 좋은 계절이다.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는 나의 아들 역시 지금 광주를 거쳐 여수로 여행 중에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생의 일정 시점에서는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한 반복의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행을 평생의 업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말이다. 혹은 삼겹살 굽는 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추천할 요량이 아니라면 말이다. 활동하기에 좋은 날씨, 곱게 핀 봄꽃들이 우리를 밖으로 밖으로 유혹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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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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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등등한 기세에 눌려 겨울 한기가 무르춤한 오후, 두툼한 겨울 코트가 부끄러웠던 나는 코트를 벗어 손에 거머쥐고 걸었다. 그냥 주기 아까운 봄 햇살이 사방으로 쏟아지고, 햇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흥겨운 몸짓에는 도톰한 행복이 걸려 있었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뚫고 나온 아이들의 먼 시선이 향하고 있는 미래를 향해 나도 모르게 잠깐 한눈을 팔았었나 보다. 그것도 잠시 관성처럼 서둘러 현실로 되돌아온 나는 서경식의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읽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자신이 쓴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었던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다만 그가 남긴 몇 권의 책들만 덩그러니 남아 화려한 책의 표지에는 삶의 덧없음을 먼지처럼 덧씌우고 있을 뿐이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 B 씨는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비행기에서 먹어."라며 오늘 아침 삶았다는 달걀을 대여섯 개 건네줬다. 언젠가 내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그때의 감각이 30년 후에 되살아났다. 거꾸로 말하면 60대 중반을 지난 내 자신이 뜻하지 않게 30대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젊다'고 해서 반드시 즐겁고 기쁜 거산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어쩐지 어색하고 미숙하며, 가시가 돋혀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하기도 하다. 그런 감각까지 맨해튼에서 되살아났다. 30년 전의 나는 광기와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갈림길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지인들도 적지 않다. 그때 나는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B 씨는 지금도 건강할까. 그때의 일을 생각해낸 것도 호퍼의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이다."  (p.41)


80년대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옥고를 치르던 형들의 구명운동을 위해 방문하였던 미국. 2016년 3월,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미국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로 부상하고, 다양성이라는 가치보다 미국을 최우선으로 하는 '단일'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저자는 달라진 미국의 낯선 환경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선뜻 다가와주었던 많은 이들과의 추억을 되살리며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 소회를 쓰고 있다.


"진심으로 재능을 인정하던 형이 이런 말, 이를테면 '평생토록 짊어졌던 무거움'에 짓눌린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테오는 형의 유작전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형이 죽고 나서 반년 후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등졌다. 모마의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하다고 말해도 좋을「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저 아름답다기보다는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나는 두 형이 옥중에 있었을 때도,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라는 "가차 없는 고발"(사카자키 오쓰로, 「고흐의 유서」, 『그림이란 무엇인가』, 가와데쇼보신사, 2012년(초판 1976년))에 몸을 내던지는 심정으로 이 그림 앞에 서 있다."  (p.163)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던 서경식. 그의 글은 언제나 디아스포라의 고독과 약자에 대한 공감,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문체를 통해 책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예술 감상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삶과 예술이 거리를 둔 채 서로 완벽히 분리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에게 예술도 역시 삶의 일부일 뿐이라며 우리를 예술로 이끄는 것이다. 예술과 우리의 삶 사이에 흐르는 깊은 강물에 손수 돌다리를 놓아주면서 말이다. 그의 다정한 손길을 잡고 걷다 보면 음악이나 그림 등 우리가 소홀히 했거나 등을 돌린 채 데면데면 지내왔던 작품믈이 거리를 좁히며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까닭에 서경식의 글에 매료된 독자라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그의 책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단절된 미국은 쇠퇴의 길을 차근차근 밟으며 전락하는 중이다. 다만 이 단말마의 고통은 오래 지속되면서 수많은 부패와 파괴를 거듭하며 인류 사회에 심대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미국이(그리고 세계가) 변한다는 것은 그 정도로 멀고 험난한 길이다."  (p.251 '맺음말' 중에서)


그냥 주기 아까운 봄 햇살이 사방으로 쏟아진다. 나는 그 햇살 속을 거닐며 이름도 생경한 어느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듣고 있다. 고인이 된 작가 서경식은 나의 질문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있는 여러 예술가들이 궁금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디에고 리베라, 벤 샨, 로라 포이트러스...... 생경한 이름들을 나는 하나하나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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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유감
이기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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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민주화를 가늠하는 척도는 각 언론사의 논조에 달려 있다. 예컨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나 그의 측근에 대한 찬양이나 우호적인 기사를 쓰는 신문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라면 그 나라는 분명 독재 국가이거나 독재화가 진행되는 국가임이 분명하다. 반면에 권력자를 자유롭게 비판하거나 권력자를 희화화하여 유쾌한 조롱 거리로 삼는 언론이 다수라면 그 나라는 분명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각국의 자유민주주의지수(LDI)를 기반으로 민주주의 순위를 발표하는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의 자료를 비교할 것도 없이 말이다. 참고로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현재 독재화가 진행되는 국가 중 한 곳으로 발표되었다. 


올해는 1974년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서 외쳤던 10‧24 자유 언론 실천 선언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게다가 1975년 3월 17일은 동아일보가 자유 언론 실천 운동을 하던 기자‧PD‧아나운서 등 13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한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작금의 대한민국 언론 환경이 정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물론 내가 언론계에 근무하는 것도 아니요, 가족이나 친척 중 누군가가 언론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한 국가의 발전에 있어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걸 알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ㅏ이든 날리면' 발언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주변 기자들에게 다 함께 들어보자고 한 것이 '바이든 날리면' 사태로 번졌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발언을 부인하면서 최초 발견자인 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권력의 외압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전‧현직 기자들의 태도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자들은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차갑게 거리두기를 하고,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다. 나에게 가짜뉴스를 퍼뜨렸다고 비난을 퍼붓던 기자들이 오히려 가짜뉴스를 만들어 나를 공격했다. 언론 자유를 입버릇처럼 외치던 기자 출신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진실을 흐리며 언론을 탄압했다."  (p.9 '프롤로그' 중에서)


MBC 기자 이기주를 전 국민이 아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비난하는 정권이었다. 나 역시 대통령실이나 보수 언론의 적대적인 비난이 없었더라면 이기주라는 이름 석자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마지막 도어스테핑 현장에서 비서관과의 공개 설전으로 인해 이기주 기자를 알게 되었고, 그가 쓴 기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나토 정상회의 순방길에 민간인 신분의 여성 신모 씨를 동행했던 사실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고, 미국 뉴욕 순방 동행 취재 중 비속어 논란 발언을 최초로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퍼스트 펭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토록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느냐고 묻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는 윤석열 대통령이 살아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윤석열의 사전에 내로남불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정치인 윤석열의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p.54)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대기업에 다니던 자신이 갑작스럽게 기자의 길로 전향하게 된 사연과 기자가 된 이후의 여러 사건들, 그리고 기자로서의 소명의식이나 각오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드는 생각이겠지만 요즘처럼 소위 '기레기'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의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기'나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는 저자 역시 피하기 어려운 과제였을 터, 이 모든 사태에 두려움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곤봉과 방패를 목격한 우연한 계기로 기자가 됐다. 그동안 실망과 좌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자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다. 언론 탄압과 줄 세우기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권력 감시의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 그리고 힘든 여건에도 발주 기사가 아닌 발굴 기사로 거대 기득권과 싸우는 용기 있는 기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싸움 끝에 무엇보다 큰 기득권인 기자 권력의 벽도 함께 해체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p.215 '에필로그' 중에서)


역사는 종종 몇 사람의 용기와 말도 되지 않는 우연이 만나 크게 뒤틀리곤 한다. 사람의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우연과 결부된 갑작스러운 결단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꾸곤 한다. 저자가 광우병 시위 현장에서 목격한 곤봉과 방패로 인해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말이다. 1975년의 오늘은 동아일보가 자사의 언론인 13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던 날, 이기주 기자가 쓴 <기자유감>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 아닌가. 게다가 '기레기'들이 판을 치는 요즘의 언론 환경에서 이기주 기자와 같은 참 언론인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올봄 첫 황사가 유입되었다는 오늘, 어제까지 포근하기만 하던 날씨는 봄바람과 함께 급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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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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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레, 미, 파,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피아노 건반을 처음 눌러보았던 때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동글동글한 소리가 출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솟아올라 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종국에는 피아노를 쳤던 나의 작은 손가락을 매개로 미세하게 전해지던 여린 울림과 떨림. 세상을 향해 어설프게 만들어 낸 나의 소리로 인해 뿌듯함으로 터질 듯 가슴이 부풀었던 기억. 그러나 처음으로 글씨를 읽었던 기억은 이처럼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 것은 아니어서 모르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나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았던 문이 차츰 환하게 열렸던 것이다. 내가 비로소 인간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은 '배우고 때로 익히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뭐든 어릴 때 배워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냥' 하다가 잘하게 되고, 어른들은 '잘' 하려다 그냥 하게 된다. 아이처럼,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냥' 해야겠다. 생각 없이 그냥 하다가 잘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기쁨은 클 테니까. 계속할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 발레교습소에 나가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오전에는 발레를 배우고, 오후에는 공책을 펼쳐 시를 쓰는 할머니. 공책을 새것으로 바꿀 때마다 맨 앞에 적어놓는 문구를, 할머니가 되어서도 적어놓을 것이다. "춤추지 않으면 무용수들이 길을 잃는다." - 피나 바우쉬"  (p.176)


시인의 산문집을 자주 읽게 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 따라 책의 제목처럼 이상하게 읽힐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내편으로 남았던 아버지, 지금은 관계가 소원해진 옛 친구, 서른 넘은 나이에 처음 떠나 본 여행지에서의 사색, 발레교습 등 시인의 눈에 비친 평범한 일상들이 시인의 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뭔가 마법을 부린 듯 이상하게 펼쳐진다. 사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특별하지 않은 일들이 시인의 눈과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일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일상을 시인은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데,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는 단상이 있다.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나체가 누드가 되는 동물은 사람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옷을 벗는 순간 육체의 '표면'이 '내부'의 연약함, 혹은 부끄러움과 연결되는 동물은 사람이 유일하다는 것! 비단 육체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표리부동한 행동을 일삼고, 화장한 생각을 진실인 양 표현하며 살았던가? 생각을 벗기면 생각의 누드가 드러날까?"  (p.78)


같은 풍경을 그려도 그리는 이에 따라 그림은 천차만별 달라지는 것처럼 비슷한 일상 역시 쓰는 이에 따라 독자가 받는 감흥은 열이면 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쓴 에세이는 또 특별한 것이어서 시인의 품성이 낱낱의 글자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총 5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시인은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책의 5부'믿지 않으면, 좀처럼 읽을 수 없는 책'에 주목하며 읽었는데 그것은 어쩌면 내가 다른 이보다 유독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즐겨 읽는가 하는 문제에 다른 이보다 관심이 더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독서 관음증 환자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뒤라스는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작가다. 나는 뒤라스에게 언어의 리듬, 이야기를 끌고 나아가는 방식을 배웠다. 사랑을 그리는 법과 시 쓰는 법을 배웠다. 나는 뒤라스가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며 시를 썼고, 뒤라스의 작품을 탐독하며 글에는 음악이 흘러야 함을 배웠다. 한동안 시를 오선지 노트에 썼다. 뒤라스는 이야기를 우아하게 이끌며, 책에 시적 에너지가 깃들게 하는 법을 아는 작가다. 감각적이고 지적이며, 풍부한 동시에 간결한 쓰기!"  (p.277)


기온이 오르자 초록초록한 새순이 다투어 고개를 내고 있다. 기온이 높아지는 소리를 봄의 발자국 소리인 양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는 듯하다. 계절의 변화에 조금이라도 뒤처지기 싫어하는 저마다의 경쟁의식이 꽃과 새순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도 그에 질세라 "날씨 좋다!"를 연발하고 있다. 책에 머물던 시선이 자꾸 밖으로 밖으로만 향한다. 봄에 우리의 시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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