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펼쳐질 때 정말이지 묘한 기분이 든다. 눈이 쌓인 겨울에 보는 붉은 동백꽃이라든가 봄에 내리는 흰 눈과 같은 풍경 말이다. 가는 계절에 대한 미련 때문일지도 모르고 다가올 계절에 대한 아련한 환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새벽 산행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밤새 내리던 비가 갑자기 함박눈이 되어 소담스럽게 흩어졌다. '아, 아름다워라!' 미소가 절로 번졌다.

 

미투 운동으로 촉발된 국내의 사회 문화적 변화도 변화지만 대북 특사의 방북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대외 정세 또한 급변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이거 실화냐?'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오는 4월에 남북 정상회담이 결정되더니 5월에는 미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역사적인 첫 회담을 갖기로 했다. 봄에 보는 눈 내리는 풍경이 이런 기분일까. 그동안 우리는 '반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반도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큰 섬에서 살아왔는데 이번 회담이 잘만 된다면 우리는 대양과 대륙을 잇는 반도인으로서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과 북이 서로 협력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어느 정도 해소될 테고 대북 적대시 정책 탓에 일본에 대해 차마 하지 못했던 말도 속 시원히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은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반공' 프레임 하나로 자신들의 기득권과 정권을 지켜왔던 보수 야당이 그럴 테고, 친일 행적으로 손해를 보기는커녕 대한민국의 상류층으로 떵떵거리며 살아왔던 친일 후손들이 그럴 것이다. 뭔 일만 있으면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상관도 없는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나와 깽판을 놓던 개신교 세력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남과 북의 평화 분위기는 좋았던 호시절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아주 작은 우연에서 비롯되어 끝내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그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일어난 미투 운동이 공고했던 대한민국의 잘못된 성의식을 변화시켰고, 대북 특사단의 방북이 대한민국이라는 섬을 반도로 만들려 하고 있다. 아름다운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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