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의 시대 -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가벼운 것의 문명
질 리포베츠키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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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가벼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흔하디흔한 의미의 '무게가 적다'는 뜻일까요. '옷차림이나 마음 따위가 가뿐하고 경쾌하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생각이나 언행 따위가 침착하지 못하고 경솔하다'는 의미일까요. 나는 지금 막 프랑스의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가 쓴 <가벼움의 시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가벼운 것의 문명>을 어렵사리 다 읽었습니다. 읽었다기보다 읽어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듯합니다. 책을 읽기 전만 하더라도 내게 '가벼움'은 그저 무게가 적다거나 경쾌하다는 의미의 긍정적인 단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쩌면 큰 관심을 두지 않았거나 의미도 없는 단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질 리포베츠키가 설명하는 '가벼움'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가벼움'에 정복당한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은 한동안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게 사실입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또한 자신들도 역시 '가벼움'에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소비지상주의의 세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가벼움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고 분별 있는 삶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부족하다. 무한히 작은 세계의 정복은 특별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그것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야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날까? 가장 좋은 부분뿐 아니라 가장 나쁜 부분도 포함하고 있는 이 엄청난 혁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당분간은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지 간에 이것은 지금까지는 부차적이고 평범했지만 이제는 우리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p.22)

 

책은 긴 서문에 이어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 '삶을 가볍게 하기: 안락함, 경제, 소비', 제2장 '새로운 몸', 제3장 '마이크로, 나노, 비물질적인 것', 제4장 '패션과 여성성', 제5장 '예술 속의 가벼움에서 예술의 가벼움으로', 제6장 '건축과 디자인: 새로운 가벼움의 미학', 제7장 '우리는 쿨한가?', 제8장 '자유, 평등, 가벼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저자는 우리 삶과 연관된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가벼움'이 이끌어 갈 우리 시대의 미래를 조망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소비 경제이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이념과 철학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물론 행복이 인간들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행복의 내적 변화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각 개인은 시행착오를 거듭해 가며 자기 삶의 흐름을 바꾸고, 그 삶을 가볍게 만들려고 애쓰다가 행복한 결과를 얻기도 하고, 이따금은 덜 행복한 결과를 얻기도 한다. 어쨌든 가벼움의 정복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매우 개인적이다. 그 비밀은 책 속에도 있지 않고, 다른 어떤 곳에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비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367)

 

'가벼움'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가 자신의 몸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필사적인 것처럼 개인은 정치나 제도에 있어서도 탈정치화를 가속화함으로써 정치적 무게를 줄이고 극도로 가벼워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정치 제도나 이념은 사회 구성원의 행동 양식이나 유행, 건축, 예술, 과학의 발전 등 여러 개별 분야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발전 단계를 거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실생활을 지배하는 현실 영역에 있어서의 발전이 제도와 이념을 변화시키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한다는 유물론적 관점이 꼭 옳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시대 전반을 이해하고 우리의 미래상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분야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변화를 감지해야만 하겠지요. 시나브로 '가벼움의 추구'는 이 시대의 가치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 보입니다.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고자 하는 자세는 '나노'로 대표되는 물질 세계의 경량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짧아진 유행의 지속성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느슨하거나 쿨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변화는 감정에 충실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 또한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삶을 가볍게 만들겠다는 현대적 이상은 물질생활의 영역을 넘어서서 남녀의 내밀한 부부관계, 성관계의 세계에까지 퍼져 나갔다. 하이퍼개인주의 사회에서 행복에 대한 갈망은 사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 강제와 중압감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삶이라는 거푸집 속에 스스로를 부어 주조한다." (p.297)

 

가볍고 유동적인 어떤 것은 우리의 부담을 줄여주는 반면 빠른 변화로 인한 불안정과 변덕스러운 유행에 적응해야 하는 스트레스와 새로운 의무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느슨해진 인간관계는 사회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조금쯤 덜어낼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울타리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우울과 고독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결국 개인의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가벼움은 삶의 전 영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가벼움'만이 선이고, '무거움'은 곧 악이라는 식의 시대적 가치관을 무작정 추종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향에 맞게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절실한 시기입니다. '가벼움'의 의미가 무겁게 느껴지는, 역설적인 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벼움'과 '무거움'이 상존하는 역설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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