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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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달구었던 삶의 부지깽이가 주말이면 차갑게 식어버리곤 한다.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쓸고 가는 느낌이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주일 내내 지었던 어색한 표정들을 지우기 위해, 때로는 더 깊은 고요를 선물받기 위해, 그리고 소매 끝에 남은 가식의 부스러기를 털어내기 위해 주말에도 이렇게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를 손에 올려 놓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양장본 표지의 차갑고 단단한 느낌에 흠칫 놀란다.

 

늙음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한 표현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오직 그 하나의 문장이 맴맴 맴을 돌았다. 혐오와 배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늙어간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오래전 태어날 때처럼 여자, 남자, 그런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다만 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여자'. 정말이지 그렇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늙는다는 건 성별의 경계도, 네 것 내 것을 가름하는 소유의 경계도 조금씩 무너뜨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p.30)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제목과는 달리 딸의 입장에서 스토리가 전개되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머니인 '나'의 시선에 비친 딸의 모습이며, 생각 또한 오롯이 '나'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살갑고 가꿔야 할 두 사람의 관계는 매번 엇나가고 틀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편을 잃고 사력을 다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동성애자인 까닭이다. 아무리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어머니일지라도 우리 사회 전체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동성애자를 자신의 딸이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감싸고 옹호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산 속 깊이 들어가서 살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을 터였다.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 (p.84)

 

결혼 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결혼 후 딸애를 낳고 교습소에서 일을 했던 것을 필두로 도배,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 보험 세일즈, 구내식당 조리사를 거쳐 지금은 요양병원의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시간제 강사를 하며 따로 살던 딸애는 살던 집에서 쫓겨날 신세라며 나에게 '돈'을 부탁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나'는 결국 딸애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고, 딸애는 연인인 그 애와 함께 '나'의 집으로 이사한다.

 

"이 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언제나 적당한 만큼의 배려와 예의를 보일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을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번번이 그 애가 하는 말에 동의를 하고 한마디를 보태고 그러면서 어떤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애는 때때로 지나치게 사려 깊다. 내게 어떤 말이 필요하고, 무슨 말을 듣기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p.61)

 

주인공이 돌보는 일인실의 노인 '젠'은 젊은 시절 해외에서 공부하며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다 이제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평생을 사회와 타인을 위해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돈을 내고 요양원에 들어왔건만 젠은 이제 가족도 없는 치매 노인이라는 이유로 요양원에서도 쫓겨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노을이 깔린다. 지치고 서글픈 빛깔이 교문 너머에까지 가닿는다. 이렇게 좋은 시절이 다 가 버렸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머무는 시간, 그리고 내가 보게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통해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너무나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다." (p.96)

 

딸애와 따로 살 때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딸애와 그 애와의 관계를 한 집에서 함께 살며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되자 '나'와 딸애, '나'와 그 애 사이의 반목과 갈등은 점점 심해져간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딸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젠에게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며 위로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애는 동성애와 관련된 수업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직된 동료 시간 강사를 위해 시민단체와 함께 시위에 나서게 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맞아 병원에 실려가고 만다. 딸애의 부상으로 주인공이 출근하지 않았던 며칠 사이에 요양원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젠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다. '나'는 일련의 이런 일들을 겪으며 딸애와 그 애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비록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상처와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해진다.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p.149)

 

소설에서 '나'는 젠의 모습에서 딸애의 미래를 보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오직 홀로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로부터의 수모와 멸시마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고스란히 딸애를 향한 날선 분노로 표출된다. 그런 분노는 딸애가 지금이라도 다수의 편에 서서 젠과 같은 미래를 맞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나'의 바람이 성취될 수만 있다면 '나'는 딸애에게도 딸애의 연인에게도 얼마든지 나쁜 사람으로 남아도 좋은 것이다.

 

무거운 돌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답답함의 끄트머리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외면과 눈 감음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단 그들 속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삶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쪽, 다수의 사람들이 포진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만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도덕적 정의의 결핍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잣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실존의 문제인 것이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알지 못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몹쓸 병에 걸리거나, 실직이나 부도 등 갑작스럽게 찾아온 경제적 위기만으로도 '평범한 삶'은 아주 쉽게 무너너져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젊음도 그렇듯, 다 잃고 난 후에 그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다수의 편에 서 있을 때에는 소수자의 고통이나 아픈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산다. 그것이 나의 가까운 미래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내일 당장 강추위가 몰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잘 믿지 않는다. 그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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