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루의 어드벤처 - 사막, 그 빈자리를 찾아서
김미루 지음 / 통나무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새벽 숲은 고요했다. 등산로를 따라 드문드문 잔설이 보였고 뚝 떨어진 기온에 모든 게 얼어붙는 듯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새벽의 등산로는 그야말로 적막강산. 괴괴한 느낌마저 감도는 새벽 산길을 그믐달 여린 달빛이 어둠의 한 귀퉁이를 도려내고 있었다. 숨을 내뿜을 때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입김이 마치 흰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불빛을 등지고 하늘에는 듬성듬성 새벽 별빛이 어지러웠다.

 

다른 계절과는 달리 겨울 산행은 많은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한 어미 자식도 오롱이조롱이라지만 갑작스러운 추위에 잔뜩 옹송그린 채 내달리는 퇴근길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듯 옛말조차 무색해진다. 사람 사는 게 다들 비슷하구나,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자연이라는 같은 외투를 입고 한 세상을 제각각 살다가 목숨이 다하는 날 가볍게 벗어놓고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일 터였다. 내 뒤를 잇는 사람들이 또 다시 그 외투를 입고 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테니 말이다.

 

"사막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각자의 배경이나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평등으로 몰고 간다. 순간순간 닥치는 허무의 느낌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 속으로 모두를 휘몰아간다. 서양문화에 깔려있는 평등의식은 이러한 사막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초월자의식도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p.104)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의 딸인 김미루가 쓴 책이 출간되었다기에 구해서 읽어보았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톤험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후 1995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컬럼비아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그녀는 전위적 예술행위로 우리나라 언론에도 몇 번인가 오르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돼지우리에서 파격적인 누드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하면 터키 이스탄불에서 누드 사진을 찍다 터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사진이나 회화가 아닌 자신의 글을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기에 어떤 책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맨해튼에서 상실했던 삶의 요소들을 이곳에서 되찾은 듯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단순함, 소박함? 아마도 사막에서 내 뺨을 스치는 다양한 공기의 감촉이었을까? 동물들의 여운 있는 울음소리였을까? 맨발로 걸어갈 때 느끼는 모래의 감촉이었을까? 질병과 더러움의 공포를 근원적으로 상실했을 때, 나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평화와 아름다움의 감각을 획득했다."    (p.136~p.137)

 

<김미루의 어드벤처>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그녀는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아프리카 말리의 사하라사막 팀북투지역과 몽골의 고비사막을 탐험하며 그녀는 사막의 상징과도 같은 낙타와의 교감을 자신의 작품 속에 표현하고 싶었던 듯했다. 끝없는 모래언덕과 황폐한 땅에도 생명은 존재하고 외부와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 담는다.

 

"제일 먼저, 사막의 황폐함이 지니고 있는 이국적이고도 로맨틱한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포스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포스는 손상된 인간관계의 현실태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부추겨댔다."    (p.28)

 

작가는 안락한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자신의 오래된 생활방식을 사막이라는 극한의 지역에서 여러번 되새긴다. 자신이 자연이라는 틀에서 인위적인 어떤 것으로 얼마나 많이 기울었던가, 하는 반성과 자책으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순수한 사막의 속살을 향해 낙타와 함께 걸어가는 그녀의 사진 속 모습은 구도자의 그것처럼 경건해 보였다.

 

"아마도 낙타가 그들의 동반자로서 우리 인간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기를 지금도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려진 사막에서 평화를 찾는 그 놀라운 지혜를! 지금은 사막의 커뮤니티가 종교, 권력, 정치, 자원, 이권 등등의 문명의 요소로 인하여 오염된 측면이 있지만, 낙타와 인간이 사막에서 공생하는 최초의 순결한 삶의 방식은 평화 그 자체였을 것이다."    (p.155)

 

작가의 다음 계획을 묻는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제 정글로 향하겠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결벽증을 극복하기 위해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갔었고, 애벌레 공포증을 벗어나기 위해 이제 정글로 향한다는 그녀의 모험정신은 나와 같은 도시내기에게도 작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이라는 외투를 입고 한 평생을 살아간다. 자신의 외투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짓임을 나는 <김미루의 어드벤처>를 통해 반성해 본다. 날이 춥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저토록 애쓰는 모든 생명체의 경건한 몸짓을 나는 이 책 <김미루의 어드벤처>를 통해 조용히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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