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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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디단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몰라. 눈발이 날리는 거리를 검은 패딩을 입은 아이들 서넛이 걸어가고 있었지. 거리는 온통 아이들의 함박웃음으로 채워지는 듯했지. 가벼웠던 그 미소 속에 첫눈이 주는 기쁨은 이미 다 숨겨져 있었던 거야. 아이들 웃음이 수능으로 공짜 휴가를 얻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부터 발원한 것인지, 바람에 나부끼는 첫눈의 거침없는 눈발이 그들에게 내재된 푸른 생명력을 자극햇던 것인지 나로서는 알지 못해. 다만 눈발 성성하여 뿌옇게 흐려진 인도를 아이들 웃음이 하얗게 번졌다는 걸 기억할 뿐이야. 마치 꿈만 같았던 그 풍경이 반짝 해가 드러난 지금도 생생해.

 

오늘 아침 첫눈이 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거나 인상 깊은 장면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현실과 비현실이 한꺼번에 뒤섞이는 경험을 한다. 누군가 내 머릿속 회로를 팍팍한 현실에서 몽롱한 비현실의 세계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험은 비단 현실의 체험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선율을 듣거나, 빠져들 듯한 그림 앞에서, 누군가 읊어주는 아름다운 시를 들으며, 또는 잘 쓰인 소설을 읽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권정현 작가의 <칼과 혀>는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의 붉은 땅 만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체구가 작고 깡마른, 꼽추처럼 목과 등이 붙어 있으며 어깨는 공처럼 둥글고 배에도 살이 늘어져 있는 볼썽 사나운 생김새의 중국인 첸을 만날 수 있다. 비밀 자경단원이자 천재 요리사인 그의 손에는 불과 싸운 흔적이 무수히 남아 있다. 첸이 노리는 사람은 일본군 사령관 모리(야마다 오토조)이다. 등장인물 중 유일한 실존인물이기도 한 그는 궁극의 맛과 미륵불의 미(美)에 집착하는, 군인이라기보다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유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 그는 백만 명의 관동군을 소련군에게 모두 항복시켜 칠십만 관동군을 포로로 잡히게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다 도망쳐 나온 조선 여인 길순은 독립운동가인 오빠와 연락을 취하면서 사령관 암살 기회를 노린다.

 

"전황을 보고받을 때마다 나는 죽음과 삶 사이에 끼인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 운명만큼이나 절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식탁에 차려진 갖가지 산해진미가 아름다운 이유도 그것이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소화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소멸되지 않는 장식품은 아무런 미적 가치가 없다. 극락사의 반가사유상이 아름다운 이유도 그것이 긴 세월 동안 조금씩 부패해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것의 몸엔 녹이 잔뜩 슬고 미소는 기괴하게 일그러질 것이다. 그러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그 미소를 사랑할 가치가 있다." (p.117~p.118)

 

소설은 사령관 모리와 첸, 길순 세 명이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료 자경단원과 함께 황궁 주변에서 체포된 첸은 자신이 요리사임을 주장하고 사령관은 까다로운 문제를 내어 기회를 준다. 사령관의 테스트를 통과했던 첸은 요리로서 사령관의 신임을 얻게 되지만 결국 암살자라는 그의 신분을 들키고 만다. 혀의 1/3이 잘리고 발목에 튼튼한 쇠줄이 채워지는 첸. 사령관은 그에게 다시 '하루에 한 가지, 매일 다른 요리를 해서 바치라'고 명령함으로써 목숨을 살려준다. 그렇게 소설의 1부가 끝난다.

 

소설의 2부는 첸의 어머니인 베베와 길순이 사령부로 끌려와서 고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령관의 눈에 띈 길순은 사령부에 머물게 되고 사령관을 죽여야 한다는 오빠의 망령과 사령관에 대한 애틋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일본 패망의 순간으로 다가서면서 소설도 점점 끝을 향해 가는데...

 

작가는 소설이라는 틀에 다양한 음식과 역사적 사실들을 녹여내고 있다. 어찌 보면 맛과 생명은 본능의 차원에서 서로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강력한 중독성마저도. 음식에 대한 작가의 풍부한 지식은 음식을 만드는 첸과 음식을 소비하는 사령관의 입을 통해 탄생과 소멸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생과 사의 윤회를 떠올리게도 하며 필연적으로 불교적 공간(소설에서는 극락사)에 이르도록 한다. 한, 중, 일의 주인공을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무대에 세워놓고 음식을 매개로 스토리를 엮어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탁월하다. 물론 길순의 뜬금없는 페미니즘적 사고나 거듭되는 첸의 구명도 석연치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첫눈이 내렸고, 소설 속 첸이 사령관의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하는 것처럼 고3 수험생들의 수학능력평가시험이 치러졌다. 현실이 때로 비현실의 세계로 훌쩍 도약을 하듯 시험을 치른 학생들도 이제 성인으로 향하는 알차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시간 속에 기록하게 된다. 첫눈이 오던 날 나는 수능을 보았노라고. 또는 첫눈이 오던 날 나는 권정현 작가의 소설 한 권을 읽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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