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의 가까운 곳에 산이 있다는 건 크나큰 자산이다. 물론 그 산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체감하는 효용도 크게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우리집 근처에 그런 산이 있었어? 하면서 마치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듯 화들짝 놀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따금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대동하고 산을 찾은 바람에 산을 오르는 내내 뚱한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수다를 늘어놓는 사람도 있을 테고, 등산로 한켠에 놓인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온종일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처럼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숲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주기적으로 산을 찾음으로써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육체적 건강 또한 우리가 산으로부터 받는 혜택 중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 외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산에 의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나 말 못할 비밀, 심지어 자신의 생각으로조차 꺼내서 확인하는 게 꺼려지는 여러 일들도 우리는 숲의 나무들에게, 반짝이는 눈을 데굴거리는 청설모에게, 먹이를 찾아 쉼 없이 비행하는 새들에게 흉금을 터놓고 다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고민은 대개 문제의 해결책을 본인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과 마주하기 어려울 뿐이다. 산은 우리에게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해결책을 향해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한다.

 

입추를 하루 앞둔 오늘, 한반도로 향하던 태풍 노루는 마침내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고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휴일 오후, 허공에 생채기라도 내려는 듯 말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게 마치 전쟁처럼 힘겹고 아득한 일일 수 있겠지만 입추가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거짓말처럼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산에는 탐스럽게 여문 밤송이가 지난 여름을 그리워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