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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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말매미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던 건 보름 전쯤으로 기억한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관심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공적인 것, 인공이 가미된 것에 더 눈길이 간다. 이를테면 새로운 기종의 휴대폰이 출시되었다거나 아파트 주변에 못 보던 상점이 들어섰다거나 하는 경우 나와는 그닥 상관도 없는 일임에도 쉽게 감지하곤 한다.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말이다.

 

인공이 가미된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욕심을 부추긴다. 언젠가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종교적'이라는 말은 '이기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인가? 라는 주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대다수의 불행에서 자신만 예외로 해달라거나, 쉽게 타락하는 인간의 영혼이지만 자신이 믿는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으로 자신을 지켜달라거나,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해달라거나 하는 일체의 행위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뭐냐는 나의 주장에 대해 지인은 만인을 위한 또는 자연계 전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과 그와 같은 순수 목적을 위해 종교는 태어난 것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역설했다.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말이 과연 맞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도교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지인은 가볍게 웃었었다.

 

내가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거나 부정적으로 판단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찮은 일이지만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 간혹 들 때도 있지만 이딴 걸 뭐하러 하느냐? 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으니 말이다. 사람의 성향은 다 제각각인지라 어찌할 수 없는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낙관적인 성향의 어느 작가를 추종하기보다는 우울하고 때로는 퇴폐적인 심지어 독선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는 이해하기에 다소 난해한 말도 서슴지 않고 했던 밀란 쿤데라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도 따지고보면 다 그런 성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를 읽은 지 벌써 일주일쯤 지났건만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특별한 의욕도 일지 않아서 무작정 시간만 보냈다. 뭉개고 갈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무의미한 세상에 무의미한 일 한두 개쯤 더 생긴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무더위를 빙자한 나태함 또한 나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유혹에 적당히 이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랭이 아가씨들을 자세히 보니 아주 짧은 티셔츠 차림에 바지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몸 한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총집중돼 있단 말인가.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고? 이 소설 첫머리에 쓴 것과 똑같은 단어들로 이번 장을 시작하고 있다고? 나도 안다." (p.47)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새로운 에로티시즘의 시대를 여는 배꼽, 아무런 이유도 없고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는 거짓말에 빠져드는 일과 스스로 기뻐하는 마음, 농담을 거짓말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오늘, 인간적 고통만을 주는 칼라닌의 방광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은 인간 존재의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그저 '무의미의 축제'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에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p.147)

 

참고로 다르델로는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기교를 갖춘 인물이다. 반면 카를리크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인데 파티에 참석한 아름다운 여자는 다르델로가 아니라 카를리크를 선택한다.'탁월함은 상대방도 뛰어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보잘것없다는 건 주변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더위에 지친 오늘, 무뎌진 날씨 탓에 자신조차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꼈다면 한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보잘것없는 당신으로 인해 주변이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롭게 변했는지, 세상은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 이제야 비로소 그렇게 보인다면 삶은 곧 축제가 아닌가. 불금, 무의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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