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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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이란 삶의 잔유물인 동시에 그 사람의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숙주를 죽이는 포식기생충처럼 사람에게서 나와 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 나의 기억이 직접적으로 나 자신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억은 대개 욕망이라는 형태로 숙주인 나를 조종하거나 지배함으로써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도 한다. 욕망의 분출이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게 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삶 전체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기억은 숙주를 죽이는 포식기생충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욕망이란 결국 기억에 의해 학습되고 적절히 관리되는 것이기에.

 

"더불어 그는 깨달았다. 세계는 말하자면 일종의 그늘이라는 사실을. 우주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란 커다란 악의 축이 늘어뜨린 그늘. 수천 년 동안 눈 비 바람 그 모든 풍파를 견디며 크고 또 자라 이제는 누구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물도 범접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을 확보한 본체, 그 아래 기생하는 인간들이 벌이는 악의 향연."    (p.245)

 

도선우의 소설 <저스티스맨>은 정의롭지 못한 이 세상에 대한 작가의 분노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가슴에 품어봤음 직한 악에 대한 척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인을 제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준동하는 악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악의 축이 늘어뜨린 그늘'일 수밖에 없다.

 

성실하지만 소심한 성격의 한 사내가 있었다. 대학마저 떨어진 그는 육군부사관학교에 지원했고, 마땅한 기술도 없고, 학벌도 변변치 않았던 그는 제대 후 보험설계사가 되었다. 여전히 그는 성실했지만 성과는 미미했고, 성실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사에서도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직장 동료들과 회식이 있었던 어느 날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 술에 취한 동료들을 돌보았고, 모두가 귀가하고 홀로 남겨졌을 때 정작 자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길거리에 쓰러졌다. 화장실을 찾지 못한 그는 한 빌딩의 화단 옆에서 바지를 내린 채 변을 보았고, 토사물과 함께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그는 파출소에서 풀려났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자신의 추한 모습이 누군가에 의해 기사화되었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오물충의 만행'이라는는 제목으로 올라온 그 기사로 인해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가족마저도 그를 기피했다.

 

"이제까진 아무리 그래왔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의 영혼마저 완벽히 까맣게 타들어갈 만큼 사는 일 자체가 두려움이 되는 상황에서까지도 그를 외면하는 건, 정말이지 가혹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껏 그래왔듯 무의미한 선과 색으로 여백을 채운 낡은 그림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다가, 실은 그 속에 담긴 사무치도록 슬픈 사연을 불현듯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p.36)

 

오물충의 사진을 최초로 인터넷에 올린 사람이 이마에 두 개의 탄알 구멍이 난 상태로 살해된 후 동일인의 범행으로 보이는 살인 사건이 줄줄이 발생한다. 모든 피살자의 이마에는 두 발의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피살자들 간의 연관관계는 경찰에 의해서도 밝혀지지 않았고 어떤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수사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국민들의 불안과 악화된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부와 언론은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살인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밝힌 저스티스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인터넷에 올린 저스티스맨의 글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의 글은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살인에 대한 개연성을 충분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찰들도 미처 알아내지 못했던 사실들을 인터넷에 게재함으로써 그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를 추종하는 네티즌만 해도 수십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오물충 사진을 올렸던 최초의 피살자와 오물충의 신상정보를 올렸던 두 번째 피살자, 오물충 사건을 기사화한 사회부 기자의 사망 사건 이후 연쇄살인범의 총구는 우리 사회 곳곳에 산재한 악의 근원으로 향한다. 미성년자 성매매를 주선하여 이익을 챙기는 삼류건달이나,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불법적인 비디오 동영상을 유포하는 엔지니어나, 직위를 이용하여 성추행과 같은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선생님과 국회의원 등. 네티즌들은 그가 이제 연쇄살인범이 아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악을 처단하는 '킬러'라고 추앙하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는 이런 옴니버스 형태의 사건을 재구성함으로써 최근에 있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조망하고 있다. 한동안 불법 동영상 유포의 근원지로 활동했던 소라넷이나, 2011년 여중생 2명을 집단 성폭행한 '도봉구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나, 모 대형교회 목사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 등.

 

"도덕성 파괴라는 감춰진 본능이 익명이라는 그늘 속에서 쑥쑥 자라고 그것이 방약무인한 인터넷 세계로 유혹하며 결국, 현실도피 성향으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이런 현상은 현실을 조급하게 보고, 잘못 보고, 급하게 판단하는 인간성과 공격성을 양산한다고 했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었다." (p.163)

 

작가는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에 대한 저스티스맨의 논평, 저스티스맨을 추종하거나 비판하는 네티즌들의 반응 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폭력과 어떤 현상에 대한 마녀사냥식 비판이나 근거도 없이 행해지는 영웅화가 우리 사회를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는커녕 얼마나 많은 악의 재생산을 유도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흑백 논리가 지배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의 감성을 자극하여 그들의 이성을 무력화시키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횡행하고 있다. 현실의 경험만이 자신의 기억으로 구축되던 과거와는 달리 인터넷이라는 가상세계에서 얻는 가상경험이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는 요즘, 우리의 판단과 기억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 놓은 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오탈자) 선생이나 어른 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셔틀의 과정의 알았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 선생이나 어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셔틀의 과정을 알았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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