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이브닝, 펭귄
김학찬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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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펭귄'이었을까? 생긴 것과는 달리 까칠한 성격을 타고난 때문일까? 그래서 말도 잘 듣지 않고 제멋대로인 성격이 펭귄을 닮아서? 아니면 미끈하게 수영을 잘해서? 작가는 '산책하는 펭귄이 있는 동물원을 수소문해서 찾아갔'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을 통하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펭귄'인 동시에 '나'였다. 그러므로 '펭귄'의 변화는 곧 '나'의 변화였고, 변화의 기록은 아직 끝나지 삶의 이야기였다.

 

신체의 일부인 동시에 액세서리에 불과했던 '펭귄'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난 건 내가 열세 살 때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국기가 내려가던 시간, '바이킹이 내려갈 때 허리 아래에서 느껴지는 좋고도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바지 앞섶을 열자 기립 자세의 펭귄이 "굿 이브닝"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변신을 하는 <철인 28호>처럼 인사를 마친 펭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익숙한 고추가 되었다.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짐작했겠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펭귄'은 주인공인 '나'의 성기를 일컫는다. 작가는 남자의 '2차성징'인 발기와 사정을 펭귄이 깨어나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마치 '나'와 '펭귄'이 서로 다른 인격체인 양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화합하면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유머와 위트를 섞어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미친 펭귄. 펭귄은 단 두 번의 인사만으로 보이스카우트를 해산시킬 뻔했고, 한 가정의 평화를 영구히 파괴할 뻔했으며, 아빠에게는 한 달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했고, 아빠는 이 핑계로 또 술 마시러 나갔고, 여자아이에게는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p.26)

 

펭귄이 깨어난 후 민달팽이 취급을 하는 누나와 한 방을 쓰고 있던 나는 한밤중에 몰래 나와 학교 운동장에서 펭귄과 악수를 하기도 하고, 야한 사진이 담긴 트럼프 카드를 모으기도 하고, 에로 비디오에 집착하기도 한다. 사내아이들은 대개 그렇지만 펭귄이 깨어나면 그 순간부터 펭귄의 생각에 지배받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깨어나는 펭귄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을 명령하고, 모든 것을 펭귄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말하자면 펭귄은 자신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정체성인 셈이다. 때로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는 장난감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사내아이들은 펭귄의 크기를 갖고 경쟁하거나, 펭귄이 내뿜는 오줌발의 거리로 경쟁을 하기도 한다. 군대에서는 펭귄의 목에 양동이를 걸고 양동이에 조금씩 물을 채움으로써 누구의 펭귄이 더 많은 물을 들 수 있는지 서로 겨루어보자는 조모 상병도 있었다. 소설 속의 나도 다르지 않았다. '진짜 여자를 보고 싶다'는 펭귄의 생각에 따라 교회를 나가기도 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형학원에 등록하기도 한다.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이 줄어든다는 기사를 봤다. 남녀 공학이 사라지면 교회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지 않을까. 교회의 신자가 줄어드는 것은 사회적 물의 때문이 아니라 연애당의 기능을 대신할 곳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회는 늘 일정하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고도 공헌만큼 쳤다. 교회가 예전보다 더 나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천국, 인맥, 연애라는 교회의 3대 기능 중 연애의 역할이 예전보다 줄어든 탓이다." (p.65)

 

트럼프 카드를 모으고 야설을 읽던 나는 플로피 디스켓으로 진화하고, IMF 사태로 아빠가 명예퇴직을 하고, 전업주부였던 엄마가 동네 마트의 캐셔로 출근하고, 밤 늦게까지 공부만 하는 누나. 고등학생이 된 나는 인터넷 전용선이 깔린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야동이라는 신세계를 경험한다. 게임과 야동에 빠져 살던 나는 진로와 적성과는 상관없이 여자가 과반인 대학에 가까스로 합격을 하고, 여자친구를 사귈 기회만 호시탐탐 노려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고 친구의 코치를 받고 거리 응원에 나섰던 나는 여자와 함께 모텔에 입성하는 데 까지는 성공하지만 그때마다 펭귄은 깨어나지 않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자랐다. 선배들은 근본적으로 아날로그형 인간이었다. 후배들은 아날로그를 낯설어하는 디지털형 인간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덕분에 아날로그적 음란물과 디지털적 야동을 모두 접했다. 대신 선배들을 따라잡지 못했고 후배들에게는 곧바로 밀려버렸다. 힘을 쥔 기성세대는 아날로그를 강요했고 추격하는 쪽들은 디지털로 무장하고 있었다. 양쪽의 즐거움을 모두 맛본 세대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p.194)

 

군대를 다녀오고, 생활비와 학자금을 벌기 위해 알바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펭귄은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풀이 죽은 펭귄은 생각의 주도권을 내게 넘겨주었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펭귄도 나도 조금씩 지쳐갔다. 나는 이제 연민의 눈으로 펭귄을 바라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과 입술과 볼이 약간씩 처진 것 같은, 표정. 말을 걸어줘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표정. 보고 있으면 힘내라는 말만 간신히 건넬 수 있는 표정.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게 되는 표정이었다." (p.250)

 

한 사내의 성과 관련된 재미있는 경험담으로 시작된 이 소설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짠한 느낌에 젖어들게 된다. 펭귄의 지배를 받던 철부지 어린 아이가 어느덧 스스로 독립할 나이로 자랐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세상살이에 치여 펭귄의 존재마저 까맣게 잊고 지내게 되었나, 생각할 때, 소설 속의 나는 문득 현실의 나로 오버랩되는 것이다. 작가가 펭귄에게 보내는 위로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향한 작가의 응원가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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