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자신을 향해 위로의 말 한마디를 던지거나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그러하듯 진심을 담아 등을 토닥여 줄 필요가 있다. 단순히 감상이나 형식적인 행위가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격식과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도덕적인 잣대만으로 판단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리움보다 오히려 잊혀짐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움은 흔히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 이를테면 자신의 성향에 잘 맞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림움의 강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잊혀짐은 시간의 길고 짧음은 있을 수 있겠으나 시간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의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결말로 귀착된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리움의 끝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이별일 테지만 잊혀짐은 결국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힘을 간과하는 우리는 흔히 지금 이 순간에 펼쳐지는 현상만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변화의 기로에서 벗어난 적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정체된 상태로 남아 있을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저 한없이 떠밀려갈 뿐이다.
장강명의 에세이집 <5년만에 신혼여행>을 읽고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매우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독자 입장에 있는 내가 오히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하는 걱정이 드는 걸 보니 작가는 자신의 소신에 대해 매우 당당했던 것 같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솔직히 내 부모님과 HJ가 왜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명절에 싫다는 아내를 자기 부모님 댁으로 굳이 데리고 가는 남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보기 싫은 친지들을 만나러 큰집에 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해마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 상담이 급증하고 형제간 폭행으로 누군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꼭 나오는데, 다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친지들을 만나는 걸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모를 것이다. 그냥 막연히 명절에는 가족이 다 모여야 한다고 하니까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p.29)
작가의 주장은 일견 쿨하고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유교주의 도덕관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 실정에서 작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작가의 주장인 즉,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관습에 따라 행동할 뿐 자신이 살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 구분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한마디로 무뇌아라는 의미.
그러나 작가의 솔직함은 칭찬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솔직함은 언제나 좋은 것이니까. 이런 논리라면 나도 무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