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하기 좋은 날이었어요. 한낮의 기온은 제법 더위를 느낄 만했지만 시원스레 부는 봄바람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봄 하면 역시 바람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바람에 실려오는 라일락 향기가 더없이 달콤했던 오후의 한적한 공원에는 투명한 햇살만 넘실대더군요. 그 크지 않은 공원의 벤치 하나를 마치 전세라도 낸 양 홀로 차지하고 앉아, 바람과 봄햇살이 나누는 침묵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 기분은 그야말로 '평화'였습니다. 한껏 욕심을 내도록 누군가 내게 허락한다면 오후 시간 전체를 그렇게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

 

성주골프장에는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더군요. 차기 정부로 미룬다고 했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배치를 새벽을 틈타 기습적으로 시행한 것이지요.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다쳐 병원 신세를 졌나 봅니다. 환경영향평가도 거치지 않은 막무가내식의 결정이었습니다. 국민과의 소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었던 현 정부의 소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지요. 국민은 개·돼지일 뿐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자신들의 손에서 정권을 내려놓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듯합니다. 적당히 시간이 흐르면 정부에 대한 비난도 저절로 사그라들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이 깔린...

 

마누엘 푸닉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몰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게 있어. 사람의 일생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지만, 모두 일시적인 것이야.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단순하고 흔해빠진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오후, 바람과 봄햇살이 침묵의 언어로 내게 들려주었던 것인지 나는 문득 <거미여인의 키스>에 나오는 그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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