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울 것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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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으로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에 빠져서 정신없이 책만 읽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재미없는 책을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읽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누가 옆에 서서 무시무시한 채찍을 들고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작가 코스프레나 지적 허영을 충족시키려는 목적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독서 성향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재미없는 책도 일단 펼쳐 들었다 하면 좋든 싫든 끝까지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증, 나에게는 그런 성향이 있다. 이때의 독서는 쾌락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고통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재미없는 책을 골랐을 때 나는 주어진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전투적으로 책을 읽게 된다. 책의 내용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독서는 그저 눈으로만 글자를 읽는 것에 불과하다.

 

임경선 작가의 신작 에세이 <자유로울 것>도 나의 범주에서는 그런 종류의 책으로 분류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읽을 거라면 왜 샀느냐고?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게나 말이다.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팬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하루키의 작품을 즐겨 읽는 나로서도 임경선 작가의 작품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잡담 수준의 수다가 끝없이 이어졌다. 눈물을 찔끔 흘릴 만한 감동도, 배꼽을 잡을 정도의 유머도,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와도 같은' 깊은 깨달음도, 비슷한 경험의 공감대도 일체 없었다.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을 꼬박 이틀 동안 붙들고 있었다. 문장을 허투루 읽는 바람에 읽었던 문장을 번번이 다시 읽어야만 했다.

 

"골프라는 취미는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꽤 정교하게 바꾸어놓는 것만은 분명했다. 남편은 골프를 치기 전까지는 그저 한 명의 책 덕후였다. 주말이면 혼자 혹은 함께 빈 배낭을 메고 보물 사냥하듯 시내의 중고서점들을 훑었고, 빈 배낭을 꽉 채워 귀가하면서 새 장난감을 산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했다." (p.215)

 

이 책에서 작가는 글 쓰며 먹고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행복과 욕망, 솔직함에 대한 생각 등 작가가 강연을 하거나 독자들을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과 고민들을 중심으로 쓰고 있다. 작가로 데뷔하기 전에 회사원으로서의 경험과 회사를 그만둔 후 글을 쓰게 된 계기, 글을 쓰면서 겪은 다양한 일상, 예컨대 강연을 하거나 독자들과의 만남, 맘에 드는 카페에서의 작업 등 작가로서의 일상을 담담하게 쓰고 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작가 자신의 생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소설『단순한 열정』에서 가장 강하게 사랑의 감정을 통감하는 글귀는 다음의 구절이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 만져졌던 그 몸 그대로, 그의 땀과 냄새가 섞이고 배어 있는 그 몸 그대로 가능한 한 오래 두고 싶은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p.36)

 

유명인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탓에 사인회에 부정적인 작가, 친구가 별로 없어서 좋다는 작가, 지금은 끊었지만 대학 2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는 작가, 책 추천 요청만큼은 하지 말아달라는 작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노력· 운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작가, 갑상선암 수술을 받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후 일시적으로 글을 쓰며 쉬엄쉬엄 지내자고 생각했던 게 십삼 년째 글을 쓰면서 살고 있다는 작가.

 

누구에게도 숨길 게 없이 솔직하다는 것, 나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생각에도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자유롭게 한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한 종교적 해석은 아니지만 우리가 활동하는 체제에 대해 올바른 관점과 지식은 상당한 자유를 준다는 것을 이 말은 시사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둘러싼 기초에 대해 꾸준한 지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리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요즘, 중심을 잡고 사는 일은 진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정녕 자유로운 인간은 타인으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기초를 탐구하는 인간일 것이다.

 

타인의 생각에 편입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을 옥죄는 규칙은 비례하여 증가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4차원'이나 '또라이'와 같은 별명은 자유로운 사람에게 붙는 훈장쯤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타인의 생각에 편입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도 어쩌면 그렇게 불렸을지 모른다. 자유로운 삶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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