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막연하고 대책없기로는 우울증 만한 게 없다. 약하게든 심하게든 직접 앓아본 사람이라면 너무도 잘 알 것이다. 설령 자신이 직접 앓지는 않고 가족 중 누군가가 앓는 것을 옆에서 속절없이 지켜보기만 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다리가 부러지거나 칼날에 손가락이 베이기라도 했더라면 잠시 잠깐 놀랄지언정 치료를 받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게 마련이니 크게 걱정할 일이 없지만 이 놈의 우울증은 치료는커녕 발병의 원인조차 알 수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 아닌가.

 

우울증을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이 병의 증세가 감기처럼 가볍지 않다는 데 있다. 감기처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이기는 해도 말이다. 영화 <소피의 선택>으로 잘 알려진 윌리엄 스타이런이 쓴 <보이는 어둠>은 우울증을 앓았던 작가 자신의 체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두고 개인의 의지나 마음이 약한 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병을 직접 앓아보았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우울증을 앓았다면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기 살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으며, 고독한 배우인 동시에 외로운 관객"이라고 했던 작가의 고백처럼 우울증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치명적인 질병인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에는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한 신념, 혹은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가혹하다. 이처럼 가혹한 상황을 더욱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은, 손쉬운 치유책이 가까운 장래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럭저럭 견딜 만한 치료법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더욱 극심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름아닌 이 절망감이 고통보다 더욱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킨다." (p.75)

 

1985년 가을, 윌리엄 스타이런은 자신의 처녀작인 <어둠 속에 눕다>로 시노 델 듀카라는 프랑스의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스타이런은 상을 받은 직후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얼마 후 술에 대한 몸의 이상 반응을 겪게 되었다. 술을 먹으면 구토가 시작되고 절망적이면서 불쾌하고 멍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이후 오랫동안 편안하게 거주했던 친숙한 우주가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장소로만 여겨졌던 주변 환경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적대적이고 무서운 장소로 돌변했던 것. 병명은 우울증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침범당하더라도 나의 이야기를 공론화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파리에서 우울증으로 인해 초래되었던 상세한 사례들을 기록함으로써 이 병과 그것의 진행 과정에서 겪었던 나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한두 가지 가치 있는 결론이 도출됨으로써 우울증에 대한 준거틀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p.42)

 

작가는 악화일로에 있는 자신의 증세를 꼼꼼히 기록한다. 그러나 우울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처절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 명의 환자인 동시에 끝없이 자신을 질책하며 증세를 악화시키는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하는 희생자가 자신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이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관찰자가 된다는 건 끔찍한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지극한 공포를 맛보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모든 형태의 상실감은 우울증의 시금석이다. 이 병의 진행 과정과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시달리고 있는 장애의 근원이 유아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이라는 점을 점차 수긍하게 되었다. 또 퇴행하여 나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매 단계 상실감을 경험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감의 상실 역시 이미 알려진 증상이다. 나는 자부심과 더불어 자아 감각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런 상실감은 재빨리 의존성으로 퇴행했으며, 의존성에서 유아 시절의 공포로 퇴행했다." (p.68)

 

작가는 돌파구가 없는 극단적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자기 파멸로 가는 마지막 순간에 작가가 들었던 <알토 랩소디>의 한 소절이 그를 구했다. 작가의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그 노래를 통해 그는 잊고 있었던 유년 시절의 즐거운 기억들을 되살려냈고 그 길로 그는 자신의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 입원했다.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분노와 죄의식은 슬픔의 둑을 막아놓을 뿐만 아니라 자기 피괴의 일부이자 잠재적인 씨앗이 된다." (p.97)

 

작가는 자신이 앓았던 우울증을 '절망을 넘어선 절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소위 '자살 공화국'으로 지칭되는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은 가장 위험한 질병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에 주목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8.7명으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이는 2위인 일본(18.7명)과도 큰 차이를 보이는 수치로, 2003년 이후 한번도 OECD 1위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2017년이 시작된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새해의 희망이 저마다의 가슴에서 파랗게 살아 있어야 하는 지금, 우리들 곁에는 절망의 고통 속에서 자기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작가가 말했듯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에 가까운 격려'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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