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보는 세상은 실상 보고 듣고 매만져진 것들을 그때 그때마다 변형하고 축소하고 왜곡시켜 나의 기분에 맞게 이미지화 한 연속적인 그림을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고 어느 누구로부터의 이해를 바랄 수 없으며 어떤 장황한 설명으로도 객관화 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내게 간직된 세상은 오직 나만의 세상, 나만의 실존일 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까닭에 세상은 보는 사람에 의해 한없이 밝고 찬란하게 채색될 수도 있지만 관찰자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그 찬란하던 세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채색의 암울한 세상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인식에 따라 언제든지 지워질 수 있고 부재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커서 삶에서 겪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나의 관점은 수시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사는 세상은 유동하는 그 무엇이며 그로 인해 나는 궁극적으로 불안정한 세상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은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논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로도 잘 알려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그의 나이 59세에 비로소 여류 시인 조이(Joy)를 만나 결혼한다. 이혼 후 아들 둘을 키우고 있었던 조이는 결혼 전에 이미 골수암 투병중에 있었는데 이 모든 악조건을 무시한 채 둘은 결혼하였고 한 때 조이의 증세가 회복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결혼은 불과 4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막을 내린다. 조이가 사망한 후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한 글은 나중에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A Grief Observed'라는 원제에서 보듯 작가는 제3자적 관점에서 자신의 슬픔을 관찰하고 있다. 그것은 곧 내재된 슬픔으로 인해 그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진 자신의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는 서른한 살까지 확신에 찬 불가지론자이자 회의론자였지만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극심한 슬픔으로 인해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의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상실의 고통을 겪어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슬픔은 여전히 두려움처럼 느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중간한 미결 상태 같기도 하다. 혹은 기다림 같기도 하여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슬픔은 삶이 영원히 암시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을 가치 없어 보이게 한다. 나는 차분히 인정할 수가 없다. 하품을 하고 몸을 뻗대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시간밖에 없다. 그 텅 빈 연속만이 있는 것이다." (p.55~p.56)

 

작가는 비탄에서 점차 벗어나는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비탄이 의무인 양 느껴지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애도가 죽은 자를 죽음 저편에 영원히 머물러 있도록 하며 절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우리는 다가오는 매시간 매순간을 만난다. 그 좋았다 나빴다 하는 모든 양태를 만나는 것이다. 최고로 좋은 순간에도 나쁜 순간들이 많고, 최악의 시절에도 좋은 순간들이 많다. 우리는 결코 소위 '사물 자체 the thing itself'의 총합적인 영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릇되게도 그렇게 부른다. '사물 자체'란 단지 이러한 좋았다 나빴다 하는 순간들의 총체일 뿐이다. 그 나머지는 그저 이름이거나 개념일 뿐이다." (p.29)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가는 결국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감정이 있는 우리 모두에게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을 고통 속에 빠트린 신에 대한 원망이 찾아오고 더불어 망자에 대한 그리움, 공허한 의식...

 

"이 세상에서 사랑은 언제나 감정을 동반한다. 그건 사랑 자체가 감정이거나 감정을 동반할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동물적인 영혼이, 우리의 신경계가, 우리의 상상이, 그런 방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기에 그랬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선입견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하는가!" (p.104)

 

작가에 의해 그려진 '슬픔의 지도'는 시시각각 변하는 슬픔의 행로를 보여준다. 때로는 깊은 계곡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을 지나기도 하며, 막막한 어둠 속을 걷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한 번 걸었던 그 길을 세세히 기억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슬픔이 지나가고 또 다른 슬픔이 온다고 해서 똑같은 경로를 다시 겪는 것도 아니다. '슬픔의 지도'는 기억할 수 없는 '망각의 지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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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 2017-03-05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

꼼쥐 2017-03-06 12:32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