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아침까지 달이 밝았다. 둥글고 덩치가 큰 얼굴이었다. '어제가 보름이었구나' 생각했다. 전작이 있었는지 달님은 불콰해진 얼굴로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기분이 좋아진 달님은 추위 속에서 운동을 하는 나의 모습을 땅 위에 우스꽝스럽게 그려놓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조롱하는 듯한 달님의 태도에 아무런 항변도 못한 채 운동을 서둘러 마치고 산을 내려왔다. 갑자기 내려간 수은주에 볼이 얼얼했다. 어제 내렸던 눈이 녹지 않은 채 드문드문 달빛을 받고 있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몸뚱어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우주만 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힌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다만 그러한 사정과 까닭을 너그럽게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인 듯하다. 우리 마음속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가슴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일까. 가끔은 아쉽기만 하다." (p.63)

 

이기주의 에세이 <마음의 온도>를 읽었다. 낮에 눈이 잠깐 내렸다. 예상에도 없던 갑작스러운 눈이었다. 풀풀 날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새벽 산책길에서 만난 달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 놓았던 이기주의 책을 무엇엔가 홀린 듯 읽기 시작했다. 책날개에서 작가의 프로필을 읽고 싶었는데 정보가 없다. 작가의 이름 밑에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는 다소 추상적인 말이 덩그러니 쓰여 있다. 작가에 대한 소개가 없을 때 나는 이상하게 답답한 마음이 들곤 한다. 성격 탓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집어 든 당신의 언어 온도는 몇 도쯤 될까요? 글쎄요. 무심결에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났다면 '말 온도'가 너무 뜨거웠던 게 아닐까요. 한두 줄 문장 때문에 누군가 당신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았다면 '글 온도'가 너무 차갑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요." (p.8)

 

책은 1부. '말 言, 마음에 새기는 것', 2부. '글 文, 지지 않는 꽃', 3부. '행 行, 살아 있다는 증거'로 이루어져 있고, 총 88꼭지의 짤막짤막한 글들이 실려 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내용이 좋다거나 다른 사람의 추천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던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생각하다가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순간적으로 골라잡은 것인데, 막상 책을 펼쳐 읽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런 내용의 책은 아니었다. 그저 세상 사는 이야기를 자신의 말과 글로 옮겼을 뿐.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p.163)

 

당신에게서 들었던 한마디의 말이, 은행에서 대기순번을 기다리며 어느 잡지에서 읽었던 한 줄의 문장이, 산책길에서 불현듯 떠올랐던 하나의 깨달음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시시한 뭐 그렇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작가도 아마 주변에서 긁어모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떤 나이가 되면 그런 이야기들이 소중해진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그런 이야기들이.

 

"가끔 삶이 버겁거나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비겁함으로 둔갑하려는 순간마다 나는 숀 교수가 들려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곤 한다." (p.301)

 

1월도 반이 흘렀다. 마냥 어제만 같은 나날이 우리들 곁을 소리도 없이 스쳐가고 있다. 그렇게 사라진 하루하루의 날들을 나는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많은 날들을 뭉뚱그려 한 달, 또는 일 년으로 계산에 넣는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후회는 그런 날들을 꼼꼼히 헤아리지 못했던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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