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의 한뼘노트
황경신 글, 이인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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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의 저자인 로버트 풀검도 말하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 꼭 배우고 넘어가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는 더러 극히 주관적인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누구나 '그때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것 한두 가지씩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아서 그 시절에 배우지 못해 후회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는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이 배우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동식물의 이름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나고 자랐던지라 숲의 나무나 풀 등 식물의 이름과 개구리나 두꺼비, 맹꽁이, 다람쥐 등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의 이름은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중학교 2학년에 막상 도시로 전학을 하고 보니 내가 알던 동식물은 보이지 않고 어디를 가나 죄다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내가 살았던 곳의 식생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책을 보면서 이름들을 익혀보려고도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나물도 뜯고, 더덕도 캐고 버섯도 따면서 자연스레 익혔던 것과 공부 삼아 일부러 익히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드는 수고도 수고지만 아무리 외워도 그때뿐이고 조금 지나고 나면 번번이 잊어버리곤 했다.

 

또 있다. 예술적 감수성이다. 음악이나 미술 분야도 그렇겠지만 문학에 있어서도 한창 감수성이 뛰어난 시절에 글쓰기 연습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이가 든 후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시기를 놓친 후에 이루어지는 독서나 습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감각적 글쓰기로 유명한 황경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 늘 궁금했었다. 내가 추측하건대 그녀는 분명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감수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을 터였다.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만 했었는데 최근에 읽었던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릴 때 학교 들어가기 직전 직후에 읽었던 안데르센이나 집에서 아빠가 항상 틀어놓았던 클래식 음악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오히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린 시절에 누렸던 게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들어 맞았던 것이다.

 

황경신의 에세이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를 읽었다. 재작년에 읽었던 <생각이 나서> 이후 그녀의 책은 참으로 오랜만에 읽는다. 그녀는 어쩌면 에세이에 최적화된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그녀의 문장에는 연습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문장이다.

 

"아침에 너는,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부스스한 영혼의 쓴맛을 훑는다. 밤새 무뎌진 과도로 사과를 깎고, 창을 열어 거울을 받아들인다. 아침에 너는, 생의 가장자리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고, 오래도록 소식이 없는 사람을 잠깐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쫓아낸다." (p.29)

 

화가 이인의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그때그때의 영감을 글로 옮겨 한 권의 책으로 엮기까지 때로는 단번에, 때로는 뜸을 들이듯 아주 천천히, 혹은 죽음과 같은 침묵으로 이 글들이 씌어졌을 것이다. 시를 읽고 그것을 노래로 바꾸는 작업처럼 그림을 보고 그것을 글로 재창조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터, 작가의 멈춤과 이어짐이 어떤 깨달음처럼 이어진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나에게 낯설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서투름은 나의 진심을 증명하는 것임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모든 익숙함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나의 삶임을,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는 순간, 꽃처럼 시들어버릴지도 모를 것이 또한 진실임을, 한없이 차오르는 것과 한없이 비어가는 것의 동일한 무게를, 희미하고도 선명한 시간의 직선과 곡선들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투성이의, 그 친밀하고도 낯선 엉망진창의 뒤엉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p.157)

 

볼에 닿는 바람이 차다. 아침에 나는 간간이 눈이 내리는 새벽 산길을 걸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땅은 부드러웠고, 촉촉히 젖은 낙엽과 물기를 머금은 나무 둥치를 보며 곧 펼쳐질 하루에 대해 저으기 안심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하늘은 더없이 화창하게 맑았고, 싸늘해진 바람이 코끝을 할퀸다. 쉽지 않은 하루인 것이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듯 기다림이 떠오르고 세계는 부드럽게 몸을 뒤척인다. 지구의 리듬에 순응하며 사람들은 짓는다. 마주 보는 이야기를, 공존하는 이야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그 모든 것들은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p.272)

 

나는 항상 과거를 향해 기다림의 손길을 뻗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불가능의 영역에 나는 매번 집착한다. 습관처럼 굳어진 생의 절망을 등에 지고 나는 또 한 해의 마지막에 서 있다. 며칠 후면 나는 또 보신각 타종 소리를 듣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에게 신년 인사를 전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과거를 향해 그리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나의 기다림은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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