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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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을 거스르며 바람이 불고 있다. 스산한 느낌이었다. 스산하다는 그 느낌에서 나는 생각을 멈춘다. 그래. 가을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바람은 이미 불고 있었지. 심지어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의 어느 날에도 나의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고 있었어. 그것은 다만 시원하다는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손끝에 감지되지 않는 어떤 것이었을지라도 내 머릿속에선 결코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상상처럼 가을이 왔고, 가을도 다 가기 전에 벌써 스산하다고 느낀다는 건 나는 이미 겨울을 염려하고 있거나 상상 속에서 겨울을 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같은 계절을 두 번 사는 게 아닌가. 한 번은 상상 속에서, 또 한 번은 현실에서.

 

가을 햇살이 옅어지던 오늘, 나는 박주영의 소설 <고요한 밤의 눈>을 읽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의 90퍼센트의 사람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노예이거나 소모품이라는 전제를, 나머지 10퍼센트의 사람 중에 다시 10퍼센트, 즉 전체의 1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조종하고 기획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정 나라를 언급한 적 없으니 어쩌면 전 세계를 의미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책은 단순히 스파이 소설에 불과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현대인의 절망적인 삶과 파편화된 개개인의 모습을 조망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X는 X의 일을 하고 Y는 Y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스파이이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하나이거나 하나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세상, 그 세상의 이면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이면에 또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 우리를 모른 체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등 뒤를 모른 체한다.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지만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언젠가 뒤돌아서 등 뒤를 보아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p.132)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생각의 날틀은 예상하지 못한 어떤 순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으로 불시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체도 없고,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도구로서의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고 보듬어야 할까. 소설에는 여러 이니셜로 지칭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 15년간의 기억이 사라진 채 깨어난 서른다섯 살의 남성인 X와 X가 병원에 있는 동안 보호자 역할을 했던 여성 요원 Y와 정신과 의사 D와 스파이 조직의 중간 보스인 B와 소설가 Z 등.

 

"인간이 기억의 총합이라면 그 기억을 가진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그 누군가. 하지만 그녀는 정답이 될 수 없다. 그녀는 십 년 전의 나만을 알고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진실일 테지만 그것은 그녀의 진실뿐이었다." (p.39)

 

성인이 된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은 X는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정신과 의사 D를 만나기도 하고 자신의 친구라고 기록된 Y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몸 담았던 회사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을 안다는 한 남성이 접근하여 그가 과거에는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는 애널리스트로서 조직을 위해 일했노라고 말하면서 다시 조직에 복귀할 것을 종용한다. 한편 신분을 바꿔가며 중요 요원들을 감시해왔던 Y는 X가 다시 스파이 일에 복귀하도록 조종하는 임무를 맡고 X에게 접근한다.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p.162)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스파이에 자원했던 수석요원 B는 자신도 단지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고 새로 들어오는 신참들은 그런 꿈마저 없이 오직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소설가인 Z를 지목했던 B는 Y에게 그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겼었지만 X와 가까워져서 그를 설득하고 감시하는 역할이 주어지자 Z를 감시하는 일은 다른 요원에게 맡겨진다. Y는 X의 서재에 꼽혀 있는 Z의 책을 발견하고 Z와 X가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통 사람에게 일상은 매일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알람에 맞추어 겨우 일어나 요기를 하고 일터로 나가는 분주한 하루의 시작부터 그 하루를 바삐 보내고 지친 몸으로 귀가해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켜놓은 채 앉아 있다가 잠드는 나른한 하루의 끝까지, 그 하루의 순간순간을 함께하는 누군가의 몸짓을, 이야기를 시간과 함께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기록한다. 하지만 기록은 기억을 완전히 대신하진 못한다." (p.63~p.64)

 

Y와의 결혼을 염두에 두었던 X는 Y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 정신병원에 있는 Y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한때는 스파이였던 Y의 어머니도 딸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정신병자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X는 알게 된다. 한편 Z가 X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Y는 Z의 감시 임무를 다시 맡게 해달라고 B에게 부탁한다.

 

"현실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정당한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사람, 바꿀 수 있다, 해낼 수 있다는 격렬한 희망을 여전히 품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p.288)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스파이 조직이 어떤 성격의 조직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소수의 상위 그룹에 집중된 권력의 편중은 갈수록 심화되고 다수의 대중은 점차 냉소와 무관심만 더해가는 현실에서 '생각은 최고의 지성이었고 최상의 사치'로 변모해 간다. 그런 환경이 지속될수록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 작가는 우려스러운 것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주변은 온통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스파이들의 세상으로 바뀌고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희망은 사라진다. 이러한 비극적은 결말이 도래하기 전에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회복해야 하고, 그 원동력은 바로 독서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을 터였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던가. 실체도 없고, 진실도 없었던, 어쩌면 종교보다 더 성역화 된 '반공'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만들어 온 게 아닌가 싶다. 개인의 능력이나 정당의 도덕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반공'이라는 종교를, '안보'라는 신을 숭배해 온 우리에게 지금의 현실은 뼈아픈 자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대통령 한 명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참회여야 한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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