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아마 그것은 작은 것만 보지 말고 큰 것을 보라는, 또는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시야를 크고 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이 독서에서도 유용한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적어도 소설을 읽는 데에는 말이다. 예컨대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며 읽을 것인가, 아니면 전체의 스토리에 집중하며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선택에 따라 소설 읽기의 재미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이 문제는 아이들보다는 성인의 독서에 있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삶의 경험이 적은 아이들에게 있어 동화나 소설, 신화, 전설 등 서사 구조의 모든 이야기는 새롭고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책 속 가상의 세계일지언정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에게 있어 소설은 자신이 한번쯤 들어봤거나 비슷한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재미도 없고, 때로는 지루히기까지 한 현실의 재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된 후에는 내용을 중시하는 어린 시절의 책읽기 습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체의 내용보다는 작가가 표현한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와 그것이 주는 깊은 깨달음을 여러번 되새기며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책에서 취할 수 있는 재미와 지속적인 독서 생활이 가능해진다.

며칠 전 외국인 친구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고 싶어 가까운 서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공간이 그리 넓지 않은 서점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은 주로 자기계발서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해리포터 신간(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을 사주었다.서점을 나와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그 친구가 내게 물었었다. 한국인들은 자기계발서만 읽고 문학책은 언제 읽느냐고.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독서 교육을 받지 않은 채 성장하는 우리의 교육환경은 성인이 된 후에 문제의 심각성을 곳곳에서 드러내곤 한다. 독서를 통하여 문학적 상상력을 배양하지 못한 사람은 문학 자체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서적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의 독서력을 갖춘 성인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인문학이나 자기계발서를 포함한 실용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문학을 멀리 하지는 않는다.

큰 틀에서 보자면 삶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시각에서 삶은 모든 게 도전의 대상이고 가능성의 영역이지만 어른의 시각에서 전체적인 삶이란 그저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에서 재미를 발견하기란 아이들보다 어른이 훨씬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삶은 그저 '살아내야' 하는 무거운 책무일 뿐이다. 이따금 '소설을 무슨 재미로 읽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이야기란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아, 이 사람들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큰 틀에서의 삶, 숲으로서의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성인의 독서는 숲이 아닌 하나하나의 나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반복하여 더듬고 어루만져 그 까칠하고 부드러운 껍질의 느낌뿐만 아니라 수관을 통하여 흐르는 생명의 소리마저 감지하게 될 때 그것은 단지 눈으로 보여지는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내 곁을 지키는 동지이자 친구로서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삶은 나무를 봄으로써 숲을 이해하는 구조이지 숲을 봄으로써 나무를 이해하는 구조가 아니다. 삶의 모방인 소설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루 중 '우연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삶의 재미를 발견할 리 없으며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와 그 이면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재미를 찾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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