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너를 읽는다

 

우리 은밀히 모이자고 그런 다음

광화문 한복판에서 삐라를 뿌리는 거야

어때 기막히지?

 

아뇨 코 막혀요

독서 권장 리플릿을 손으로 나눠주면 되지

왜 굳이 하늘에서 삐라로 뿌리자는 거예요?

정권 타도라고 대문짝만하게 쓰면 모를까

겁도 많으시면서

 

일단 저 박근혜가 꼴도 보기 싫어 그러지

왜?

김시인은 꼴이 보기 좋아 그런가?

 

긴한 말로 보자던 인쇄소 사장은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눈도 부어 있었다

은행에서 거절당한 대출 건은

나한테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더니

개씹새끼라며 연신 은행장을 욕해댔다

 

까짓것 오늘 타온 약에서 약한 걸로 다섯 알 드릴게요

병원은 초밥집 3층 <약손명가> 맞은편이에요

나는 처방 받은 약봉지 안에서

졸민정 0.25mg만을 골라 그에게 건넸다

 

유연하고도 날렵한 알약이군

요게 바로 김시인의 비타민이란 얘기지

짙은 바닷빛 알약 다섯 개를

인쇄소 사장은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냉동고에 꽁꽁 얼린 난자완스 있으세요?

있으면 그것부터 버려버리세요

약기운에 자다 깨서 그거 데우다

솥뚜껑까지 태워먹은 게 나거든요

온 집안이 연기로 뒤덮였죠

 

소방차는 출동했죠

나는 팬티에 노브라 차림이었죠

맨손으로 시커먼 솥을 집었다가 놓쳤는데

오른 발등뼈가 깨가 됐지 뭐에요

 

고기를 먹겠다는 심사였는데

숯을 깨물어먹게 생겼으니

이쯤에서 궁금해지더라고요

맨 처음 숯불에 고기를 올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연을 알고나 구운 것일까

살이 됐다 숯이 되는 그거요

말끝에 불을 놓으니

똥줄이 타는 그거요

 

어쨌든 고기가 숯이 되는 건 껌 씹는 일 같지만

숯이 고기가 되는 건 씹던 껌 다리는 일 같아요

 

어떤 뒤집개가 날 엎어봤는지 몰라도

아직 고기 뒤집을 때는 아니었나봐요

불판 위에서 손등 때리거나 맞을 때

그 순간에 왜 맞고 왜 때리나

우리 서로 모르면서도 실은 척 보면 또 알잖아요

덜 익었으니 좀 두고 보자는 식은 그러니까

 

요, 집중!

요요, 집중! 집중!

 

 

: 김민정의 시집<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 나오는 재미있는 시다. 우리는 누구도 그녀의 한마디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도 갑자기 할 말이라도 생각났다는 듯 "요, 집중!" 하고 외친다면 다들 조용해지겠지. 이상하게도 더위가 가시자 시가 고파졌다. 삼삼한 일이 생기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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