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하트 -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이란 제멋대로 뻗은 나뭇가지처럼 각자가 생각하는 저마다의 셈법이 다 달라서 사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어쩌면 날씨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기로 보자면 말복도 지났고 더위도 어지간히 수그러들 만한데 연일 푹푹 찌는 열기로 사람들의 화만 돋우더니 기상청 예보 또한 번번이 엇나가는 바람에 모든 비난의 화살이 기상청으로 집중되었었지요. 그러던 게 처서가 지난 밤기온은 거짓말처럼 한결 시원해졌던 것입니다. 기상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야 나름 항변할 말이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셈법이 다른 일반 국민들과 언쟁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겠지요. 한낮의 기온이 33도 이하로 떨어지는 시기를 예측하는 기상청 예보가 서너 번 엇나갔었고 이번 주 금요일로 다시 또 연기된 상황이지만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 그 말조차도 믿지 못하는가 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밤기온이 조금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의 갈등과 오해가 모두 풀렸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이겠지만 말입니다.

 

정아은 작가의 <모던 하트>는 셈법이 모두 제각각인 요즘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제대로 그려낸 소설입니다. 개인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어쩐지 '개인주의'라는 말 속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끈적끈적한 욕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여 나는 일부러 '셈법'이라는 말을 꺼내들었던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까지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던 하트>의 주인공 김미연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이는 서른일곱 ,전문대 졸업 후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인사부에서 8년 동안 재직하면서 사이버 대학을 나왔고, 서치펌 '헤드 앤 코리아'에 입사한 지 3년차의 헤드 헌터로 미혼입니다. 작가는 주인공인 김미연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와 성 차별, 결혼을 둘러싼 여러 고민과 다양한 시각들을 파헤칩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싱글인 사람들을 만나면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자유를 존중해주지는 않는다. 자기들이 선택한 삶에 따르는 무거운 짐들을 당연한 듯 나누어 들자고 한다.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어서 시간이 넘쳐나는 인간일 뿐이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이 현상은 심화된다. 정작 나는 결혼하지도 않았고 자식도 없는데, 점점 다른 사람들의 자식을 돌보거나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늘어난다." (p.152)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군인 출신의 보수적인 아버지와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 중 장녀인 미연은 직장 근처에 있는 강남의 작은 아파트에서 독립하여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거래처로 삼고 있는 여러 회사의 인사부로부터 오더를 받고, 그에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여 의뢰한 회사에 소개하고, 최종적으로 취업이 결정되면 연봉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받는 게 그녀와 같은 헤드헌터가 하는 일입니다. 유능한 상사인 최 팀장을 통하여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는 있었지만 미연에게도 여러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역시 결혼입니다. 그녀는 현재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태환'을 마음에 두고 있으나 일치하지 않는 여러 조건 때문에 관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육식을 배제하는 태환의 식성과 돈에는 도통 욕심이 없으면서도 까칠한 그의 성격과 전문대를 나온 그녀의 학벌은 넘을 수 없는 어떤 장애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그녀를 죽자 사자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동호회에서 만난 '흐물'(본명은 정경훈)은 지방대를 졸업하고 대전에서 공사를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미연의 요청이 있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서울로 달려오는 열혈남입니다.

 

회사 정치에도 어둡고 눈치도 빠르지 않았던 미연은 그녀의 상사였던 최 팀장이 회사를 떠나면서부터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그녀에게는 확실한 거래처도, 회사내에서의 확실한 보호막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삼십대 중후반의 나이에 확실한 경력이나 소득원도 없는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그녀 주변에는 뛰어난 정보 수집력과 인맥 동원력을 겸비한 후배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녀들을 볼 때마다 자신은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녀의 연애전선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 날 대학로로 나오라는 태환의 제안을 거절한 채 흐물을 불러냅니다. 흐물을 만나면서도 온통 태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미연은 결국 태환에게로 달려갑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흐물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말이지요. 그 날 밤 만취했던 미연은 흐물을 까맣게 잊고 태환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던 흐물은 그 날 이후 그녀와의 연락을 끊었고 얼마 후 동호회의 아는 언니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어차피 생이란 그런 것. 진행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경각심이 든다면 그것은 파국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완전한 격정과 놀라운 속도, 그리고 이전의 생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일탈이 혼연일체를 이룰 때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은 완성된다. 원인과 과정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인연이 이미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다음,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받아들이고 다시 걸어가는 것. 생에 같은 순간이 두 번 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파국으로 인한 교훈도 실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를 원망하거나 스스로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후일담이다." (p.282)

 

미연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소설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태환에게 달려갔던 그녀의 선택이 과연 옳았던가 하는 문제는 태환을 만나는 그녀의 태도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드 헌터는 쟁쟁한 스펙과 철저한 경력 관리를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많은 직장인들을 일차적으로 검증하는 직업입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화려한 스펙과 뛰어난 능력, 외모와 학벌, 인맥과 환경 등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게 되고 그것은 마치 습관처럼 굳어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그녀의 동생 세연도 비록 서울대 출신의 남자를 만나기는 했지만 고시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무위도식 하는 남편 때문에 일간지 기자로, 두 아이의 엄마로, 한 집안의 며느리로 동동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 동생의 그런 모습을 영 못마땅하게 여겼었던 미연도 결국 비슷한 선택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오래 전에 형성했던 자신의 낡고 쓸모없는 습관을 과감히 버리고 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닌가 봅니다. 그 낡고 쓸모없는 습관들을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 하면서 자신의 보따리에 꽁꽁 숨겨두기만 할 뿐 버려지는 건 도통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보따리 안에 숨겨 둔 자신의 습관들을 겨드랑이에 꼭 낀 채 평생을 살아가는 게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걸 두고 '보수적'이라고 하던가요? 물론 대가(보수)를 받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수적'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보수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자신의 습관 보따리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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