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의 배신
마크 쉔 & 크리스틴 로버그 지음, 김성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어제 모처럼 들렀던 도서관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로 가득했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그들 중 다수는 제발 공부 좀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도망을 쳤거나 지긋지긋한 공부로부터 달아날 궁리를 하다가 인근 도서관을 떠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인다. 공부는 뒷전이 된 지 오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에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른다. 물론 밤 늦게 집으로 귀가해서는 온 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나간 듯 피곤에 절은 얼굴로 그들의 엄마에게 귀가 보고를 할 것이다. 공부만 했더니 피곤하다고. 아이의 보고를 들은 엄마도 그 말을 100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도 하지 않고 집에서 오락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빈둥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나가 놀지언정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주었던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마음에도 없는 부드러운 말로 아이를 위로할 것이다.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을 지켜보는 아내도 그 속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닌 모양이다. 아들은 성적에 대한 욕심도 없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을 수 없으니 은근히 걱정도 될 테고, 아들의 태도 또한 괘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먹고 싶다는 거 다 해다 바쳤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배신감도 들 것이다. 주중에는 떨어져 지내는 나는 빈둥거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전혀 없을 듯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아내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수록 나 또한 스트레스 게이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만사 태평한 아들의 일상을 시시콜콜 보고 받노라면 저래도 괜찮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마크 쉔과 크리스틴 로버그가 쓴 <편안함의 배신>을 읽다 보니 아들의 미래가 적잖이 걱정되었다. 나의 유년시절과 비교하면 아들은 불편이나 고생은 전혀 모른 채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력이란 게 불편을 해소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아들은 지금 상태에서 움직일 이유가 크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들의 속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닌데 아들이 지금 100퍼센트 편안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들의 행동으로 봤을 때 크게 불편해 보이지도 않으니 아들을 치열한 공부의 현장으로 내몰 수 있는 방법 역시 없는 듯했다. 아내의 잔소리나 나의 협박이 먹힐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려 아들에게 온갖 불편을 경험하도록 할 수도 없으니 여간 딱한 노릇이 아니었다.

 

"정서적, 신체적 건강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편함에 직면해서도' 편안과 안전을 찾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는 내 본능 회로를 재훈련시켜 불편을 예상하거나 경험할 때마다 공황발작 버튼을 누르지 않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이런 과정들이 즐겁다고는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이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정한 건강과 행복은 그저 편안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을 배우게 된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진정한 건강과 행복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역경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p.59)

 

현대인에게 편안함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흔한 까닭에 일상에서조차 감지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편안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불편을 참고 견디는 힘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불편은 단순히 불편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편에 적응하여 내성을 키우지 못한 사람은 삶의 어느 순간에 부딪치게 되는 작은 불편이나 역경에도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른바 공황장애가 그것이다.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불편을 찬양하고자 쓴 책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편안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외부적 불편을 견디는 힘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심리적 또는 내부적 불편 또한 견디지 못한다. 그런 예는 우리 주변의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도로에서 나는누구보다도 빨리 달리고 싶은데 규정 속도를 지키는 앞의 차 때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심리적으로 불편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 불편을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앞차를 추월하거나 화풀이를 하려는 듯 크게 경적을 울리곤 한다. 재수가 없으면 이따금 난폭운전으로 처벌을 받곤 하지만 질병과도 같은 그것을 법이 치료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정말이지 공부라면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했었다. 거짓이 아니다. 공부를 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내 노력의 기저에는 가난이라는 현실적 제약과 그것에서 오는 불편이 있었다. 하루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간절한 욕망이 나를 움직였고 피곤함도 잊은 채 공부에 전념하도록 했다.

 

"나는 불편이 그 어떤 편안함보다도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고 확고하게 믿는 사람이다. 무엇인가 되고자 하고,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인생의 성공을 달성하고자 할 때는 불편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강력한 변화의 동인인지도 모른다." (p.296)

 

도서관을 놀이터인 양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편안함의 배신>을 읽었다. 부모들 중 어떤 이는 순진하게 뛰노는 저 아이들을 향해 "배가 불러서 그래." 뭉뚱그려 말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불편함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대를 역행하여 부모 세대로 돌아가게 할 방법도 없고 그들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요만치도 없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성공의 법칙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성공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 더하기 현재의 생활을 즐기는 것 더하기 한가한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지고 현재를 즐기면 미래의 현재도 즐거울 것이고, 한가한 시간에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잘못된 방향을 수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요즘의 아이들은 공부를 즐기도록 만들지 않으면 달리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불편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는 팥쥐엄마가 되기에는 요즘 부모들의 마음이 마냥 여리고 모질지 못하다는 것도 요즘 아이들이 편안함에 마냥 안주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만큼은 누구보다 성공하기를 바라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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