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더블 side A 더블 - 박민규 소설집 1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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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핫팩을 그러쥔 듯 몸이 덥다. 문득, 그렇다. 설마 덥기까지야... 아침의 내 생각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곗바늘에 채여 비틀대거나 휴일 아침의 게으른 얼굴처럼 초췌해졌다. 계절의 변이(變異)는 그렇게 갑자기 다가와 얼굴을 쿵하고 부딪히거나, 콧김을 훅 뿜고 달아나는 것이다.

 

박민규의 두 번째 소설집 [더블 side A]를 읽었다. 일전에 읽었던 [카스테라]의 여운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사 월이었고, 춘곤증 1리터를 원샷한 기분이었고, 안 그래도 머리가 책상의 윗면과 가까워지려는 시기에 굳이 소설을 읽을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그랬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작가가 직접 마스크를 쓰고 촬영한 표지 사진이다. 또라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나, 내리거나, 번지다가, 문득 멈춰 섰다. 멕시코의 전설적인 레슬러 '블루 데몬'과 '엘 산토'를 모티프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문학상 시상식에도 이 가면을 쓰고 나갔다고 하니 또라이라는 내 생각이 맞거나, 때리거나 흘러내렸을 것이다. 아마도. 18편의 단편을 두 권에 나눠 묶은 이 책은 상·하권이 아니라 side A, side B로 나뉜 음반과 같은 느낌을 준다. 박민규의 소설이 다른 작가와 차별화되는 주된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과 뛰어난 문장력 덕분이겠지만 그와 더불어 행갈이와 여백 등의 시각적인 장치를 통하여 소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독자들에게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블-sideA]에는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근처'를 비롯하여 '누런 강 배 한 척', '굿바이, 제플린', '깊', '끝까지 이럴래?',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굿모닝 존 웨인', '축구도 잘해요', '크로만, 운'의 9편이 실려 있다.말기암 판정을 받은 40세 독신남의 귀향을 통해 죽음과 존재의 성찰을 시적으로 그려낸 '근처'는 박민규 작가의 변화와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카스테라]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그려냈다면 [더블]에 실린 작품들은 죽음과 삶이라는 본원적인 질문을 향해 더 깊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이 끓을 때까지, 또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갈라진 허물의 등짝을 바라본다. 죽음도... 저런 걸까? 행여 삶이란 허물을 벗고,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저 틈을 빠져나온... 그리고 다시, 오래전에 죽었을 매미의 삶을 나는 떠올려본다. 수면(水面)이란 허물을 벗어던지고, 잘 우러난 얼그레이의 향이 코끝까지 번져온다. 남은 삶이 문득 홍차가 되기 직전의 뜨거운 물처럼 느껴진다. 번진다, 번진다" ('근처'-1권 p.16)

 

자식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내어주고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한 노인의 시선을 그린 '누런 강 배 한 척'도 '근처'의 연장선에서 다루어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란//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연명(延命)의 불을 끄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창을 열고, 나는 베란다로 나간다. 긴 하루의 늦은 밤이다. 흐르고 흐르고 흐르는 차들의 불빛들로, 언뜻 저 멀리 도로가 길고 긴 강물처럼 느껴진다. 아득하고, 멀다. 이제 그만//건너고 싶다.//저 누런 강, 나는 한 척의 배처럼" ('누런 강 배 한 척'-1권p.65~p.66)

 

특이한 것은 [더블]에 실린 작품 중 많은 것이 작가에 의해 시도된 실험적인 작품이라는 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SF적이거나, SF스럽거나, SF 비스무리한 작품들이 미래스럽게 펼쳐진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심해 탐사라는 특이한 소재로 쓰여진 '깊'이 그렇고, 다른 우주의 이야기를 다룬 '크로만, 운'이 그렇다.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작품은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였는데 작가는 어둠 속 망루에서 끝도 없이 보초를 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시니컬하게 다루고 있다. 나는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렸다. 소설의 분위기도, 양이 등장하는 것도 어쩐지 서로 유사한 면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박민규 작가도 하드하면서도 보일드한 세계의 끝과 같은 원더랜드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지구의 울음소릴 듣고 싶었어. 이어지는 고요 속에서 샘케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꼭 한번은 말이야. 하지만 실은 인간의 울음소리가 아닐까? 드미트리가 속삭였다. 룸도 인체의 확장일 뿐이야, 조금 전의 소리도 그 인체가 낸 울음이고, 룸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깊'-1권p.135)

 

주말 휴일 이후의 평일 하루를 이미 겪은 몸이지만 천 근 만 근 늘어지는 몸을 어찌할 줄 모르겠다. 청명한 봄하늘과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의 설레는 표정은 곧 있을 초여름의 더위를 예고하고 있을 테지만 나는 여전히 겨울스러운 오후의 외투를 입고 박민규의 SF스럽거나, SF 비스무리했던 소설들을 생각하며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다. 달다, 또는 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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