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피플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라면 적어도 한 번씩은 다 읽어본 것 같군요. 하지만 그의 단편은 언제나 예외로 해야 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먼저 읽고 그 소설의 힌트나 실마리가 되었을 듯한 단편 소설을 찾아 읽는 버릇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버릇은 하루키의 소설이 대개 단편이 먼저 나오고 그것을 바탕으로 쓴 장편이 나중에 출간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느 장편소설의 실마리가 되었던 단편 소설이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고 스치듯 지나칠 수 있는 일부분만이 비슷할 뿐입니다. 저는 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하루키의 단편을 읽곤 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비록 하루키의 애독자이긴 하지만 그의 단편은 항상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지워진 이후에나 읽게 됩니다. 이처럼 하루키의 단편소설은 단순히 단편소설로 존재하지 않고 뒤이어 나올 장편소설의 베이스가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작품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루키의 장편을 한번쯤 읽어본 분이라면 단편소설 또한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이따금 '어라, 이 장면은 어디선가 읽은 듯한데' 하는 기시감을 느낄 수도 있겠구요.

 

이 책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1988년 장편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발표한 후 한동안 공백기가 이어지다가 1990년에 엮어진 이 책은 1992년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1994년~1995년의 <태엽 감는 새>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가노 크레타'는 <태엽 감는 새>의 몇몇 장면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 <TV피플>에는 표제작인 'TV피플'을 비롯하여 '비행기',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가노 크레타', '좀비', '잠' 등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표제작에 등장하는 '나'는 어느 가전 회사의 직원으로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립니다. 게다가 작은 출판사에 다니는 아내 또한 바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아내가 외출하자 '나'는 집에 혼자 남겨집니다. 그때 '나'는 보통 사람 체구의 7할 정도인 TV피플이 예고도 없이 방문하여 TV를 설치하여 놓고 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러나 밤늦게 귀가한 아내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다음 날 월요일에 회사에 출근한 주인공은 회사에서도 TV피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직원들 또한 아내처럼 TV피플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퇴근을 하여 집에 돌아왔으나 아내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귀가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기다리며 무심코 TV를 틀자 화면 속에 있어야 할 TV피플이 화면 밖으로 걸어 나와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제 곧 여기로 전화가 걸려올 거요."라고 TV피플이 말했다. 그리고는 계산을 하듯 잠시 짬을 두었다. "앞으로 5분 정도 후에." 나는 전화기를 보았다. 그리고 전화기 코드를 생각햇다. 어디까지고 하염없이 이어져 있는 전화기 코드. 그 끔찍한 미로로 얽힌 회선의 끄트머리 어딘가에 아내가 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저 먼먼, 내 손길이 닿지 않는 멀리에. 나는 그녀의 고동을 느낄 수 잇었다. 앞으로 5분, 하고 나는 생각했다." (p.60)

 

'비행기'는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단편입니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는 스물일곱 살의 유부녀와 관계를 맺고 자주 만났습니다. 여행사에 다니는 그녀의 남편은 자주 집을 비웠고,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집에서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관계를 갖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주인공에게 묻습니다. 본인이 혼잣말을 하는 사실을 아느냐고 말이죠. 그녀가 적어준 그의 혼잣말은 마치 비행기를 소재로 한 시와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다고 회상합니다.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는 어떤 의미에서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를 쓴 실화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중부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하루키는 그의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 그의 고교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196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들 세대의 사람들은 연애와 가치관에서도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았나 봅니다. 친구 또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며, 리더십도 있는 모범적인 학생이었고 그의 여자친구 또한 비슷한 부류였습니다. 둘은 언제나 붙어다녔고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여자친구는 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몸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결혼을 하면 단 한 번 자신의 몸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여 다니다가 사업을 시작했던 그는 어느 날 그녀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녀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녀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그는 끝내 그녀를 안지 못한 채 집을 나왔다고 합니다.

 

'가노 크레타'는 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주인공의 언니 마루타와 언니의 보조 역할을 하던 가노 크레타의 이야기를 쓴 작품으로 훗날 <태엽 감는 새>의 베이스가 된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좀비'는 결혼을 약속한 남녀의 갈등 상황을 판타지 형식으로 짧게 쓴 작품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잠'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 살던 주인공은 어느 날부터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날이 이어지면서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지만 그녀는 남면과 아이가 잠든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드라이브를 즐기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을 차츰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이 마땅히 휴식이어야 한다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내 전신을 감쌌다. 등줄기가 얼어붙고, 딱딱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또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꺼운 어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둠은 우주 그 자체인 것처럼 깊고, 구원이 없다. 나는 외톨이였다. 나는 의식을 집중하고, 확대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주의 저 깊은 곳까지 환히 꿰뚫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p.215)

 

하루키의 소설이 대체로 열린 결말을 추구하고, 그런 까닭에 독자는 그의 소설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한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거나 소설로서의 힘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써내려가는 그의 글솜씨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루키만의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키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때로는 환상의 세계인 양 읽히는 하루키 소설 속의 세계가 제게는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봄이 코앞인 듯합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현실을 꿈결인 양 느끼는 그런 나날들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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