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인형 - 황경신의 사랑동화
황경신 지음 / 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녀간의 사랑이란 건 어차피 동화이거나 판타지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랑에 빠진 남녀의 행동거지를 한나절 지켜본 사람이라면, 아니 한나절까지 갈 것도 없이 두어 시간, 혹은 몇 십 분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말과 행동이 성인의 그것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다는 걸 째빨리 눈치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세살배기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말이지요. 한없이 유치해지지 않으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처럼 철딱서니 없는 행동과 오글거리는 말이 지켜보는 이들의 눈과 귀를 수시로 괴롭힙니다. 그럴 수밖에요.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 밖의 세상, 중력이 사라진 지면 위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랑의 외계인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가슴속에도 그가 남겨놓은 슬픔의 씨앗 하나가 문득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을 살아 있게 하고 죽고 싶게 만들었던 빛나는 한순간이 그 씨앗의 싹을 틔워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그날,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서성이며 시간의 무게를 가늠해보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p.103)

 

황경신의 <종이인형>에는 열다섯 편의 '사랑 동화'가 실려 있습니다. 짧으면서도 시크한 문체가 인상적입니다. 작가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쉼표가 도드라진 가벼운 문장이 사랑의 느낌을 팔랑거리게 합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머릿속 생각을 이야기의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작가로부터 구연동화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금방이라도 쌔근쌔근 잠이 들어 꿈결에서 작가의 동화 속 주인공을 만날 것처럼 말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고, 시간이 농축되어 있지 않은 열매에서는 어떤 맛도 향도 나지 않는다는 건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잖아. 그건 당신이 늘 한 이야기야. 당신을 만나러 올 때도, 걸어오라고 했잖아.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자마자 만나러 오는 건 싫다고. 오늘 보고 싶으면 내일 오라고 했잖아. 그동안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싶다고. 그 시간 동안 익어야 하는 감정이 반드시 필요한 거라고." (p.82~p.83)

 

작가가 들려주는 사랑 동화는 마냥 달콤하다거나 차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쓸쓸하고도 애틋합니다. 사랑의 질료는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어느 날 허공으로부터 쿵 하고 떨어져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음'을 아프게 깨닫도록 하기도 하고, 사랑이 끝났다고 체념하려는 순간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건 당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슬픈 이야기는 아닐 거야. 그래도 슬픈 비밀을 털어놓자면,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랑이란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사랑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그것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얼마만 한 크기의 절망으로 남게 되는지, 그 절망이 얼마나 오래도록 나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지 잘 알거든. 그러니 당신, 내가 혹시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나를 믿지 마. 나는 픽션의 세계만을 신뢰하는 스토리텔러니까." (p.225)

 

황경신 작가는 사랑에 최적화 된 언어를 갖고 있구나,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가볍지만 깊은 우울이, 감각적이지만 영원의 느낌을 담은, 멈춤과 진행의 리듬이 지루하지 않은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따금 '이런 재능은 선천적인 거야. 갈고 닦아서 만들어진 게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말입니다. 봄이 오려는지 추위가 몸을 뒤치는 요즘, 달콤 쌉싸름한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 한켠으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올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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