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당신과 문장 사이를 여행할 때
최갑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매년 연말이면 수척해진 내 희망의 뺨을 몇 번이나 어루만지며 자책과 함게 긴 한숨을 내뱉게 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외롭기 이를 데 없는 나만의 송년회인 셈입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빈 방에는 졸음에 겨운 형광등 불빛과, 반성의 글 한 줄쯤 기대하며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노트와,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몇 시간째 뱅글뱅글 맴을 도는 연필과, 문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미는 오래된 추억들이 흐르는 시간만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습니다. 창밖에는 이따금 겨울의 침묵 속으로 고독을 섞는 바람이 드세게 붑니다.

 

그렇게 밤을 지새고 나면 내 삶을 시간이 훑고 지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시간을 천천히 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우리네 삶으로부터 피안처럼 멀기만 한 이상적인 삶,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에 삶을 즐기게 되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매번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 구질구질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떠밀려 갑니다.

 

"나는 지금 삶을 즐기고 있다."

난롯가에서 버트런드 러셀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온화하지만 이기적인, 다정하지만 냉정한, 따스하지만 논리적인 이 노신사의 책을 읽고 잇노라면 마치 그의 마른, 하지만 부드러움이 전해지는 손바닥이 어깨 위에 놓인 것만 같다. 가끔은 어깨 위의 손을 밀치며 '행복이라는 게 정말 있기나 한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p.114)

 

눈에 보이는 현실을 현실로서 차갑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다음에는 기필코'를 외치는 과대망상의 환자들로 넘쳐난다고 해야 맞겠지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인류는 진보를 거듭했다고 주장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 중에 단 몇 사람이 이룬 성과를 코앞에 들이대며 '그러니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희망고문은 과연 정당한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회의론자도 아니고 패배의식에 물든 퇴폐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보다는 현실을 현실로서 깨끗이 인정하고 단념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용기 없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지난 연말에 나는 최갑수의 여행에세이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를 읽었습니다. 그의 푸석거리고 윤기 없는 허무의 감정이 실린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까슬까슬한 돌기가 되어 내 가슴께를 꾹꾹 누르며 지나갑니다. 어쩌면 저는 태고적 허무를 제 몸 속 어딘가에 감추어 둔 채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쓸쓸함을 담은 그의 글 하나하나가 제 몸 속에 들어와 요동을 치는 것이겠지요.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사랑과 여행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낯설거나 익숙한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작가가 읽었던 책들, 자주 들었던 음악, 그리고 그의 심장에 인장을 찍듯 꾹꾹 각인된 문장에 그의 생각을 사진과 함게 덧붙였습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 살아 있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 '인생의 낮잠'중에서), "저기 밖에는 다른 삶이 있어. 내 말을 믿어."(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중에서),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중에서)처럼 여행지에서 또는 그 어느 곳에서건 작가로 하여금 한동안 사색에 젖게 했던 문장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과 작은 깨달음이 선별하여 실은 사진과 함께 새로운 느낌으로 되살아납니다.

 

"세월이 간다. 하루에 하루씩 꼬박꼬박 가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 영감을 읽다 눈에 띄는 한 구절. "이 세상 살아 잇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일에도 사랑에도 여행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시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190)

 

한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이 겪은 경험의 산물이자 귀결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따금 글도 생각도, 또는 말도 한 장소에서 우연히 얻게 되는 지역 특산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그 시각에, 그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이유로 내게 전달되었고 제 입과 손을 통하여 또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한풀 용기가 꺾이고 괜한 일로도 주눅이 드는 요즘입니다. 작가의 글은 얼핏 삶의 허무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한 해의 말미에 느끼는 삶의 허무를 인생의 무상함으로 치유한다고나 할까요?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이허치허'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수나 자질구레한 사건, 다툼 따위를 '에이, 이런 것쯤이 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잇었던 것은 아마도 피라미드 앞에서 배운 '허무의 감각'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죽어서 저렇게 커다란 삼각형도 하나 못 만드는 인생, 대충 넘겨가며 사랑하며 살자' 하고 생각할 수도 잇는 것이 인간이니까."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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